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스 큰나무교회 김귀보목사
(Photo : ) 김귀보 목사

마가는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하며 가장 중요한 선언으로 시작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막1:1) 마가의 첫문장은 분명하다. 예수님이 복음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복음’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 <유앙겔리온>이다. 이 단어는 당시 사람들에게 아주 익숙했다. 신약교회가 활동하던 시기는 정치적으로 로마가 지배했고, 문화와 언어는 헬라어가 세계를 장악하고 있었다. 신약성경이 헬라어로 기록될 만큼 헬라어는 제국의 언어로 보편화되어 있었다.

<유앙겔리온>은 원래 종교적인 단어가 아니었다. 뜻은 기쁜 소식, 복된 소식이다. 이 단어는 주로 황제와 연결되어 사용되었다. 황제의 군대가 야만족의 침입을 물리쳤거나 반란군을 제압했다는 소식은 로마인들에게 기쁜 소식이었다. 전쟁에 패해 포로가 된 사람들에게는 황제의 군대가 와서 해방시켜 준다는 소식이 기쁜 소식이었다.

그런데 마가는 그 <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를 예수님에게 적용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그리스도의 직분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것이 복음이라는 선언이다. 그리스도가 원수들을 물리치고, 포로된 백성을 해방시키기 위해 오신다. 이것은 로마가 통치하던 시대에 파격적이고 도발적인 선언이었다. 동시에 구약이 약속해 온 여호와의 통치가 마침내 실현되었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황제가 오는 것이 기쁜 소식이 아니라 예수님이 오신 것이 기쁜소식이다. 이제 로마의 황제가 아니라 예수님이 왕으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선언이다.

<복음은 포로 된 자들에게 임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그리스도의 직분을 가지고 오신 것은 누구에게 기쁜 소식인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그 대상을 분명히 밝힌다. “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마4:14,16)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4:18-19)

예수님의 오심은 흑암에 앉은 백성,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기쁜 소식이다.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를 그 자리에서 해방시키는 소식이다.

마가복음에서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수도 없이 만나게 된다. 문둥병과 중풍병으로 인생에 사망 선고를 받은 사람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해 인생이 어두워진 사람들, 귀신의 노예가 되어 무덤가에 내던져진 사람들, 손가락질 속에 살아가는 세리와 창녀들, 구조적인 가난으로 배고픔에 몰린 사람들, 끝까지 깨닫지 못하는 영적인 소경 같은 제자들. 이들이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얻고 고침을 받아 새 인생을 살아간다.

마가는 왜 복음서의 첫 머리에 예수님이 복음이라고 선포하는가? 마가복음을 읽을 때 예수님을 그리스도라는 관점으로 보라는 뜻이다. 기적만 보지 말고 복음의 관점에서 보라는 말이다. 이 복음서를 읽는 사람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만나게 하려는 것이다.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의 마지막에서 그 목적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끝까지 지켜본 로마 백부장의 고백이다. “37.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39.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막15:37-39) 이 백부장은 로마 군인이면서 예수님의 사형집행관이었다. 그는 십자가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지켜본 뒤 결론을 내린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마가는 로마 백부장의 입을 빌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한다.

<약속은 성취된다>

예수님은 이미 성경에 오시기로 예언된 분이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3:15) 원시 복음 선포 이후 성경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그리스도(메시아)로 이땅에 오실 것을 예언했 왔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직분을 가지고 오셔서 뱀의 머리를 짓밟고 포로 된 자들에게 자유를 선언하신다. 죄로부터 자유, 사탄의 권세로부터 자유, 하나님과 막힌 관계에서 자유를 선언하신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 일이 예수님의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롬16:20)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사탄의 머리를 밟으셨기에, 우리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탄의 머리를 발 아래 밟고 승리하는 삶을 살라고 말한다.

마가는 예수님이 성경에 예언된 바로 그 그리스도이심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세례요한을 등장시킨다. 2절과 3절을 보자. “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막1:2-3) 세례요한은 예수님 보다 먼저 와서 길을 예비했다. 그러나 요한이 예수님을 인정해야 예수님이 메시아가 되시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인정이 필요 없는 분이시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위해서 필요했다. 하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하시기 위해 요한을 도구로 사용하셨다.

마가는 세례요한을 소개하며 마치 불필요해 보이는 묘사를 덧붙인다.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막1:6) 이 모습은 엘리야를 떠올리게 한다.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되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더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로다.”(왕하1:8) 마가는 요한의 모습 속에서 엘리야를 보라고 일부러 강조한다.

