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님들께 아주 가끔 드리는 질문이 있습니다. “질투가 많은 편이십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저는 질투를 거의 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자존감이 높은 편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무언가 잘하는 모습을 보면, 그냥 존경스럽고 닮고 싶은 마음이 클 뿐입니다. 또, 다른 사람이 성공하는 것에는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아, 좋겠다”하고 맙니다. 그래서, 저는 청년 시절에 질투라는 주제에 대해서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크게 상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많은 분들이 시기 질투가 많으시고, 대부분의 인간관계의 문제가 시기 질투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그렇게 잘해주었고 사이가 좋았던 사람이 갑자기 등을 돌리거나 혹은 서서히 나와 멀어질 때, “그 사람이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니, 결국 시기와 질투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영문도 모른 채 “왜 안 그러던 사람이 내게 저런 말을 할까? 왜 나에 대한 태도가 갑자기 바뀌었을까? 왜 뒤에서 험담을 할까?” 고민하며, 실망했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인간관계의 어두운 현실을 절실히 깨닫게 된 것은 목회를 하면서부터입니다. 의뢰로 성도님들 사이에 있는 갈등의 원인이 시기와 질투인 것을 보았습니다. 언니 동생 할 정도로 사이가 좋았는데, 새로운 성도가 나타나 나와 친한 사람의 관심이 분산되면, 섭섭함을 느낍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을 미워하게 됩니다. 제삼자에게 험담과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억울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그렇게 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서 언급하는 실질적인 죄들, 뒤에서 험담하는 죄를 짓게 되고, 새로운 신자를 배척하는 죄, 믿음의 형제 자매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죄, 주님의 몸 된 교회의 하나됨을 깨트리는 죄, 남을 미워하는 죄, 관계를 이간하는 죄 등등, 다중 복합적인 죄를 범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어떤 경우는 도무지 화합과 협조를 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싫다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가 어떤 면에서 나보다 잘난 것, 지혜로운 것, 평이 좋은 것이 못마땅해서 협조하기 싫은 것입니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시기와 질투의 문제는 성직자들에게도 아주 흔히 나타나는 문제입니다. 제가 부목사로 사역을 할 때, 같은 교회를 섬기는 동역자들 중에 담임 목회자로 청빙 받는 분들이 간혹 계셨습니다. 심지어, 어떤 분은 당시 섬기던 교회의 담임 목사님의 후계자라는 소문이 돈 적도 있었습니다. 저는 당시에 “와 좋겠다 하나님의 은혜다 역시 열심히 섬기시더니 하나님께서 높이시는구나”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같이 섬기던 분이 잘 되는 것을 보니, 부러우면서도,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습니다. 담임 목사님의 후계자가 된다는 소문이 돌았던 분은 영어 한국어 이중 언어가 완벽한 분이셔서, 저는 그분이 후계자가 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더 존중해드리고 세워드리면 좋겠다 싶어, 당시 섬기던 청년부 수련회 게스트 스피커로 특별히 모시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동역자들의 반응은 저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분이 은사 사역에 편향된 이단적인 목회철학을 가지고 있다는 둥, 예전에 섬겼던 교회가 이단적인 교회였다는 둥, 험담하기 바빴습니다. 누가 봐도 말 수가 적고, 점잖기로 소문난 분도 열변을 토하며, 험담하는 것을 보고, 저는 시기 질투는 사람의 성향까지 바꿀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담임 목회자가 되었을 무렵입니다. 부목사 시절 함께 사역하던 다른 부목사님들과 너무나 친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다른 부르심이 있으실 때까지 같이 함께 하시자”고 제가 먼저 제안을 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함께 사역했던 동역자들은 매사에 수동적이고 비협조적이었습니다. 시기 질투로 가득했고, “담임 목회자로 얼마나 버틸까?”하는 눈치였습니다. 뒤에서 “구봉주 목사님이”라고 하지 않고, “구목사가”라며, 저를 하대하였습니다. 저는 부목사님들을 단 한 번도 하대한 적이 없는데 말입니다. 심지어는 저를 깎아내리고 오해와 거짓을 마치 사실인 마냥 소문을 퍼드리며 비난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왜 저러실까? 내가 그렇게 잘해드렸는데”라며 섭섭했지만, 나중에 세상 일에 지혜로운 지인이 제게 “뻔한 거 아니에요? 질투에요 질투. 질투가 나서, 목사님이 잘 되면, 뒤에서 폄하하고, 꼬투리라도 잡히면 공격하는 거에요”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제가 당한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성경적으로 시기 질투는 비교의식에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비교의식은 아담과 하와 때부터 생겨난 인간 본연의 죄성에서 기원한 것입니다. 옛 뱀 마귀 사단이 “이 실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라고 미혹했을 때, 그들 마음 가운데는 “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하나님과 비교할 때 매우 열등한 존재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래서, 창조주께서 우리에게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한 것이구나”하며,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고 하나님처럼 되어야겠다”하며, 하나님을 배신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부터, 사람의 마음 속에는 열등감 비교의식에서 나오는 시기와 질투가 생겨난 것이고, 이 같은 부정적인 감정은 다른 이에게 상처를 주거나 공격하는 쓴 뿌리가 된 것입니다.
시기 질투는 많은 문제를 양산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미움과 분노라는 죄의 결과를 낳습니다. 사울왕이 다윗을 시기 질투하여 결국 타락하게 된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시기와 질투는 시기 질투의 대상이나 불특정 다수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낳습니다. 상대를 깎아내리거나 험담하거나 도무지 칭찬하지 않는 부정적인 태도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왕은 다윗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밀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시기와 질투는 당사자는 좀처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자신 안에 질투가 나서, 상대에 대한 미움과 못마땅함이 생겨 부정적인 태도가 생겨나는 알고리즘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정하는 순간 부끄러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싫어하건 미워하거나 험담하는 대상이 객관적으로 볼 때, 자신보다 부족하거나 열등한 사람인지, 잘난 사람, 나이가 적은데도 불구하고 나보다 더 인정받는 사람인지를 한 번 따져보게 되어지면, 우리는 우리 안에 시기 질투가 있었음을 부인할 길이 없게 됩니다. “잘난 것도 없는 게 잘난 척하네?”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우리는 이미 시기 질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시기 질투 중에 시기를 믿는 우리가 경계해야 할 은밀하고도 무서운 죄로 여깁니다. 시기는 질투로 시작된 감정에서 비롯된 미움과 증오이기 때문입니다. 시기와 질투는 반드시 다스려야 할 인간 내면의 부정적 경향입니다. 가인도 아벨을 질투하고 시기하여, 살인을 범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너에게 죄를 짓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니 그 마음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믿는 자는 시기 질투하는 마음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가서, 내려 놓고, 우리 마음을 만지시는 성령 하나님의 손길로 치유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시기와 질투로 비롯된 부정적인 말과 태도는 경계하고 끊어내야 합니다. 그러지 않기로 다짐해야 합니다. 참고로 여성이 남성보다 더 시기와 질투를 느끼는 듯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여성이 남성보다 감성적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쨌든 시기와 질투를 잘 다스리는 지혜로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