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일곱 가지 정의론과 교회공동체와 사회공동체의 만남.
제5공화국의 시작을 그린 ‘서울의 봄’이라는 영화가 2023년 12월 중에 1,000만 관객을 돌파했다. 1979년 12ㆍ12사태 이후 정권을 잡은 신군부는 국정 철학을 “정의 사회 구현”으로 삼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여당의 당명도 “민주정의당”이었다. 파출소마다 적힌 정의에 관련된 표어를 보면, ‘누가 누구에게 정의를 외치는가’하는 의구심을 가진 사람은 소수가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이 정의인가? 과연 정의는 강자의 이익인가, 아니면 정의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치유책인가? 놀랍게도 10년이 지나지 않아서 권력의 실세였던 대통령은 퇴임, 사과와 함께 백담사 행을 택해야 했다. 그때를 전후하여 고국에는 정의에 대한 갈증이 심했고, 종종 시민사회 속에서 그 거칠게 정의의 요구가 솟구쳐올랐다. 2011년 봄 하버드의 마이클 샌델 교수가 지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은 미국에서도 10만 부가 안 팔렸던 책인데, 일본에서는 60만 부, 한국에서는 100만 부 이상의 판매를 기록했다. 사회는 정의를 요구하고 있었고, 그 정의를 담론으로 삼았으며, 교회는 사회적인 담론에 대한 나름의 답변을 제시할 필요성을 가지게 되었다.
1. 정의에 관한 논의의 보편성.
정의에 대한 서구의 담론은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지금도 진행 중이다. 정의에 관한 담론이 한참 진행 중이던 1980년대에 카렌 레바크즈(Karen Lebacqz)는 정의론의 담론을 6개의 패러다임으로 그녀의 책, 『정의에 관한 6가지 이론』에서 정리한 바 있다. 그 여섯의 첫째는 19세기 제임스 밀과 제레미 벤담의 공리주의(utilitarianism) 정의론, 둘째는 『사회정의론』으로 정의에 대한 담론을 세계화시킨 존 롤스의 자유주의(liberalism) 정의론, 셋째는 로버트 노직의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 정의론, 넷째는 카톨릭 주교회의 목회서신(Pastoral Letter in Catholic Social Teaching and U.S. Economy)의 정의론 , 다섯째는 라인홀드 니버의 기독교 현실주의(Christian realism) 정의론, 그리고 마지막 여섯 번째로 구스타보 구티에레즈와 호세 미란다를 중심으로 한 해방신학(liberation theology)의 정의론적 관점을 거론한다. 이 여섯 입장은 당시까지의 정의에 대한 담론을 정리한 것이었으나, 전체적으로 정의가 무엇인가를 논쟁적으로 밝힌 것이라기보다는 소개였다. 정의론에 대한 충분히 정리되지 않은 다양한 논의는 각 이론적 체계의 “파편화된 찌꺼기로 남아있다”고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는 비평하였으며, “장님이 더듬어 만진 코끼리”였다고 카렌 레바크즈도 각 정의론의 강조점을 비평적으로 소개한다. 정의에 대한 담론이 아직 활발히 진행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6종류의 정의론은 책의 부제에서 제시한 것처럼 철학적, 신학적 윤리의 관점을 우리에게 제시하여 주면서 이제까지의 정의론의 이론적 발전의 궤적을 소개해준다는 측면에서 도움이 된다.
