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종근 목사의 저서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는 1896년 남장로교 선교사로 조선에 파송되어 전주와 군산 그리고 목포를 비롯한 호남지역에서 평생을 보내며 이 지역의 유무형의 선교 인프라를 깔아 호남선교의 토대를 마련한 하위렴 선교사의 선교 일대기를 수회에 나누어 본지에 싣기로 한다.

부임 당시 선교부의 상황

1899년 5월 군산의 개항으로 조계지가 그어지자, 전킨은 당국으로부터 기존의 스테이션을 조계지 밖으로 이전하라는 통보를 받은 터였다. 그는 수덕산 선교지부에서 약 5Km 정도 떨어진 해안가 구릉에 3만여 평의 대지를 매입해 스테이션 이전공사를 시작했었으나 그가 전주로 떠나게 되면서 진행은 지지부진한 채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었다.

개항 전(1898) 군산 그림지도(각주 1)
(Photo : ) 개항 전(1898) 군산 그림지도(각주 1)

하위렴이 1904년 군산으로 부임해 왔을 당시 전킨 선교사에 의해 착공되었던 학교 건물은 골조만 세워진 채 흉측한 모습 그대로였다. 벽체를 쌓기 위한 벽돌은 제대로 확보가 되지 않은 상태였고, 그나마 일부 구해다 놓은 벽돌은 규격에 맞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내장 마감을 위한 타일마저도 크기가 너무 작고 불량품이 많아 제대로 사용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게다가 병원을 짓기 위해 구입해 부지에 쌓아둔 목재는 방치된 채 눈비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각주 2)

공사가 중단된 상태라 어설픈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아직 제대로 윤곽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지역교회들의 사정도 뒤숭숭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인도자가 없는 교회가 대여섯 곳이나 되었고, 또 다른 몇 군데에서는 인도자의 자질을 문제 삼고 있는 데다 선교사를 도와 그들을 이끌어갈 조사助事를 발굴해 세운다는 것도 쉽지 않아 보였다. 그런 데다가 전킨이 전주로 옮겨가면서 자신들의 소속을 군산에서 전주로 바꿔 놓은 것에 불만을 터뜨리는 교회도 있었다.(각주 3)

개인적으로 볼 때 스테이션에 고용된 사람 가운데 자리에 걸맞지 않아 보이는 이들이 눈에 띄어 불편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그들의 속내를 전혀 파악할 수가 없어 한동안 곤혹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문제들은 조금씩 해결되어 갔다.

한편 하위렴 선교사가 군산에 부임하고 나서 일 년쯤 되어 러일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해 3월 만주 봉천에서는 러시아의 육군을, 5월 쓰시마 해전에서는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무너뜨린 일본이 결국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했다는 거였다.

그해 일본은 3,000명이나 되는 병력을 군산에 상륙시키더니 조계지 내에 여전히 남아있던 조선인들을 전부 조계지 바깥으로 내몰고 심지어 분묘까지도 이장케 했다. 그러더니 조계지를 중심으로 신도시를 빠르게 건설해 가기 시작했다. 수덕산 넘어 북쪽 해안가에서 정오가 되면 바다를 향해 대포를 쏘기(각주 4)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시계가 없는 주민들에게 시간을 알려준다는 명목이었으나 엄청난 대포 소리를 내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의 힘을 인식시키려는 심리적 효과도 노리는 듯했다.

새롭게 건설되는 조계지를 발판으로 일제는 바쁘게 움직였다. 일본인들이 물밀 듯이 들어와 시내 곳곳에 인프라를 장악하더니 군산항 부두 공사를 시작으로 1908년 전주-군산 간 신작로를 개통하면서 호남에서 수탈한 미곡을 일본으로 반출하는 전진 기지로 만들어 갔다.

