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광 목사(월드쉐어 USA)
(Photo : 기독일보) 강태광 목사(월드쉐어 USA)

콘스탄티노플에서 크리소스톰이 활동하던 시기에 서방에는 암브로시우스가 있습니다. 암브로시우스의 업적과 삶이 평가절하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거스틴을 변화시킨 인물로 간단하게 소개되곤 합니다. 비록 제자 어거스틴의 화려한 업적에 가려졌지만, 암브로시우스의 삶과 가르침은 대단합니다.    

다행히도 암브로시우스에 대한 적절한 평가가 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암브로시우스를 어거스틴, 히메로무스, 그리고 대 그레고리우스 교황과 더불어 '서방 교회학자'로 불렀습니다. 참고로 동방 교회학자'는 요한 크리소스톰, 대  바실리오스, 나치안츠의 그레고리 그리고  아타나시우스 등입니다.    

고대 교회사에서 교회학자는 교회가 특출한 지식과 견고한 신앙 그리고 거룩한 삶을 산 저술가나 설교가에게 부여하는 명예로운 칭호입니다. 통상 서방교회 교회학자 4명, 동방교회 교회학자 4명을 말합니다. 그러나 천주교회에서는 33명의 교회학자를 말합니다. 여하간 암브로시우스는 이런 위대한 교회학자에 이름을 올릴 만큼 위대한 업적을 남긴 교부입니다.    

암브로시우스는 339년경 갈리아(현재의 프랑스)의 지방 장관으로 재직한 아우렐리우스의 아들로 트리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젊은 나이에 사망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암브로시우스를 포함한 자녀들을 데리고 로마로 돌아갔습니다. 로마에서 암브로시우스는 아버지의 친구요 로마 황제의 근위대장이요 그리스도인이었던 안치오 프로부스의 도움으로 공부를 하였습니다.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안치오 프로부스는 영특한 친구의 아들을 진심으로 후원했습니다. 아버지 친구의 도움으로 암브로시우스는 여러 가지 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었습니다. 암브로시우스는 아버지가 공부했던 법학을 공부하는 한편 수사학, 철학 그리고 헬라어 공부를 했습니다. 그래서 암브로시우스는 인문학적 소양이 풍성한 법률가로 성장하였습니다.

암브로시우스는 상류층의 관습대로 아버지처럼 변호사로 활동하며 사회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때 또 안치오 프로부스가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그에게 공직의 길을 안내하였습니다. 영특한 암브로시우스는 공직에서 승승장구했습니다. 370년경에 밀라노에 황제가 보내는 행정관으로 파견을 가게 됩니다. 그는 이미 친구의 영향으로 기독교인이 되었고, 인자한 행정관으로 주민들의 인정을 받습니다.   

당시 교회는 아리우스파 문제로 갈등하고 있었는데, 아리우스파였던 밀라노 주교가 죽으면서 차기 주교 선출을 둘러싼 대립으로 들끓었습니다. 지역 내 공공질서를 수습해야 할 위치에 있었던 암브로시우스가 중재하기 위해 대성당에 갔을 때, 한 아이가 갑자기 "암브로시우스 주교!"라고 외쳤습니다.    

철없는 아이의 "암브로시우스 주교!"라는 외침을 모든 사람이 따라 했습니다. 밀라노 지역의 성도들이 보기에 교회분열을 막고 문제 수습을 하는데 암브로시오가 적격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두루두루 존경받는 행정관이었고, 황제의 신임을 받았고, 성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암브로시우스를 그들은 존경했습니다.   

그러나 암브로시우스는 주교직을 맡을 의사가 전혀 없었습니다. 우선, 암브로시우스 본인은 주교직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행정관으로 만족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둘째, 어머니와 자신을 후원해 준 안치오 프로부스의 기대에 부응하여 성공하는 관료가 되고 싶었습니다. 셋째 그는 아직 세례도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신학의 훈련도 전혀 받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 신망있는 주교를 원했던 교황청과 로마 황실의 뜻으로 암브로시우스는 밀라노 감독으로 374년에 서임되었습니다. 감독 후보로 결정되자마자 세례를 받고 세례받았는지 1주일 만에 주교로 취임했습니다. 주교로 취임하기 직전에 그는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일부는 교회에 바쳤습니다. 이 일로 그는 명성과 영향력을 얻었습니다.    

암브로시우스는 일평생 청빈한 삶을 살며 약한 사람들을 돌보았다는 것은 교부학을 연구한 학자 대부분이 강조하는 사항입니다. 그는 쉬지 않고 일했고, 주일과 대축일 외에는 하루에 한 끼만 식사했다고 합니다. 그는 늘 가난한 사람, 환자, 죄수를 돌보았습니다. 그는 사형수를 돌보며 사형수의 사면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아울러 그는 개인교사를 두고 신학수업도 계속했습니다.    

그는 인문학으로 준비된 건강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출세나 안위보다는 백성들과 성도들을 생각했습니다. 약자를 위한 그의 진심이 드러난 사건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로마군 수비 대장이 시민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분노한 황제는 철저한 응징을 명령했고 이 소식을 들은 암브로시우스는 무고한 시민을 향한 보복 행위를 중지해 달라고 황제에게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황제는 얼마 지나지 않아 7천여 명의 데살로니가 주민을 학살했습니다. 암브로시우스는 황제의 보복 행위와 대량 학살을 강력히 규탄했습니다. 예배에 참석하려는 데오도시우스 황제의 앞을 가로막은 암브로시우스는 회개하기 전까지는 성찬을 베풀 수 없다고 선포했습니다.    

이런 암브로시우스에 대해 신하들은 분노했지만,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암브로시우스의 말대로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참회했습니다. 이 두 사람 각자가 보여준 신앙은 많은 사람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395년 1월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죽자 암브로시우스가 황제 장례식을 집례 했습니다. 그리고 2년 뒤인 397년 4월 4일 부활 주일에 암브로시우스도 하나님 품에 안겼습니다.    

암브로시우스는 성공한 관료에서 교회 지도자로 변신한 인물입니다. 법학, 수사학, 철학 그리고 고전 헬라어를 연구한 인문학자입니다. 그는 인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관료 생활에 성공하였고 그 성공적인 관료 생활을 발판으로 감독과 주교가 되어 성공적으로 목회했던 교회 지도자입니다. 그의 개인 생활, 성직자로의 품행 그리고 설교는 그가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것을 증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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