카렌 레바크즈의 관점은 비교적 최근에 발생한 “공동체적 정의론”을 거론하지 않았지만, 정의론에 관한 자유주의적 진영의 3 관점과 기독교 진영의 3 관점을 비교하는 귀중한 통찰력을 제공하고 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목표로 삼는 공리주의 정의론은 전체의 공리(公利, utility)를 위하여 개인의 권리를 희생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공리주의는 다수의 즐거움과 행복 혹은 이익을 보장하는, 즉 공리의 극대화를 위하여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전체주의적 우려가 있으므로, 이를 비판하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려는 입장이 존 롤스의 『사회정의론』이다. 롤즈의 정의론은 한 마디로 “공정으로서의 정의”(justice as fairness)이다. 그의 정의론은 두 가지 공정을 낳는 정의의 원리 위에 서 있다. 첫째는 모든 사람이 평등한 자유를 차별 없이 보장받아야 한다. 이를 평등한 자유의 원리라 한다. 둘째는 불리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위하여 분배 상의 불평등을 용인한다. 이는 차등의 원리라고 하는데, 모두에게 자유, 소득, 부 등 사회의 기본재는 공정하게 분배되어야 하지만, 사회의 불평등을 겪는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의 이익이 되도록 하는 원칙, 맥시민(max-min)의 원칙을 지키자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 대한 엄청난 비판이 제기되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로버트 노직이다. 노직은 공리주의나 롤스의 자유주의적 정의론 모두가 개인의 권리를 침해한다고 생각한다. 노직의 자유지상주의적 관점은 정의의 핵심은 “평등이 아니라 자유”이며, 완벽한 자유, 자유방임주의와 개인 소유권의 인정을 철저하게 보장받으려 한다. 이를 위하여 정부는 최소국가를 운영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대체로 첫 세 이론이 표방하는 자유주의적 정의론이 이성과 인간성에 대한 신뢰 위에서 접근하는 경향이 있음에 반하여, 기독교적 정의론의 전통은 인간의 합리성을 부정하지는 않으나 성경 계시를 사용하여 인간의 비합리성, 곧 “죄성”(peccability)을 지적한다. 레바크즈는 기독교 정의론을 카톨릭 전통, 개신교 전통 그리고 해방신학의 정의론에서 찾는다. 넷째로 카톨릭 전통에 따르면, 주교회의는 무엇보다도 가난한 자들이 겪는 상황이 사회 정의의 리트머스 시험지라고 하며, 가난한 자에 대한 특수한 사회적 위치를 정당화하였다. 주교회의는 혁명을 지지하지도 않고, 자유주의를 비판하지도 않는다. 다만 정의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에 대해서는 비교적 함구하였다.
다섯 번째로 개신교를 대표하는 라인홀드 니버의 정의론은 “기독교 현실주의”적 관점이다. 니버에 의하면, 사회는 예수로부터 사랑이라는 최고의 윤리적 명령을 받는데, 사회 속의 인간은 불행하게도 사랑을 사심 없이 완벽하게 이루어낼 수 없다. 니버는 이것을 ‘사랑의 불가능한 가능성’이라고 보았으며, 사회 속의 인간은 죄에 영향을 받는 “현실적인”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니버는 사회나 집단 혹은 국가가 순전한 비이기적인 사랑의 행동을 한 적이 없으므로, 여기서 사랑은 정의와의 변증법적인 관계를 통해서 사랑을 구현할 수 있을 뿐이라고 한다. 정의는 그러므로 죄에 의하여 만들어진 상황 속에서 복잡한 이해관계와 가능성의 판단으로 시행되기 때문에, 완전한 아가페의 이상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니버는 사랑이 정의를 넘어서고, 정의를 실현하고, 정의를 판단한다 했다. 사랑은 실제로 정의의 요구를 종종 넘어서기 때문에, 정의를 초월한다고 규정했다. 니버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며, 자본주의를 “사회적 부정의의 극악한 형태”로 보았다. 그는 정의가 자유와 평등이라는 규범을 통해서 확보되지만, 결국은 인간의 죄성 때문에 약자를 위한 힘의 균형이 공정한 조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음을 주장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니버는 롤즈나 주교회의의 정의론이 비현실적이라 보았다. 사회 집단의 늪, 이데올로기적 편향, 이윤을 위한 기업의 탐욕 앞에서의 사랑과 정의는 결국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않음을 그는 본 것이다.
여섯째로 소개된 해방신학의 정의론은 니버가 보았던 죄나 악의 문제를 더욱 조직적으로 접근했다. 구티에레즈나 호세 미란다와 같은 정의론자들에게 ‘정의란 죄에 대한 고발이자 참여’였다.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남미의 가난과 억압적 현실 속에서 정의의 하나님은 성도의 실천을 통해서만 체험하게 된다. 실천을 위하여 준비할 것은 먼저 부정의를 파악하는 것인데, 이것을 고치는 행위는 개발이 아닌 해방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그 해방이란 죄의 구조화된 집단성, 국제체제에 의한 남미의 종속성, 그리고 서구에 대한 ‘의심의 해석학’을 통해서, 왜곡된 상황에 대한 독해에 반대하는 혁명적 실천으로 이루어진다. 해방을 위한 과정에서 정의란 가난한 자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며, 신을 아는 것은 “생각”이 아니라 정의를 “실천함”이며, 해방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 해방의 하나님과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정의에 관한 담론은 무엇보다도 교회공동체와 사회공동체의 대화를 가능하게 한다. 첫 세 번의 이론은 신자와 불신자를 망라하는 토론의 기회를 이성과 합리성에 기반하여 열어놓았고, 뒤의 신앙적 관점에서 참여한 구교, 신교의 신학자와 남미의 해방신학자는 합리적 이론화의 견지에서는 조직력은 떨어지지만, 이성과 계시를 연결하여 정의론에 관한 논의를 인간 심성의 깊은 죄악까지 고려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죄에 대한 극복을 추구하되 그 죄의 집단성과 제도적 변혁의 차원까지 논의를 확산시켰다. 이러한 견지에서 월터 윙크라는 신학자와 스티븐 모트라는 윤리학자의 통찰은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의 실천이 악의 문제이지만, 결국 “정사와 권세”에까지 관련된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따라서 정의의 관심은 제도, 제도의 영성과 이데올로기, 그리고 결국 그 영성에 영향을 미치는 영적인 세력도 고려하도록 인도한다.
