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스 큰나무교회 김귀보목사
(Photo : ) 김귀보 목사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사건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곧 그리스도로 공적으로 임명되시는 취임식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님은 하늘을 찢고 내려와 예수님 위에 임하셨고, 하나님 아버지는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고 하늘에서 큰 소리로 인정해주셨다. 이 장면은 예수님의 정체성과 사명이 공식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공직자가 취임식을 마친 뒤 처음 향하는 장소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첫 행보에는 앞으로 무엇을 위해 권한을 사용할 것인지, 어떤 방식으로 그 직무를 수행할 것인지가 응축되어 드러난다.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이 세례 직후 처음 향하신 장소 역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광야에서 시작된 결정적 싸움>

예수님이 처음 향하신 곳은 광야였다. 마가복음은 이를 간결하지만 강력하게 기록한다. “12.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13.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막1:12-13)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십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이 기간 동안 예수님이 금식하며 기도하셨음을 덧붙인다. 본문에는 이것을 시험이라고 표현하지만, 실제로는 사탄과의 정면 대결이었다.

예수님은 창세기 3장 15절에 약속된 원복음의 성취자로서, 뱀의 머리를 짓밟고 인류에게 참된 자유를 되찾아 주러 오신 승리자이시다.(창3:15) 그런 의미에서 광야는 단순한 고난의 장소가 아니라 상징적으로 사탄의 본거지를 의미한다. 대속죄 일에 속죄 염소(아사셀)를 광야로 보내는 의식 역시 이 상징과 맞닿아 있다. 속죄 염소의 이름인 <아사셀>은 고대의 악령을 뜻하는 이름이다. 이것은 악령에서 제물을 바치는 의식이 아니다. 속죄 염소에 안수하여 백성들이 죄를 전가하고 광야로 내보내는 행위는, 죄를 그 기원인 사탄에게 돌려보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죄를 사탄에게 돌려보내서 더 이상 죄의 저주 아래 묶여 있지 않게 하는 상징적인 행위다.

이제 예수님은 상징이 아니라 실체로 광야로 들어가셨다. 사탄의 영역으로 들어가 그 권세의 근원을 무너뜨리셨다. 죄와 죽음의 사슬을 직접 끊으신 것이다.

예수님은 훗날 강한자를 결박하여야 그 집을 약탈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막3:27)

이 말씀은 광야사건을 해석하는 중요한 열쇠다.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기 전 사탄의 본거지인 광야로 들어가서 강한 자인 사탄을 결박하셨다. 사탄이 세상의 임금인 것처럼, 모든 권세를 쥔 것처럼 사람들을 속이며 군림하던 거짓 통치를 무너뜨리셨다. 누가 진짜 왕인지, 누가 참된 주권자인지를 분명히 드러내신 것이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이미 사탄을 꺾으셨다는 사실은 곧바로 드러난다. 예수님이 가버나움 회당에 들어가셨을 때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알아 보고 외친다. “23.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막1:23-24)

그는 예수님을 알아 보고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이는 광야에서 이미 귀신의 우두머리인 사탄이 패배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이 명령하시자 귀신은 대항하는 어떤 주술 행위도 없이 즉시 복종하며 떠나간다. 예수님의 승리는 단호하고도 완전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막1:27)

마가는 광야에서의 싸움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세 가지 표현으로 압축한다. “12.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13.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막1:12-13)

첫째, 성령이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내셨다고 기록한다. 마가는 ‘강제로 밖으로 내보내다’, ‘축출하다’는 뜻을 가진 내보내다(ἐκβάλλω Ekballō)라는 강력한 단어를 사용했다. 이것은 가기 싫어하는 예수님을 강제로 데리고 가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예수님이 가셔야할 길이 얼마나 험난하고 중대한 사명인지를 강조하는 표현이다. 성령은 예수님을 그 싸움 속으로 보내셨고, 동시에 그 길을 함께 하셨다.

둘째, 예수님은 들짐승들과 함께 계셨다. 예수님이 머무셨던 곳은 편안하고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호텔처럼 편안한 호캉스가 아니라 험준한 곳에 잠자리를 펴야 하는 야영을 하신 것이다. 동시에 마가가 굳이 들짐승을 언급한 것은, 첫 아담이 타락으로 창조 세계의 조화를 깨뜨린 것과 대조되어,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님 안에서 창조의 회복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장면으로도 읽을 수 있다.

