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니 베어드의 1895년 ‘샛별전’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복음 전해
빨래터에서 대화하는 등 4컷
김준근의 삽화, 생명력 더해줘
글 모르는 부녀자들과도 소통
낯선 서양 종교, 풍속화로 녹여
애니 베어드(Annie L. Adams Baird, 1864-1916, 안애리) 선교사는 해외 선교의 꿈을 안고 캔자스 YMCA에서 일하던 중 윌리엄 베어드(William Martyn Baird, 1862-1931, 배위량)를 만났다. 두 사람은 1890년 캔자스 토피카 제일장로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이듬해인 1891년 1월 미국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로 한국 땅을 밟았다. 베어드 부부는 국내 순회 전도 여행 중 부산에서 태어난 첫딸 낸시 로즈를 뇌척수막염으로 잃는 아픔을 겪었다.
그러나 그들은 슬픔 속에서도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선교에 매진했으며, 그 과정에서 한글 소설 『장자노인론』(1895), 『고영규전』(1895), 그리고 『샛별전』(1896)이 탄생했다. 특히 『샛별전』은 이인직의 신소설 『혈의 누』(1906)보다 10년이나 앞서 출간된 작품으로, 한국 근대 서사 문학의 태동기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허순우, “19세기 말 애니 베어드의 문서선교에 대한 관심과 ‘샛별전’”, 『한국고전연구』 제52집, 한국고전연구학회, 2021, 217쪽).
『샛별전』은 외국인 선교사가 세운 학당에 다니던 소녀 ‘샛별’이 친척 아저씨 홍경대의 집에 얹혀 살면서 겪는 이야기를 담은 26면 분량의 소책자다. 샛별이 자신을 희생하는 실천적 믿음을 통해 홍경대 집안과 마을을 구원으로 이끄는 과정은 초기 기독교가 이 땅에 전파되던 내력을 짐작하게 한다.
홍경대의 아내 김 씨는 미신에 의지해 살아가는 전형적인 조선의 시골 아낙네다. 그녀는 질병과 불행이 모두 귀신의 조화라 믿으며 두려움 속에 하루하루를 보낸다. 어느 날 남편이 외국 학당에 다니던 조카 샛별을 데려오자, 김 씨는 샛별의 낯선 믿음이 가정의 평화를 해친다고 여겨 심하게 학대한다.
하지만 샛별의 신실한 태도는 결국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홍경대 부부가 염병(장티푸스)에 걸려 쓰러졌을 때 아무도 그들을 돌보지 않았지만, 샛별만큼은 지극정성으로 간호하여 부부를 살려낸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병이 옮아 세상을 뜨고 만다. 샛별의 숭고한 희생에 감화된 홍경대 부부는 지난날을 뉘우치고, 남은 생을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
애니 베어드는 딱딱한 교리 설명 대신 독자들이 쉽게 다가설 수 있는 ‘삶의 이야기’를 통해 기독교를 전하고자 했다. 여기에 기산 김준근의 삽화가 더해지며 이야기는 더욱 생생한 생명력을 얻게 되었다.
애니 베어드는 『고영규전』 6컷, 『부부의 모본』 4컷, 『샛별전』 4컷 등 확인된 것만 총 14컷의 삽화를 풍속화가 김준근에게 의뢰했다. 목판화로 제작된 이 삽화들은 구한말 조선의 복식과 풍경을 사실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이를 통해 정서적 유대를 바탕으로 복음을 전하려 했던 애니 베어드의 깊은 의중을 헤아려볼 수 있다.
이 중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단연 『샛별전』에 실린 판화다. 그 중에서도 샛별이 빨래터에서 동네 여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그림 우측에는 빨래를 마치고 머리에 짐을 인 채 귀가하는 여인들이 보이고, 좌측에는 빨래를 마친 샛별이 무언가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다. 샛별이 입을 열자 두 여인은 하던 일을 멈추고 눈과 귀를 샛별에게 집중한다.