2. 공동체주의 정의론과 구조적 다원주의.
레바크즈 교수가 6가지 정의론을 정리할 때 아직 드러나지 않았던 정의론은 공동체주의 정의론이다. 정의론에 대한 담론에 있어서 하버드 대학교는 정의론의 공론화에 깊은 공헌을 했다. 하버드에는 존 롤즈의 패러다임과 함께 로버트 노직이 함께하고 있었다. 롤즈에 대한 노직의 자유지상주의적 비판과 함께 나타난 공동체주의 정의론은 로버트 노직과 박사 후 강의를 함께 담당한 마이클 왈저(Michael Walzer)를 통해 나타났다. 당시 로버트 노직과 강의한 마이클 왈저의 강의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강좌였다. 여기서 토론의 절반은 노직 교수의 저술, 『무정부, 국가, 그리고 유토피아』(Anarchy, State, and Utopia, New York, 1974)를 통해 드러났고, 그 나머지 절반은 바로 왈저의 『정의의 영역』이라는 책을 통해서 정리되었다. 전자가 자유지상주의적 정의론이었다면, 후자는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 정의론이었다. 노직과 왈저는 롤즈 교수와 대부분 그 견해를 달리하면서도, 그의 책 『사회정의론』(1971)을 통해서 각자의 이론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일곱 번째의 정의론으로 왈저의 공동체주의 정의론은 “응보적 정의”(retributive justice)라기 보다는 “분배적 정의”(distributive justice)를 다룸에 있다. 그의 정의론은 분배의 대상이 되는 각 가치와 그것이 작동되는 각 영역을 구분하면서 한 영역의 가치를 장악한 사람이 다른 영역의 가치까지도 장악하는 “전제”(tyranny) 혹은 “독재”(dictatorship)를 그의 학문적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이 ‘전제’에 대한 왈저의 대안은 “다원적 평등”(complex equality)의 확보이다. 여기서 다원적 평등이란 단순 평등(simple equality)에 대칭이 되는 개념이다. 많은 정의론자들은 자유 혹은 평등이라는 관념에 따라 재화와 가치를 적절하게 분배함으로 최소한의 정의를 추구하자고 주장한다. 그런데 왈저는 단순한 분배의 평등을 넘어 “가치의 전환,” 즉 사회적으로 중요한 특정 가치를 가진 일부의 사람들이 다른 가치까지도 장악하게 되는 상황을 문제 삼으며, 이는 결코 정의로운 상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다원적 평등이란 정당한 몫의 확보는 각기 다른 고유한 영역의 독특성을 인정하고 각 영역의 가장 적합한 분배원칙에 따라야 한다는 당위성의 제시이다. 그 결과, 혈통이 다른 가치를 장악하거나 토지재산이 다른 영역의 삶을 결정하게 되거나 혹은 하나님의 은총이나 권력, 그리고 자본이 다른 가치의 영역을 무너뜨리지 않는 정의로운 사회를 기술하려는 것이다. 요컨대 왈저는 “어떠한 사회적 가치 X도 X의 의미와는 상관없이 단지 누군가가 다른 가치 Y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Y를 소유한 사람들에게 분배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이러한 “가치의 전환”이 전제이며 이는 다원적 평등이 확보되지 못한 상태에서 발생하는 사회현상이다. 전제의 특성이란 그러므로 한 가치의 고유한 영역을 넘어서 세계 전체로 권력을 확대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하나의 수단을 통하여 그 수단이 아닌 다른 수단으로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을 얻으려는 세력의 확장이다.