그런 대규모 토목공사가 비록 수탈정책의 일환이었다 할지라도 일단 선교사들은 내심 반겼다. 왜냐하면, 군산을 통해 들어오는 선교물자(각주 5)를 전주로 이동하는 일이 훨씬 수월해졌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 익산과 김제로 가는 순회사역 역시 수로보다는 육로를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테이션 조성공사를 마무리하다

하위렴은 무엇보다도 스테이션 조성공사를 마무리하는 것이 급선무라 여기고, 드루가 살던 집을 개조해 다니엘 선교사의 숙소로 꾸미고, 다니엘과 함께 새로운 진료소를 설계해 1906년 3월 완공을 보았다. 그 이듬해, 그동안 미루어 오던 자신과 간호 선교사들을 위한 숙소 건축을 계획하면서 몇 가지 장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실행으로 옮겼다. 시공에 필요한 목재는 충청도에서 벌목해 금강을 통해 운반해 오기로 하고 국내에서 구할 수 없는 벽돌과 타일, 창문, 문짝, 마루 등의 내장재는 미국에다 직접 주문을 내기도 했다.

건축공사 외에도 선교사의 숙소 근처에 오래된 우물을 대신해 새 우물을 다시 파기도 했는데 다행히 이전 우물보다 훨씬 수량水量도 많고 수질도 좋았다.(각주 6)

스테이션 내 진료소 건물이 완공되고 미국인 의사가 진료한다는 소문이 나자 원근 각처에서 환자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얼마 가지 않아 기존의 시설로는 도저히 환자들을 다 수용할 수 없는 정도가 되자, 하위렴은 다시 진료소 건물을 전통 한옥 양식으로 확장 증축을 구상하고 18명의 환자가 동시에 입원할 수 있는 규모로 온돌방과 부엌, 세탁실 등의 개별용도의 공간까지 따로 확보해 완공시켰다. 전체적으로 볼 때 진료소의 규모가 그다지 크지는 않았으나 만족할 만했다.(각주 7)

그해(1907) 마침 부위렴 선교사가 안식년을 맞아 자리를 비운 사이(각주 8), 선교부지의 명의이전을 둘러싸고 문제가 생기자 매도인이 군산지부를 상대로 제소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재판을 피할 길이 없어 보였으나, 하위렴이 매도인과 직접 협상에 나서 3일 만에 극적으로 타협이 되면서 소송이 기각되는 일도 있었다.(각주 9) 하위렴은 교회와 병원 그리고 학교 건축을 포함 제반 법적 절차까지 꼼꼼하게 마무리함으로써 군산 스테이션의 조성공사를 조기에 완료했다.

팀 사역을 이끌다

하위렴이 스테이션 조성공사와 더불어 선교사들의 활동을 총괄하면서 사역의 전체적인 윤곽을 파악해나갔다. 그는 지부의 모든 사역을 활성화하기 위해 이미 부임해 있던 분야별 선교사들과 팀 사역을 강화해 나가기로 했다.

부위렴William F. Bull 선교사는 전도선을 타고 충남 일대를 순회하며 전도에 전념했다. 예배 처소마다 사람들이 몰리고 있었고, 새롭게 시작하는 교회에서는 인도자를 보내달라는 요청이 빗발쳤다. 1905년 이 지역에 4개 교회가 있었으나 그 이듬해 14개 교회로 급격히 늘었으며 그중에 6개 교회가 승인을 요청하고 있었다.(각주 10)

알비Alby E. Bull 선교사는 스테이션 구내에서 여성과 어린이 사역을 맡아 주일학교 1개 반과 주중에 4개 반을 번갈아 가르쳤다.

어아력Alexander M. Earle 선교사는 그동안 닦아온 조선어 실력으로 지역교회들을 매주 한 교회씩 번갈아 가며 설교하는 한편, 영명학교 교장으로 학생들의 경건 훈련을 지도하면서 주중에는 매일 2개 반에서 산수를 가르치기도 했다. 여학교는 교육선교사 다이샤트Julia Dysart(각주 11)가 맡아 가르쳤다.

의료선교사 다니엘Thomas H. Daniel은 환자를 진료하는 것 외에도 틈을 내어 학교에서 위생학과 생리학을 가르쳤고, 주일에는 아내와 함께 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간호 선교사 케슬러Ethel E. Kestler는 내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조선어 공부에 여념이 없었음에도 다니엘을 도와 그해(1906) 1/4분기에 벌써 대여섯 건의 수술을 치러내고 있었다.

하위렴은 팀 사역을 진행하면서 조선 사회의 뿌리 깊은 신분제도인 반상班常의 구별을 넘어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선교사들의 팀 사역의 효과에 크게 고무되기도 했다.

