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일을 취미로 하는 사람은 평범한 일반인이다. 취미를 넘어 일정한 실력을 갖추면 아마추어라 부르고, 그보다 더 뛰어난 경지에 이르면 프로가 된다. 프로가 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미 대단한 실력과 경지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모든 프로가 같은 프로는 아니다. 그중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존재들이 있다. 같은 무대에 서 있어도 차원이 다르다. 이들이 슈퍼스타다. 일반 사람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갈 수 없는 경지에 있는 사람들이다.
마가는 복음서를 시작하면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분명히 선포하고 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막1:1)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 분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루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이 이전에도 땅에는 위대한 제사장, 선지자, 왕들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어떤 인물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심을 마가는 처음부터 선언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 안으로 침투해 들어온 사건이다. 다시 말해, 3차원의 세계 안으로 4차원의 능력이 침투해 들어온 것이다. 3차원은 넓이와 길이와 높이 안에 갇힌 세계다. 눈에 보이는 것,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이 전부다.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이 분명하게 구분되는 세계다. 그러나 4차원은 하나님께 속한 영역이다. 3차원의 세계 안에 살던 인간들이 도저히 불가능 하다고 여겼던 일들이, 4차원의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을 통해 가능해졌다. 이때 우리의 고정관념은 무너지고, 우리는 놀라움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 그 4차원의 하나님의 세계를 조금씩 맛본다. 기도를 통해 맛보고, 말씀의 통해 하나님의 나라의 능력을 경험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고, 움직이실 때마다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다. 그것은 세상의 어떤 위대한 인물을 통해서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들이었다. 귀신이 쫓겨났고,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비롯해 각종 병자들이 고침을 받았으며, 나병환자까지 회복되었다.
이런 능력을 본 사람들이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그 결과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결국 예수님은 자신의 동네에도 마음대로 들어오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막1:45)
그렇게 오랫동안 동네에 들어오지 못하시다가, 예수님이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오셨다. 예수님이 동네에 들어오셨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그 집은 아마도 베드로의 장모의 집이었을 것이다. 집은 순식간에 사람들로 포위되었다. “1.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막2:1-2)
<기적보다 먼저 선포된 말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몰려온 사람들 대부분은 병자이거나 구경꾼들이었다. 기적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고, 자신의 병이 고쳐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 먼저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다. 병을 고치기 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셨다. 곧 복음을 전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관심은 언제나 영혼 구원에 있었다. 예수님의 사역의 우선순위는 복음 선포였다. 복음을 통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고, 그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시는 것이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사람에게는 영혼만 중요한가? 그렇다면 육신의 필요는 중요하지 않은가? 육신의 필요는 무시해도 되는 것인가? 인간은 영과 육을 동시에 지닌 존재다. 둘 다 절실하게 필요하다. 영적인 것으로 육적인 필요를 대신할 수 없고, 육적인 것으로 영적인 갈급함을 채울 수 없다. 그래서 육신의 필요와 영적인 필요를 단순한 순서의 문제로 접근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전인격적인 문제다. 때로는 허기지고 굶주린 사람에게 먼저 먹을 것을 주는 것이 옳다. 반대로 어떤 때에는 육적인 욕구를 절제하고 영적인 것에 집중해야 할 때도 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 기적에서 이 균형을 분명히 보여 주셨다. 하루 종일 말씀을 전하신 후, 해가 저물었을 때 사람들의 배고픔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셨다. 그래서 오병이어 기적을 행하신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이 땅에서 조금 더 나은 삶, 조금 더 편한 삶, 조금 더 재미있는 삶을 살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죄와 심판으로부터의 구원이다. 이 본질은 결코 바뀌어서는 안 된다. 그것도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사역을 통한 은혜로 주어지는 구원이다. 기독교는 이 땅에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운동이 아니다. 예수님처럼 착하고 희생적인 사람들을 많이 만들어 내는 것이 목적도 아니다. 예수님의 통치를 받는 백성들을 세우는 것이 복음의 목적이다.
<막힌 길 앞에서 드러난 믿음>
예수님이 집 안에서 한창 말씀을 전하고 있을 때, 그 흐름을 깨는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지붕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 흙과 부스러기가 사람들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잠시 후 지붕에 구멍이 뚫리고, 중풍병자가 누워 있는 침상이 집 안으로 내려왔다. 알고 보니 네 사람이 중풍병자를 침상째 메고 왔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 집 안으로 들어올 수가 없었다. 이들은 차례를 기다리지 않았다. 지붕을 뜯는,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선택했다. 그 순간 집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들의 행동은 예수님의 말씀을 방해했고, 멀쩡한 집을 망가뜨리며 집 주인의 권리를 침해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었고, 충분히 화가 날 만한 상황이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들에 대해서 한마디 하시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한 마디는 상황을 꾸짖는 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모든 혼란을 단번에 잠재우는 말씀이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이 구절은 매우 중요하다. 이 한마디 안에 예수님의 사역의 본질이 담겨 있다.