마이클 왈저와 입장을 같이하는 공동체주의 정의론자는 마이클 샌들(Michael Sandel)과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 등이 있다. 그러나 공동체 정의론자들이 주장하는 다원적 평등의 영역에 대한 발견은 신학자 집단에 의하여 오래전부터 주장되어온 논지이다. 그것은 종교개혁자들의 전통 위에서 시작되었다. 루터나 캘빈에게 있어서 교회의 영역은 국가로부터 분리된 영역으로 존재하였으며, 이러한 사상의 연원은 교회의 자율성을 주장해온 고전적인 정치신학자 어거스틴의 두 도시론에 있다. 20세가 들어 이러한 공동체론을 신학과 철학 그리고 정치학의 입장에서 바라본 사람들은 신캘빈주의(Neo-Calvinism) 신학자와 철학자들이다. 이러한 전통 속에서 국가의 구조적 다원성을 주장하는 패러다임을 가진 신학자와 철학자 집단이 견고한 사회적, 구조적 다원주의를 주장해왔다. 특히 카이퍼주의자(Kuyperians)라 일컫는 일련의 사람들은 국가의 구조가 다원적이며, 다른 영역으로 환원할 수 없는 영역이 공존함으로 전체주의적 압제를 이론적으로 거부하며, 다원적 영역의 자유를 확보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 이러한 일군의 학자로서 가장 선두에 있는 이론가이자 실천가는 아브라함 카이퍼이다. 그와 함께 헤르만 도예베르트와 헤르만 바빙크를 필두로 하여 밥 하우츠바르트, 제임스 스킬렌, 고든 스파이크만, 니콜라스 월터스토프와 리차드 마우 등의 학자들이 이 진영에 포진하여 있다. 이들에게 사회는 국가, 교회, 상업의 영역, 예술의 영역, 가정의 영역과 학교의 영역으로 분리되어 있으며, 이 담장을 잘 수호하는 것이 국가가 감당하여야 할 공중정의(public justice)라고 보았다. 이러한 영역주권(Sphere Sovereignty)이라는 관점은 공동체주의 정의론과 상당 부분 상보적인 특성을 보여주는 구조적 다원주의 이론이라 할 수 있다.
3. 성경이 강조하는 정의의 3가지 범주.
정의론에 관련된 담론이 지성 사회에 풍성한 것처럼, 성경에도 정의에 관한 언급이 풍성하다. 이미 논의한 것처럼 정의는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속성 중 하나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선인과 악인 모두에게 미치지만, 특히 압제 받는 사람을 옹호하시며 연약한 자들을 위하여 변론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사회적 약자가 돌봄을 받지 못할 때, 그들의 변론자가 되길 원하신다. 더구나 사람들의 압제로 말미암아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분이시다. 아브라함의 시대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정의로운 나라의 비전을 주신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창 18:19). 소돔과 고모라의 폭압적인 상황을 보러 오신 정의 곧 “츠다카”의 하나님은 그 땅의 부르짖음 “츠아카”가 얼마나 심한지 확인하신다. 하나님은 다윗의 시대에도 부르짖음 “츠아카”를 들으시고 여기에서 구원하신다.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시 145:19).
그로부터 300년 이후 이사야의 시대에도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로움에 관한 요청은 지속된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소돔의 관원과 고모라의 백성”(사 1:10)이 되었다고 질타하며, 이사야서를 시작한다.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사 5:7)이었다고 논박하신다. 구약성경에서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정의와 공의는 츠다카와 미슈파트이다. 이사야는 예언의 말씀 가운데서 정교한 언어의 유희를 사용한다. 너희에게 “미슈파트” 곧 정의를 바랐으나, 도리어 “미슈파흐” 곧 포학이요, “츠다카” 곧 공의를 바랬으나 도리어 “츠아카” 곧 부르짖음이었다고 유대인의 죄악에 대하여 도전한다.
