신성욱 교수(아신대학교)
(Photo : ) 신성욱 교수(아신대학교)

[1] 그동안 페이스북에 몇 차례 떴던 질문이 하나 있다.
“A man has 3 daughters named April, May and June. What was the father’s name?”
“한 남자에게 4월, 5월, 6월이라는 이름을 가진 세 딸이 있다. 그 아버지의 이름은 무엇일까?”라는 말이다.

[2] 도무지 답을 알 수 없었다. 이유가 뭘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딸 셋의 이름이 ‘4월’(April)과 ‘5월’(May)과 ‘6월’(June)이라면 분명 아버지는 그 세개의 달을 제외한 나머지 ‘어느 달’(Month)이 아닐까”라는 추측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답은 “우리가 추측하는 방향과는 전혀 다른 어디에 있지 않을까?”라는 머리가 돌아갔다. ‘허를 찌르는 의외의 곳에서’ 말이다.

[3] 오늘 교수들 학회 중에 우연히 페북을 보다가 같은 질문이 다시 뜨는 것을 보았다. 오늘은 반드시 끝장을 봐야겠다고 생각하고선 후배 교수에게 그 질문의 내용을 카톡으로 보냈다.
30분 뒤쯤 답이 왔다. “?” 모르겠다는 답이다.
그러는 사이에 나는 이 문제를 낸 사람의 의도에 맞는다고 생각하는 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정답은 ‘What’이었다. 문제를 다시 보자.

[4] “A man has 3 daughters named April, May and June. What was the father’s name?” 여기서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속는 부분은 “What was the father’s name?”에 있었다. 이걸 번역하라면 모두가 “무엇이 그 아버지의 이름인가?”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What”을 주어가 아닌 “사람 이름”으로 본다면 답은 의외로 쉬워진다. “‘What’이 그 아버지의 이름이었나?”라는 뜻이다.

[5] ‘아버지의 이름’에 대한 힌트가 바로 그 문장 안에 있었던 것이다.
완전히 허를 찌르는 퀴즈가 맞았다. 누가 그 문제를 생각해 내었는지, 두뇌 회전도 해보고 한 수 다시 배우기도 했다는 점에서 재미도 있고 유익도 했다.
살다 보면 이처럼 허를 찌르는 질문들이 꽤 있다.
성경을 해석할 때도 마찬가지다.

[6] 요 21:15-17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세 번 질문하신 유명한 내용이 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바로 이 내용이다. 여기서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첨예하게 갈린다. 적지 않은 학자들이 여기서 예수님이 질문하실 때 ‘아가페의 사랑’(ἀγαπᾷς με)으로 물으셨는데, 베드로는 ‘필레오의 사랑’(φιλῶ σε)으로 답했다고 본다.

[7] 즉 예수님은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이전처럼 부인하지 않고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느냐고 물으셨는데, 한 번 실패를 경험한 베드로는 이전의 장담과는 달리 ‘위험한 순간에는 또다시 도망갈 수밖에 없는 ’필레오의 사랑‘ 정도로만 주님을 사랑할 뿐이라 고백했다는 해석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본문의 저자 요한은 ‘아가페의 동사’와 ‘필레오의 동사’를 의미상의 구분 없이 막 사용한 것이 펙트다.

[8] 그렇게 봐야 하는 이유가 여러 가지가 되고, 그것들에 관해서 적어놓은 주석들이 여럿 존재한다. 하지만 본문에서 아가페의 사랑과 필레오의 사랑을 구분해서 해석할 수 없는 가장 확실하고도 강력한 이유를 오늘 학회 시간에 딴짓을 하면서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서두에서 소개한 그 ‘허를 찌르는 퀴즈’ 때문에 말이다. 학자들 사이에 열띤 논쟁거리인 이슈를 단숨에 잠재울 수 있는 정답이 그 본문 속에 있었음에도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이다.

[9] 그래서 “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이 나왔나 보다. 만일 저자가 ‘사랑하다’란 동사를 전혀 다른 두 의미로 구분해서 쓰려고 했다면 ‘ναὶ κύριε’(Yes, Lord)라는 단어가 거기 나오면 안 되었다. 두 단어를 구분한 번역을 소개해 보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친구의 사랑으로만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10] 이상하지 않은가? 주님이 질문하실 때의 사랑과 베드로가 대답할 때의 사랑이 달랐다면 “주님 그러하나이다”란 말이 아니라 “주님 아닙니다”(κύριε· οὐ μὴ)란 부정적인 답이 나왔어야 한다. 그런데 16, 17절 두 절에서 ‘ναὶ κύριε’(Yes, Lord)가 나와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성경을 연구하다 보면 정답이 아주 가까이 있음에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다른 데서 답을 찾으려고 할 때가 많음을 종종 경험한다.

[11] 말씀을 하나씩, 옳고 정확하게 깨달아 가는 일보다 더 큰 기쁨은 내게 없다.
성경을 연구할 때나, 전도와 설교를 통해 진리의 복음을 전달할 때나 이 ‘허를 찌르는 질문’이 꽤 유용하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처음부터 정답을 알려주는 것보다 스스로 진리에 도달하도록 길을 열어주는 방식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