왜 엘리야 인가? 세례요한이 성경에 예언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임을 증명하기 위해서다. 말라기에는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엘리야가 다시 와서 길을 준비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말4:5-6)

예수님도 세례요한이 엘리야의 사명을 가진 자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10.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1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13. 그제서야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마17:10-13)

그렇다면 세례요한이 길을 예비 하기 위해 한 일은 무엇인가?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한 일이 무엇인가? “4.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막1:4-5) 세례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베풀면서 예수님이 오실 길을 준비했다. 요한이 세례를 베풀 때에 사람들은 구름 떼처럼 몰려 나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다. 이는 백성들이 세례요한을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 인정은 일반 백성들만의 반응이 아니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조차도 요한의 권위를 공개적으로 부정하지 못했다.(눅20:1-8)

<뒤바뀐 자리>

그런데 본문은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으로 이어진다.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막1:9)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이는 세례를 주는 자와 받는 자의 자리가 뒤바뀐 장면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곳이 여리고 근처 요단강이었다는 점이다. 그곳은 여호수아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 건넜던 바로 그 요단강과 가까운 지점이다. 갈릴리에 계시던 예수님은 일부러 그 먼 길을 걸어 요단강까지 내려오셨다. 이 여정은 짧지 않았고, 족히 일주일이 넘는 길이었다. 예수님은 왜 그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셨을까?

더 이상한 점은 요한의 세례가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였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기에 회개의 세례를 받으실 이유가 없으셨다. 그래서 세례요한도 말렸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마디 말로 요한을 설득하셨다. 그 말씀 앞에서 세례요한은 더 이상 말리지 않고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였다. “14.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1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마3:14-15)

죄 없으신 분이 굳이 죄사함의 세례를 받으시며 이루려 하신 의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5:21) 죄가 없으신 예수님은 스스로 죄인의 자리에 서신 것이다. 대속죄일의 어린 양이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듯, 예수님이 세상의 죄를 짊어지신 것이다.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은 양의 머리에 안수하여 백성의 죄를 전가하고, 그 양은 광야로 내보냈다. 그 양은 모든 백성들을 죄를 대신 지고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죽었다. 세례요한은 레위지파 출신이며 그의 아버지는 제사장 사가랴였다.(눅1:5)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세상의 죄를 짊어지시는 시작이었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님을 두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증언한다. “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5.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6.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35-36)

예수님의 세례는 즉흥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단지 겸손을 보이기 위한 제스처도 아니었다. 그것은 메시아로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한 첫걸음이며 공적인 행보의 시작이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의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 행동이었다. 예수님은 세례로 순종을 시작하셨고, 십자가에서 그 순종을 완성하셨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기뻐하셨다. “10.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11.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막1:10-11) 예수님이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나님은 하늘에서 선포하셨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

이 장면에서 두 가지를 보아야 한다.
첫째, 예수님이 그리스도 사역의 첫걸음을 내딛는 순간 삼위일체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은 비둘기 같이 임하셨고, 성부 하나님은 아들을 사랑으로 인정하셨다. 창조의 순간에도 함께 하셨던 삼위일체 하나님은 구원의 순간에도 함께 하신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계획하신 구원을 반드시 이루신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된다. 말씀을 믿고 붙들고 기도하며 기다리는 사람에게 삼위일체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신다.

<찢어진 하늘, 회복된 소통의 문>

둘째, 예수님이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갈라졌다. 갈라졌다는 말로 번역된 헬라어 <스키조>는 찢다, 쪼깨다, 찢어지다는 뜻을 지닌 단어다. 이는 단순히 하늘이 열렸다는 의미가 아니라, 굳게 닫혀 있던 하늘이 강제로 찢어졌다는 뉘앙스를 담고 있다.(NICNT) 다시 말해 하나님이 하늘을 찢고 내려오셨다는 뜻이다. 그 안에는 죄인과의 단절을 그대로 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소통하시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가 담겨 있다.

예수님이 세례로 그리스도의 사역이 시작되었고, 그 순간부터 막혀 있던 하늘과 땅의 소통이 열리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닫혔던 하늘을 찢고 죄인들에게 손을 내미신 것이다. 마가는 똑같은 단어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서 다시 한번 사용했다. “37.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막15:37-38)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찢어지고 성령이 내려오셨다. 십자가에서 휘장이 찢어지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 활짝 열렸다. 세례에서 시작된 소통의 문이 십자가에서 완전히 열린 것이다. 대속의 어린 양으로 죄를 짊어지시는 순간부터 열리기 시작한 담이, 십자가에서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마가는 복음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여준다. 복음은 누군가가 교묘하게 꾸며 낸 이야기가 아니다.(벧후1:6) 복음은 신화나 족보에 등장하는 허탄한 이야기도 아니다.(딤전1:4) 복음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창세전부터 계획하시고 준비하시고 이루신 놀라운 역사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 복음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한다.

오늘 우리를 묶고 있는 흑암의 권세는 무엇인가? 우리가 여전히 포로처럼 살아가는 영역은 어디인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흑암의 권세가 무너지고 생명의 빛이 역사한다. 그리스도 되신 예수님이 우리의 왕과 주인이 되셔서 복음의 능력이 모든 가정에 임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