이러한 유대인에 대한 하나님의 원대한 사랑은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서 나타나지만, 고통당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배려하시는 정의로운 개입을 통해서도 나타나신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정의는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기독교적인 정의의 세 가지 구분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돌아보시는데, 그 첫째는 응보정의(retributive justice)요, 둘째는 분배정의(distributive justice)요, 셋째는 회복정의(restorative justice)이다. 이러한 정의론의 관점에서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놀라운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사랑과 정의로 통치하셨는지를 알게 된다. 이미 죄로 왜곡된 중근동의 역사 가운에서 죄에 대한 교정과 심판 없이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의 악에 대하여 보응함으로 출애굽을 이끄셨다. 종 되었던 집에서 해방 시키시는 하나님은 이집트의 군대뿐 아니라, 가나안의 강력한 주민들을 벌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경을 주셨다. 그들의 폭압적 정치와 타락한 성생활과 문화는 하나님의 응보정의 차원의 심판을 동반한다. 하나님의 응보정의가 가나안의 거주민을 쫓아내고 유대인의 나라가 시작되도록 인도하지만, 그들도 하나님의 정의를 만족시키지 못함으로 결국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공의는 건국부터 망국까지 관통하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두려운 응보정의이다. 응보정의의 하나님은 백성들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시는데, 하나님이 세우시는 응보정의는 세상의 종말에까지 그치지 않는 하나님의 기본적인 세상을 판단하시는 관점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응보정의 뿐만 아니라 분배정의를 통하여 나타난다. 분배정의는 이스라엘 백성의 토지분배로 나타난다. 경제적인 것이 확보되지 않는 자유란 유명무실한 것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서 싸우고 기업을 확보한다. 이스라엘은 그 분배정의의 골격을 마련하게 의하여 토지를 제비뽑아 분배하고, 그 토지를 지키기 위하여 안식년과 희년 제도를 통하여 7년마다, 그리고 49년마다 제도를 점검하고 토지의 재분배를 단행한다. 희년은 구약 백성의 분배정의를 구현하는 놀라운 제도이다.
기업의 확보는 분배정의와 관련되어있지만, 이는 당연히 유대인의 회복정의와 동시에 맞물려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정의로운 분배로 나타나야 하는데, 정의로운 분배는 오랜 기준인 “각자에게 그에게 속한 것” 즉 응분의 몫(desert)을 주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공헌에 의한 응분의 몫일 경우도 있지만 약자에게는 생존을 위한 필요에 소용되는 것이 주어져야 한다. 제사장 나라를 세우려는 하나님의 의도는 그러므로 해방된 노예의 나라가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세상의 빛이 되기를 기획하신다. 제의와 안식제도는 새로운 나라의 분배정의와 회복정의를 구체화시킨다. 안식일, 안식달, 안식년, 희년의 구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기 무화과나무와 자기 포도나무 그늘 아래 안전한 삶을 살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배려이다. 영적인 거룩함과 물질적인 풍요, 회복을 위한 “고엘”(kinsman-redeemer)제도는 이스라엘의 분배정의와 응보정의를 함께 이루는 방편일뿐 아니라 기업의 회복자, 자녀를 낳아 가문을 잇는 회복정의의 핵심적 요소이다. 고엘은 피의 보복자이며, 기업을 무르는 자이며, 신분의 해방자이자, 자녀를 낳아서 대를 잇는 자이다. 회복정의는 최근 메노나이트 계통의 진영에서는 응보정의의 시행에도 영향을 미쳐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화해를 이루는 상황을 낳으며 용서의 시행을 도모하는 방향으로도 발전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신약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표징이기도 하지만, 정의를 위한 놀라운 선택이기도 하다. 첫 번째로 하나님은 죄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신다. 죄인을 심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응보정의이다. 그런데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하나님의 대안이 십자가에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매어 달아 응보정의를 이루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짖음--“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시 22:1)--은 응보정의에 충실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그에 순종하는 아들을 생각나게 만든다. 두 번째로 십자가는 분배정의(distributive justice)를 완성하신다. 예수님을 죽음을 통해 나타난 응보정의는 단지 인간의 죄악 때문에 심판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예수님의 속죄의 공효(功效), 십자가의 효과는 성도들을 향하여 분배된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의 형벌을 분배받은 것처럼,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백성이 의로움을 덧입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는 권세를 분배하셨다. 셋째로 하나님의 정의는 회복정의(restorative justice)를 내포한다. 이 회복정의는 이전의 파괴된 인간성을 치유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는 인간의 회복을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제 현재의 삶을 통하여 우리가 다시 성숙하기를 원하신다. 영, 육간에 회복되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가진 영광과 그 형상과 빛을 나누어 가지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은 사랑의 성령으로 우리 신자에게 오셔서 우리 대신 심판을 받으시고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의, 정의, 공의를 이루신다.
