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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개신교가 이처럼 대단한 부흥을 경험하고, 수많은 성도들이 이를 통해 예배의 감격을 사모할 수 있게 된 것은, 사실상 미대륙을 통해 전달받은 청교도 신앙의 유산과 전통 덕분이다. 구한말 조선에 복음을 전달한 선교사들과 장로교회의 효시라 할 수 있는 평양 신학교가 모두 청교도 신앙과 전통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내의 수많은 장로교회들이 청교도와 신앙고백서에 대해서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청교도에 대해 부분별한 곡해와 비판을 하고 있는데 이는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다.  

저자 김재성 교수(국제신학대학원 대학교, 조직신학)는 청교도 운동에 전반적으로 개괄하며 청교도 운동의 시작과 절정기 그리고 쇠퇴기를 명료하면서도 상세히 이 책에서 다루고 있다. 

저자는 책 속에서 "21세기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가 도대체 왜 다른 나라 잉글랜드에서 그것도 16세기에 활동했던 청교도들에게 관심을 가져야하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청교도들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가장 순수한 교회를 세웠으며 독실하게 경건 생활에 진력했고, 기독교인으로서 삶 가운데서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던 자들이기 때문이다. 청교도들이 남긴 설교와 신학, 문학과 기도문에는 전체 기독교 역사 속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신앙과 경건으로 가득하다"고 했다. 

이어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개인적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고 자신들의 공로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의해서 구원을 얻도록 택함을 받았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택의 결과를 따라 보이는 경건의 삶을 반드시 영위해야만 한다고 확신했고, 신약성경의 교훈에 근거한 교회를 구성하는 회원이 되어야 할 것과, 기독교 사회의 귀감이 되는 국가와 사회 공동체 건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자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잉글랜드에서 본격적으로 청교도 운동이 전개되기까지, 그야말로 수많은 순교의 피가 바쳐졌다. 헨리 8세(1509~1547)가 잉글랜드를 통치하던 시기에, 유럽에서는 루터의 종교개혁이 비텐베르크로부터 각 지역으로 확산됐다. 이런 변화와 혼란을 기회로 삼아, 헨리 8세는 자시의 후계로 세울 아들을 얻고자 이혼을 단행하면서, 이를 반대하던 로마 가톨릭과 결별했다. 병약했던 아들 에드워드 6세의 통치 시대에 루터와 칼빈의 신학이 대주교 토마스 크랜머를 통해서 영국교회에 소개되었다. 크랜머는 <설교집>, <공동기도서>, <신앙의 42개 조항> 등을 출판하여,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무엇을 개혁하는 가에 대한 기초적인 지침을 제공했다"고 했다. 

끝으로 저자는 "청교도들의 비전은 1643년 7월에 소집된 120여 명이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작성한 '신앙고백서'에 집약되었다. 잉글랜드 교회는 로마 가톨릭, 성공회 국가교회 체제, 알마니안주의, 반율법주의, 소시니안주의 등의 혼란스러운 신학사상들을 통일할 방안을 정비해야만 했는데 그것이 바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다. 새롭게 정비된 국가교회의 이 신앙적 기초는 주로 칼빈주의 신학에 기초한 것이고, 교회의 제도 면에서는 다수의 장로교회와 소수의 회중교회가 허용되었다. 1647년에 발표된 이 신앙고백서는 즉각 스코틀랜드 총회에서도 채택했고, 다음 해 뉴잉글랜드 회중교회에서도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1658년, 런던 '사보이 선언'에서도 반영되면서 회중제도 지지자들에게도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청교도들의 신학사상의 총결산이자 교리적인 기준이 된 것이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