셋째, 천사들이 수종들었다. 이는 영적 전쟁이 단지 인간과 사탄 사이의 싸움이 아니라 하늘의 영역을 포함한 전면적 전쟁임을 보여준다. 영적 전쟁은 하늘의 천군천사도 함께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모습이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26:53)

광야에서 싸움의 치열함은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거나, 사탄의 힘이 지나치게 강해 간신히 이기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예수님의 한 마디면 사탄은 그 자리에 즉시 꼬꾸라진다. 이 장면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앞으로 맞닥뜨리게 될 영적 전쟁이 어떤 성격을 지니는지를 미리 보여주는 계시적 사건이다. 영적 싸움은 성령과 함께 해야하며, 결코 편안하지 않고, 그러나 반드시 승리로 끝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천군천사가 함께 하는 싸움이기 때문이다.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

광야에서 사탄의 권세를 꺾으신 예수님은 이제 갈릴리로 돌아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신다. “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1:14-15)
여기서 말하는 때는 구약성경이 오랫동안 예언해 온 구원의 시간이 성취되었음을 의미한다. 그 기준은 단순히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오심이다. 세례를 통해 하늘이 열렸고, 성령이 임했으며, 광야에서 사탄의 권세가 무너졌다.

그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인가? 아직 임하지 않은 것인가?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셔야 비로소 임하는 것인가? 예수님은 십자가를 져야만 사탄을 이길 수 있는가? 그렇다면 십자가 이전에는 사탄을 이기지 못한 상태인가?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순간,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라면, 왜 예수님은 나라가 임했다고 선언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셨는가?

예수님은 십자가 이전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12:28)
그렇다면 십자가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지 않고도 사탄의 머리를 완전히 꺾으실 수 있는 분이시다. 사탄의 패배는 십자가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 아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사탄에게 빼앗겼던 통치권을 되찾으신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단 한 순간도 사탄에게 통치권을 넘겨주신 적이 없다.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절대적인 주권자이시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목적은 분명하다. 십자가는 전적으로 우리를 위한 사건이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고, 사탄에게 매여 있던 노예의 사슬을 끊어주셨다. 또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담을 허물어 주시고, 단절되었던 관계를 회복시켜주셨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통치를 회복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라, 죄로 인해 무너진 인간을 회복하기 위한 구원의 자리였다.

예수님은 이 승리의 선포를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에서 하셨다. 인간의 시선으로 보면, 이왕 승리를 선언하고 복음을 공표하려면 이스라엘의 중심인 예루살렘에서 하는 것이 더 상징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은 예루살렘 인근에서 세례를 받으셨고, 예루살렘 가까운 광야에서 시험도 받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승리의 선포를 위해 갈릴리로 돌아오셨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성경의 예언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마태복음은 이 장면을 이사야의 예언의 성취로 해석한다. “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마4:14-16)

<가장 낮은 곳에서 퍼져가는 복음>

왜 하필 갈릴리였는가? 갈릴리는 이스라엘 땅 안에서도 가장 소외되고 천대받던 지역이었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메시아를 만났다고 말했을 때,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1:45-46)고 반문했다. 이 한마디는 갈릴리를 향한 당시 유대 사회의 노골적인 멸시가 담겨 있다. 갈릴리 사람들은 혈통상 유대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종종 이방인처럼 취급을 받았다. 그래서 성경은 이 지역을 이방의 갈릴리라고 부른다.

역사적으로도 갈릴리는 버림받은 땅이었다. 솔로몬은 예루살렘 성전 건축을 마친 후, 건축에 필요한 자재와 지원을 제공한 두로 왕 히람에게 감사의 표시로 갈릴리 지역의 스무 개 성읍을 내어주었다. 그러나 히람은 그 땅을 보고 실망하며 쓸모없는 땅이라고 평가했고, 불쾌감을 드러내면서 그 땅을 “가불”이라고 불렀다.(왕상9:10-13) 갈릴리는 자기 민족의 왕에게도, 이방의 왕에게도 귀하게 여김을 받지 못해 버림받은 땅이었다.

그렇게 세상의 변두리로 밀려났던 이방의 갈릴리는 예수님의 복음이 선포되는 순간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흑암의 땅에 빛이 비쳤고, 사망의 땅이 생명의 땅으로 바뀌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지역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출발점이 되었다. 더 이상 무시당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땅으로 변화된 것이다.