첫째,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메고 온 사람들의 행동을 믿음으로 보셨다. 왜 이들은 중풍병자를 메고 왔을까? 왜 사람들로 가득 찬 집 앞에서 물러서지 않고 지붕까지 뜯어서 내렸을까? 이 네 사람의 믿음은 무엇이었을까? 이들은 예수님이 나병환자를 고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막1:40) 예수님이 나병환자를 고치셨다면, 중풍병자도 고치실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긴 것이다. 그 믿음은 집 앞을 가득 메운 사람들 앞에서 시험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지붕을 뜯는 행동으로 드러났다. 그들의 믿음은 사람들의 비난을 넘었고, 지붕을 수리해야 하는 비용을 넘었으며, 들것을 옮기는 수고와 마음 속에 올라오는 불신앙 까지도 넘었다. 예수님은 바로 그 믿음에 반응하신 것이다.
<따뜻한 선언,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충돌>
둘째,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향해 “작은 자”라고 부르셨다. “작은 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5절) 보통이라면 죄인아 네 죄사함을 받았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부르지 않으셨다. 여기서 작은 자는 부족한 사람, 모자란 사람, 못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 테크논(Teknon)으로, 아이, 자손, 자녀를 의미한다. 어린 유아만을 가리키는 <파이디온>과 달리,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자녀를 가리키는 말이다. 사람이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부모 눈에는 여전히 아이처럼 보인다. 이것이 하나님이 죄인을 바라보시는 관점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정죄의 대상인 죄인으로 보지 않으셨다. 구원받고 회복되어야 할 하나님의 자녀로 보셨다. 중풍병자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풀어서 말하면 이렇다. “내 아들아 안심해라. 네 죄가 용서 되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종교 지도자들은 사람을 죄인과 의인으로 구분하며 정죄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부르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 병든 자, 목자 없는 양, 그리고 내 자녀라고 부르셨다.
예수님의 따뜻한 선언으로 집 안의 분위기는 한순간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그 흐름에 찬물을 끼얹는 사람들이 있었다. “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막2:6-7) 서기관들은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과 함께 대표적인 종교 지도자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산헤드린 공의회를 중심으로 종교와 정치권력을 동시에 쥐고 있었다. 이들의 판단에 걸리면 모든 것이 끝난다. 오늘날로 말하면 수사권, 기소권, 판결권을 동시에 가진 존재들이었다. 자신들의 체계에 위협이 되는 인물이 나타나면 감찰하고, 고발하고, 결국 제거했다.
바로 그 서기관들이 예수님이 가르치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것은 이미 예수님이 종교 지도자들에게 요주의 인물로 지목되었고, 본격적인 감시와 검증의 대상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신 “네 죄사함을 받았다.”는 말이 그들의 귀에 정확히 걸렸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막2:7) 서기관들은 즉시 마음속으로 결론을 내렸다. 이것은 신성모독이다. 죄를 사하는 권세는 오직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이다. 신성 모독의 죄는 사형에 해당한다. 그들은 이 판단을 자신들을 보낸 이들에게 보고할 것이다. 이 순간은 단순한 논쟁이 아니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역뿐 아니라, 생명까지도 위협받을 수 있는 중대한 위기였다.
그러나 이 갈등과 위기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만드신 것이다. 예수님은 이미 서기관들이 그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고, 왜 왔는지도 알고 계셨다. 서기관들과 충돌하지 않으면서도 중풍병자를 고치실 방법이 얼마든지 있었다. 중풍병자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일어나 네 침상을 들고 가라고 말씀하시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굳이,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심으로 갈등을 유발하셨다.
사실 서기관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그들의 마음속에서만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과 판단을 이미 알고 계셨다. 그리고 그것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셨다. “8.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막2:8-9)
<죄를 사하는 권세가 증명되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분명히 보여 준다.
첫째,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아시는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잠16:2)
둘째,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너무 파격적이어서 그것을 듣는 모든 사람이 같은 반응을 할 수밖에 없었다. 서기관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할 수 있는가? 이 생각은 틀린 것이 아니다. 그 자리에 있던 누구라도 동일하게 했을 생각이다. 서기관들이 분노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도 아닌 사람이 어떻게 죄 사함을 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들의 질문 속에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다. 만약 예수님이 실제로 죄를 사할 수 있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라는 결론에 이를 수 밖에 없다.
예수님이 갈등을 피하지 않으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서기관들의 생각을 통해 스스로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시기 위함이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반문하신다. 죄사함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쉬운가, 아니면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고 말하는 것이 쉬운가?
말로만 죄 사함을 선언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증명하는 것은 다르다. 예수님은 그 권세를 분명히 보여 주셨다.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막2:10-11) 말이 떨어지자마자 중풍병자는 모든 사람 앞에서 침상을 들고 걸어 나갔다. 예수님은 스스로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진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셨다. 이 사실을 믿었던 네 사람과 중풍병자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다. 오늘 이 장면에서 그들은 믿음의 콜라보를 이루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원을 이루시는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오늘날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 약속을 따라서 행동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다.
이번 주 이 설교 준비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있다. 매주일 설교 후에 말씀에 의지하여 병자들을 위해 치유를 선포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말씀을 의지해서 선포하려 한다. “16.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8:16-17) 예수님은 우리의 육신의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셨다. 우리의 죄뿐 아니라 병까지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셨다. 이제 말씀을 믿고 기도하며 선포하려 한다. 말씀을 믿고 선포하고, 믿음으로 아멘할 때 역사는 하나님이 이루신다. 말씀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 임한 하나님의 나라의 권세와 능력을 경험하라. 나라와 교회와 가정과 자녀들의 모든 문제를 통치하시고 고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