"우리는 우리들의 팀 사역에 스스로 크게 고무되었다. 사람들의 마음가짐도 크게 변화가 오기 시작하면서 양반들의 보수적인 분위기마저 점차 허물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반상班常을 불문하고 복음을 가지고 접근할 수 있었다."(각주 12)

한편 그는 조선의 구원에 관심을 가진 본국의 교인들에게 원활한 팀 사역을 통해 조선의 복음화를 이루게 해달라고 기도를 부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약함을 잘 아는지라 우리들의 능력에만 의존하지 않습니다. 조선의 구원에 관심을 가진 모든 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자유스러운 길을 내사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합니다..."(각주 13)

각주
1. 우측에 한자로 명치(明治) 31년 7월 15일이 보인다. 명치(明治) 31년은 군산개항 1년 전(1898)으로 개항과 함께 지정될 조계지가 그려져 있다. 남북방향이 뒤집혀 그려진 지도에 직선으로 구획된 조계지와 일본 영사관의 부지가 보이고, 좌측 동그라미로 표시된 지역은 죽성 포구이다. 유난히 갈대밭이 많아 조선 시대 옥구군지에도 죽성포로 기록되어 있다.
2. Rev. W. B. Harrison, "New Hopes in a New field", The Korea Mission Field, Vol. 2, No. 2, Dec. 1905, pp. 27
3. 전킨과 하위렴이 사역지를 교체하면서 일부 지역의 관할이 변경되었다.
4. 정오에 시간을 알리기 위해 쏘는 대포를 오포(午砲)라 부르기도 했다.
5. S. H. Chester, D.D "Lights and Shadows of Mission Work in The Far East“ The Presbyterian Committee of Publication, pp. 124, 그 당시 선교사의 연봉은 독신 선교사 $600, 부부선교사 $1,000가 지급되었다. 밀가루 1 barrel에 13 dollar, 소고기 1파운드에 35 cent, 버터 1파운드에 80 cent, 석탄 1ton은 17 dollar로 미리 몇 개월 전 샌프란시스코에 주문하면 요코하마를 통해 제물포를 거쳐 다시 뱃길로 군산에 운송되었다.
6. 위의 책, pp. 126
7. William B. Harrison, "Notes from Kunsan", The Korea Mission Field, Vol. 3, No. 9, Sep. 1907, pp. 132
8. 스테이션 재산관리 업무는 부위렴 선교사가 맡아 한 것으로 보인다.
9. William B. Harrison, "Evangelistic Work in Chulla Circuit", The Korea Mission Field, Vol. 3, No. 8. Aug. 1907, pp. 126
10. "Report of Kunsan Station", For the Quater Ending March 31st., 1906, The Korea Mission Field, Vol. 2, No. 7, May. 1906, pp. 137
11. 스테이션 구내 여학교(멜볼딘)에서 교사로 사역하다 나중에 유진 벨의 세 번째 부인이 되면서 광주 이일성경학원 교장으로 사역했다.
12. "Report of Kunsan Station", For the Quater Ending March 31st., 1906, The Korea Mission Field, Vol. 2, No. 7, May. 1906, pp. 138
13. 위의 책, pp. 138

백종근 목사는 한국에서 공과대학과 대학원을 마치고 산업연구원(KIET)에 책임연구원으로 근무하다 미국에 유학 후 신학으로 바꿔 오스틴 장로교 신학교(Austin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에서 M.Div 과정을 마치고 미국장로교(PCUSA)에서 목사가 되었다. 오레곤(Portland, Oregon)에서 줄곧 목회 후 은퇴해 지금은 피닉스 아리조나(Phoenix, Arizona)에 머물고 있다. 지난 펜데믹 기간 남장로교 초기 선교역사에 매몰해 『하나님 나라에서 개벽을 보다』와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 두 권의 저서를 냈으며 그 가운데 하위렴 선교사의 선교 일대기를 기록한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는 출간된 지 일 년도 되지 않아 스탠포드 대학 도서관 Koean Collection에 선정되어 소장되기도 했다. 백종근 목사는 하위렴 선교사 기념사업회를 설립해 미국과 한국에서 설교와 지역 교회사 세미나를 인도하기도 했다. 최근에도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자료를 정리해 집필 중에 있으며 한편 디아스포라 선교역사 연구회를 결성해 미주 한인 교회 역사를 찾아보는 일에 시간을 보내고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