복음은 언제나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된다. 가장 아픈 자리에서 시작되고, 가장 천대받는 자리에서 시작된다. 이는 복음이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복음은 왜 항상 낮은 곳에서부터 선포되는가?

좋은 것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가는 것은 쉽다. 그러나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것은 너무 어렵다. 돈을 부자들에게 주면 그것이 가난한 사람들에게까지 내려가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반대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돈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다시 부자들의 손으로 흘러들어 간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나누어진 자원들이 결국은 가진 자들에게 집중되는 현상은 반복해서 나타난다.

복음도 마찬가지다. 복음이 높은 곳에서부터 선포되면, 결국 가진 자들만의 전유물이 되어 버린다. 복음이 종교 지도자들에게 먼저 선포되면, 그 복음은 종교 지도자들만을 위한 복음으로 굳어질 위험이 있다. 당시 가장 경건하다고 여겨지던 바리새인들의 의로움은 죄인과 세리와 창녀들에게까지 흘러갈 수 없는 의로움이었다. 그들에게 죄인과 세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없는 존재였고, 더 나아가 은혜를 입어서는 안되는 존재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다른 말씀을 하셨다. “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2:16-17)

복음은 죄인들에게, 병든 자들에게, 없는 자들에게 먼저 선포될 때 비로소 모든 사람에게까지 전파된다. 가장 낮은 곳에 선포된 복음은 결국 가장 높은 곳에 있던 제사장들에게까지 흘러갔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행6:7)

이렇기 때문에 교회는 높은 곳에 마음을 두기보다 낮은 곳에 마음을 두어야 한다. 높은 자리는 굳이 마음을 두지 않으려고 해도 자연스럽게 시선이 향하게 되어 있다. “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16.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롬12:15-16)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도 쉽지 않지만,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오는 것은 더 어렵다. 그런데 마음까지 높아져 버리면, 낮은 곳으로 향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교회가 커지고 유명해질수록 작은 교회, 연약한 교회에 마음을 두어야 한다. 더 크고 유명해지는 것보다, 작고 연약한 교회들과 함께 가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 복음의 방향이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이러한 복음에 사람들은 놀랐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막1:22)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가르침은 약한 자들을 억압했고, 절망의 자리로 더 깊이 밀어 넣는 가르침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 새로운 가르침이었다. 죄인과 세리와 창녀들에게도 소망과 희망을 열어주는 가르침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신 후, 그 사역에 함께할 사람을 부르셨다. 그들이 바로 갈릴리에 살던 어부들이었다. 이 당시 어부들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자영업자가 아니었다. 고기잡이는 국가가 관리하는 산업이었고, 조업권은 지배자들의 손에 있었다. 그 권한을 하청받아 관리하던 실세들이 있었고, 이 권한은 브로커들을 통해 어부들에게 판매되었다. 그 브로커들이 대개 세리들이었다. 어부들은 고기를 잡아도 그 이익의 대부분을 브로커와 지배자들에게 상납해야 했고, 가난의 구조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이연길, 마가복음, p.55)

예수님은 바로 이런 갈릴리의 어부들을 하나님 나라의 동역자로 부르셨다. 먹고사는 문제에 묶여 평생 고기만 잡으며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사람을 낚는 하나님의 어부로 살라는 도전이었다. 이 부르심 앞에서 어부들은 배와 그물과 아버지를 뒤로하고 예수님을 따랐다. 이 모습은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으로 나아갔던 아브라함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가장 가난하고, 가장 약하고, 가장 보잘것없어 보이는 어부들과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미련한 것들을 택하여서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약한 것들을 택하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천하고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여 있는 것들을 폐하시는 분이시다.(고전1:27-28) 실제로 하나님은 갈릴리의 어부들을 통해 예루살렘을 뒤흔들고, 소아시와와 그리스를 거쳐 로마까지 복음으로 흔들어 놓으셨다. 사람들은 이들을 가리켜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라고 불렀다.(행17:6-7) 복음은 그렇게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

지금도 하나님은 복음과 함께할 사람을 부르신다. 복음의 능력을 경험할 사람을 부르시고, 그 능력을 나눌 사람을 부르신다. 이 부르심 앞에 믿음으로 응답하여 복음의 능력으로 살아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