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 소재하는 복음주의적 학교인 “킹즈 칼리지”(The King’s Colle)가 재정적인 이유로 문을 닫고, 이번 가을학기부터 학생을 받을 수 없다는 우울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학교는 인문학을 가르쳐 학생을 주변의 유수한 대학원이나 전문대학원으로 보내던 요람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나 극좌파의 해체주의적 진영에 대항하여, 이러한 학교는 전통적인 자유와 평등, 정의, 용서와 자비와 같은 사상의 기초를 기독교적 인문학의 전통 속에서 찾아 대안을 제공하던 기관입니다.
킹즈 칼리지의 중단을 달리 표현하면, 일리노이의 위튼이나, 애틀란타의 에모리, 조지아의 웨슬리언대, 미시건의 캘빈대와 같은 학교가 문을 닫았다는 말입니다. 남가주로 말하면, 우리가 자녀들을 안심하고 보내는, 바욜라와 페퍼다인 대학과 같은 기독교 학교, 아주사나 웨스트몬트와 같은 인문학을 가르치는 복음적 학교들이 없어진다는 소식과 다름이 없습니다. 뉴욕이 진보 좌파(progressive Left)와 신우파(New Religious Right)의 격전장이 되면서, 오랫동안 자유민주주의의 견고한 기반이 되었던 지성적 보루가 망각 혹은 유실되었다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인문학, 인문과학, 혹은 인문사회과학의 교양이 중요한 이유는 이 분야가 인간을 폭넓게 이해하려는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신학의 분야에서도 “신학적 인간학”을 배웁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에 대한 가르침, “하나님의 형상론”이나, 인간 타락 이후의 “인죄론”(hamartiology)을 다룹니다. 그러나 중세가 무너지면서, 대두된 르네상스의 영향은 수많은 신학자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스콜라주의적 신학 이론을 넘어, 현실적인 인간 상황을 새롭게 연구하도록 길을 열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중세 말, 언어, 문학, 철학과 역사에 대한 관심 및 그리스ㆍ로마의 문화와 고전에 대한 재발견은 새로운 지식의 세계를 열었습니다. 회화, 건축, 조각은 이제 신앙의 대상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체를 표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4-16세기의 인본주의(hummanism)와 이후 17-18세기의 계몽주의라는 반기독교적 사상의 대두가 있었지만, 16-17세기의 종교개혁을 경유한 기독교는 인문주의적 지식을 습득하며 새로운 지식사회에 대응하는 사상적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신학적인 계시의 기초를 가지고 인문학적인 지식을 사용하여 당시에 필요한 지성적인 토대를 놓은 사람들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러한 전통은 이미 어거스틴의 플라톤 사용, 또한 아퀴나스의 아리스토텔레스적 유산의 이용을 통해 예시되었습니다. 16세기 법학도였던 루터와 캘빈은 그들이 가진 법학이라는 지식의 틀을 사용하여 기독교를 체계적으로 재정리하여 지성 사회에 대안을 제시한 것입니다. 고립된 스콜라주의의 섬이 아니라, 인간학이라는 지식을 교회가 당시의 시대와 소통하는 교량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교회의 공통언어는 성경입니다. 그러나 우리와 우리 자녀는 세상 속의 공통언어를 익혀 소통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면에서 대학의 공통언어는 인문학, 혹은 인간학입니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과 응용과학의 수많은 담론 속에서, 이것을 비판하고 교정하고 위치를 정해주는 세상의 공용어는 인문학적 교양입니다. 인문학적 교양이 중요한 이유는 이 시대에 그곳에서 우리 자녀들의 영혼을 사로잡는 영적 전쟁이 가장 치열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대학의 패러다임은 반기독교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학문의 영역이 다시 우리의 선교지가 된 지금, 총명한 우리 자녀들을 지성 사회의 사무엘과 다윗과 에스더와 다니엘과 같은 파수꾼으로 파송할 때가 벌써 깊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