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십 년 전 한 두 차례 만나본 적 있는 어떤 목사님과 SNS를 통해 한국 정치에 대해 대화하게 되었다. 나는 미국에서, 그분은 동남아에서 사역하고 있는데 12.3 계엄령에 대한 생각이 현저히 달라 안타까웠지만, 그래도 대화를 통해 서로의 입장과 생각과 논리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다.
우리는 왜 같은 하나님을 믿는데, 정치에 대한 생각이 다를까? 한국 교회에 탄핵 찬반 이슈가 뜨거운 감자로 부각되었고, 헌재의 판단을 기다리며 기도하자 한 대형 교회 목사가 양측의 비난을 받고 있다. 한쪽은 당장 대통령을 끌어내야 하는데 목사가 내란수괴를 지지하냐며 열렬히 항의했고, 또 반대 측은 대통령의 계엄은 계몽령인데 민주당의 입법 독주를 막기 위해 나서야지 기도만 해서 되겠느냐며 비난했다. 그 목사님은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까? 정치에 대해선 설교 시간에 아무 말도 하지 말았어야 했을까?
신앙인들 사이의 “차이”는 새로운 문제가 아니다. 오늘날 여러 교단이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견해와 분석과 의견의 차이 때문이다. 안수, 성별에 따른 직분과 역할, 세례, 교회의 당회나 리더십 구조, 예배의 순서나 요소, 집사와 장로와 권사의 직분 등 크고 작은 차이가 교단 사이에 존재하고, 따져보면 교단 내에도 존재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차이가 존재해도 복음의 핵심을 희석하지 않으면 타 교단을 “정통 교단이 아니다, 기독교인의 모임이 아니다”라고 정죄하고 비난해선 안 된다. 그런 사안은 전문가들(예: 이단 연구회 및 신학자들)에게 맡기는 것이 옳다. 그리고, 복음의 핵심을 타협하지 않는다면 차이를 존중해 줘야 할 것이다.
필자는 보수 장로 교인이다. 그런데 불교 집안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민 올 때까지 불교 신자인 줄 알고 살았다. 그래서 어렸을 때 교회에 다니는 친구를 멀리했고, 지금도 얼굴이 기억나는 한 친구가 여러차례 부활절 행사에 초청하던 게 싫어 아예 그 친구를 멀리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하나님의 초청이었는데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불교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저 부모님이 절에 다니셨고, 따라가 절 앞 시냇가에서 가재 잡는게 재미 있었고, 또 절밥이 꿀맛 같아 그게 불교라 생각했고, 불교도라 자칭했다. 즉, 문화적인, 부모님을 따른 불교인이었다.
그런데, 어머님의 병환으로 1978년 세계에서 가장 의학이 앞선 미국으로 이민 오게 되었다. 그 당시 한국인들은 서로 만나면 인사하고, 전화번호를 주고받았고, 처음 만난 사람도 집으로 초청해 같이 식사하던 때였다. 그리고, 다른 한국인들을 만나기 위해 교회에 갔다. 많은 이민자가 그렇게 교회에 다니다 교인이 되고 회심까지 한 것이다.
나는 기적적인 어머님의 치유, 그리고 중학생 시절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 당시 다니던 교회는 초교파 교회였는데 담임 목사님은 성결교단 목사님이셨고 명 설교가이셨다. 그래서 다들 그 분을 하나님 다음으로 알고 교회에 다녔다. 그런데, 청년이 되어 담임 목사님의 교리나 설교에 조금 의아스러운 부분들을 발견했다. 구원론에 대해, 칭의에 대해,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은 선조들의 구원에 대해, 종말론에 대해, 성령 역사에 대해 등 분석이 애매한 말씀을 하셨다. 그래서 나는 나름대로 교리에 대한 책과 주석을 읽어보고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나는 보수 장로교에서 말하는 교리가 성경 말씀에 가장 가깝고 더 성경적이라 생각해 지금까지 나 자신을 장로교에 속한 사람으로 생각한다. 그렇다고 장로교 회원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장로교 말고 다른 교회에서 예배드리지 않는다든지, 장로교 목사님들의 설교만 듣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장로교 교리에도 100% 동의하지 않는다.
개개인의 체험과 걸어온 길은 독특하다. 그렇다면 정말 놀라운 것은 다른 생각과 경험을 갖고있는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십자가 중심적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이게 기적다. 어떻게 교단과 교리를 접하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복음의 핵심이 모두의 공통 분모(common denominator)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고 했다. 즉, 모든 사람이 크고 작은 공동체를 자연스럽게 형성하는데, 공동의 이익과 자신의 이익 둘 다를 얻으려는 인간의 본질적 필요에 따른 판단과 결정이란 것이다. 그런데 “정치적 동물”들이 모이면 차이가 뚜렷한 의견이 나올 수밖에 없다. 물론, 외부의 적(敵)이 존재하면 똘똘 뭉치지만, 그렇다고 내부의 갈등이나 차이가 아예 없거나 사라진 것이 아니다. 상황이 바뀌면 그런 차이가 부각되어 분열을 일으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한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중대한 정치적 이슈는 나라를 분열시키고 공동체가 갈라지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기억하자. 정치 때문에 교회가 분열되면 누가 제일 좋아하겠나? 성경이 말하는 분열의 영의 원천은 무엇이고 누구인가?
그래서 나는 기도하며 좀 지켜보자는 그 대형 교회 목사의 말에 동의한다. 그분도 나름대로 많이 기도하고, 많이 고민한 뒤 한 말일 것이다. 너무 빨리, 신속히 반응할 때 더 큰 실수를 범할 수 있다. 특히 이렇게 중대한 사안은 신중히, 더 천천히 다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차이를 존중하되 차별은 하지 말아야 하며, 특히 신앙의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언행은 절제하는 성숙한 성도의 모습을 보여줘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지 말아야 한다. 진리를 추구하고 모든 진실이 밝혀지도록 기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