V. 맺음말.
정의와 사랑의 관계에 대한 고전적인 작품, 『아가페: 기독교 사랑의 윤리적 분석』을 쓴 진 아웃카(Gene Outka)는 사랑과 정의의 관계를 윤리적으로 분석하면서, 학자에 따라 이 관계를 셋으로 구별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한다. 첫째로 사랑과 정의의 관념은 서로 배치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대표적 학자는 니그렌이다. 그는 무조건적인, 무동기적인 사랑인 아가페에 정의의 영역은 필적할 수 없는 대조적인 영역이라고 보았다. 아웃카는 정의의 문제는 무조건적인 사랑인 아가페에 이를 수 없다고 본다. 둘째로 아웃카는 사랑과 정의가 구별된다는 것이다. 니이버는 이러한 입장이다. 사랑은 정의가 요청하는 것보다 더 나아간다. 사랑과 정의는 개념적으로는 구별되지만, 실제로 이들은 겹치며, 아가페 사랑은 정의가 원하는 것보다 더욱 요청하게 된다는 것이다. 셋째의 주장은 사랑과 정의가 일치한다는 주장이다. 조셉 플레처는 니그렌, 니버, 부른너의 정의론을 비판하면서 정의는 분배되어진 사랑이며, 다수의 이웃 사이에서 공정을 추구하는 것으로서 사랑과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한다. 월터스토프나 스티븐 모트도 사랑과 정의를 구별하여 가르지 않는다. 악과 죄가 관영한 척박한 환경에서 제한된 자원을 배분하기 위한 사랑이 낳는 최적의 대안이 정의라는 것이다.
사랑과 정의는 하나님의 성품으로서 나뉘어있지 않고 교회공동체와 사회공동체를 구별하지 않는다. 사랑과 정의는 그 위치상 ‘하나는 교회공동체에 속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공동체에 속한 것’이라고 보는 것도 오해의 소지가 있다. 교회를 사랑의 공동체라 부르는 것이나, 국가가 합법화된 폭력을 사용함으로 발생되고 유지되는 공동체라는 말도 틀린 말을 아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교회는 사랑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교회는 그 시작부터 하나님의 정의를 이루며 시작했고 지금도 교회 안에 탁월한 정의가 필요하다. 국가 또한 공중정의의 유지만으로 존립할 수 없어 지도자와 시민의 긍휼과 자비와 애국심을 요청하는 때가 있다. 그러므로 교회공동체와 사회공동체가 그 사랑과 정의의 특성으로 구별(differentiation)은 되나 예리하게 나누어지는 것(division)은 아니다. 교회의 성역을 흘러넘치는 사랑과 공의가 정치와 비즈니스의 상업의 영역, 학교, 예술을 비롯한 문화의 영역에도 동일하게 흘러넘쳐야 할 필요가 있다. 자원의 배분, 죄악과 갈등 및 부정의의 연속 속에서 사랑은 정의와 변증법적인 관계를 가지고, 그 속에서 최적의 대안을 찾아야 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 폴 리쾨르는 이 두 개념이 “양극단의 개념”이기 때문에 서로 경시할 위험이 있으며, 둘은 변증법적인 개념인지라 두 개념을 공평하게 다루는 것 역시 불가능하고, 부분적이고 잠정적일 수 있다고 평가한다. 다만 하나님의 사랑은 사회공동체를 무시하거나 차별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정의는 교회공동체를 우회하지 않는다. 사랑과 정의의 조화는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드러날 수 있을까? 6.25전쟁에서 시민은 신자, 불신자를 가리지 않고 조국의 존립을 위해 싸웠으며, IMF 치하의 ‘금 모으기’는 현대적 사랑의 방법으로 교회와 사회를 나누지 않았다. 구원을 위한, 혹은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선교 사역은 사랑과 분배정의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귀중한 사역이다. 복음과 빵은 나누어지지 않는 모습으로 이웃에게 다가선다. 3.1운동 당시 신자들의 만세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식민세력과 맞서는 확대된 이웃 사랑의 자구책이자, 회복정의를 구현하는 사랑의 또 다른 모습이다. 악인을 제어하는 사법적 시스템의 완비와 합리적 시행은 사랑의 열매를 지키는 껍질이다. 또한 분배정의에서 탈락된 그리고 응보정의의 대상이 된 범죄자의 회복을 향한 회복정의는 하나님 사랑의 또 다른 드러남이다. 사랑과 정의는 그러므로 변증법 대화를 이루는 상보적인 축으로 우리에게 드러날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그 둘은 이혼 없이 영원토록 손잡고 걸어갈 부부라 함이 옳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