소설에서 여인들이 “외국인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느냐”고 묻자, 샛별은 “예수께서는 모든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셨다”고 답한다. 이에 여인들이 “여편네라도 업신여기지 않고 사랑하셨느냐”고 되묻자, 샛별은 “사람 중에 여편네가 힘이 없고 약하므로 예수께서 더욱 불쌍히 여기셨다”고 말한다(애니 베어드, 장경남 자료해제, 『샛별전』, 한국기독교박물관, 2013, 13-32쪽).
당시 조선 여성들에게 고단한 노동의 현장이자 정보 교환의 장이었던 빨래터에서 전해진 샛별의 이야기는 단순한 교리의 전파가 아니었다. 그것은 유교적 가부장제 아래 신음하던 여성들에게 진정한 ‘위로와 자유의 메시지’로 와닿았을 것이다.

삽화의 구체적 설정 또한 흥미롭다. 김준근은 애니 베어드가 글로 묘사한 일상의 장면을 그림으로 완벽하게 구현해냈다. 시냇물과 주변 배경, 인물들의 표정까지 시골의 토착적 환경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친숙한 표현은 독자들에게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라는 일체감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애니 베어드가 서양인 화가가 아닌 김준근을 고집한 이유도 이와 연관이 깊다. 그녀는 조선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면 그들의 풍속과 정서를 활용해야 한다는 확고한 선교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글을 모르는 부녀자들과도 소통하기를 원했다.
이미 제임스 게일(James S. Gale, 1863-1937) 선교사와 협업한 『천로역정』을 통해 탁월한 번안 능력을 보여준 김준근은 책의 취지에 가장 부합하는 적임자였다. 김준근의 그림은 기독교를 외래 종교가 아닌 ‘우리 삶의 일부’로 인식하게 만드는 매개체가 되었다. 이는 초기 선교사들이 서구 문화를 일방적으로 이식하는 대신, 조선 문화의 토양 위에서 신앙이 성장케 하려는 ‘상호문화적(intercultural) 선교 전략’의 중요한 증거이기도 하다.
애니 베어드가 김준근을 직접 만나 삽화를 의뢰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선교사들의 활동 반경과 김준근의 주 활동지를 고려할 때, 제임스 게일을 통해 소개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김준근은 이미 외국인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진 화가였다. 오늘날 그의 풍속화가 유럽과 미국의 16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은 100여 년 전 이미 그가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음을 방증한다.
독일 영사관 하인리히 마이어가 수집한 그림들이 1894년 독일 함부르크 민속공예박물관에서 전시되기도 했고,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이끈 로버트 슈펠트 제독의 딸이 부산에서 구입한 그림들이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 박물관에 기증되기도 했다. (신선영, “19세기말 개항장의 화가, 기산 김준근의 풍속화”, in 『기산 풍속화에서 민족을 찾다』, 학술대회 자료집, 국립민속박물관, 2020, 104-114쪽) 국내에서는 베일에 싸여 있었지만, 외국인 사회에서 그는 이미 ‘핫한’ 예술가였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유명했더라도 애니 베어드에게 그를 연결해 줄 고리는 필요했을 것이다. 갓 부임한 선교사에게 경험 있는 선교사의 조력은 큰 힘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제임스 게일을 떠올리게 된다. 한국의 역사와 전통, 문학을 깊이 사랑했던 게일은 원산 사역 당시 김준근을 발굴하여 삽화를 맡긴 장본인이다. 애니 베어드의 남편 윌리엄 베어드와 제임스 게일은 북장로교 선교부 동료로서 선교 방안을 긴밀히 공유하던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김준근에 대해서도 충분히 의견을 나누었을 것이다. 『천로역정』의 성공을 목격한 애니 베어드에게 김준근은 의심할 여지 없는 섭외 1순위였을 것이다.
이 삽화들은 낯설기만 했던 서양의 종교를 조선의 풍속화 기법으로 녹여냄으로써 독자들이 기독교를 자신의 삶과 밀접한 이야기로 받아들이게 했다. 복음의 빛을 든 전도자가 이 땅을 찾아온 이래, 기독교 문화가 어떻게 우리 삶 속으로 스며들었는지를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서성록 명예교수(안동대 미술학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