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축구 관련 기사에 주머니가 자주 등장한다. 남아공 축구팀에 패배한 홍명보 감독이 사퇴를 선언한 후 퇴장하며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것을 언론, 평론가 그리고 축구팬이 맹렬히 비난했다. 홍명보 감독이 귀국하며 기자들과 야유하는 팬을 피해 공항을 벗어날 때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고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았다. 축구협회 국회 청문회에서 용기(?)있게 소신 발언한 축구계 인사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고 또 난리가 났다.
바지에 주머니는 16세기에 시작되었다. 유럽의 귀족들이 작은 소지품들을 소지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처음에는 바지 허리춤에 작은 주머니(파우치)를 매달아 소지품을 관리했다. 그러나 미관상 이유 혹은 길거리 소매치기(Outpurse) 방지를 이유로 옷 안에 주머니를 달기 시작했다. 17세기 일이다. 이 시절 주머니에 손을 넣은 일은 무례하고 불손한 모습으로 보였다.
귀족들은 두 가지 이유로 주머니에 손을 넣지 않았다. 우선 손에 무기가 없다는 의미로 주머니에 손을 넣지 않았다. 또 무례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지 않았다. 당시 주머니는 모든 옷에 달리지 않았기에 바지 주머니는 부와 지위의 상징이었다. 노동자들에게는 주머니 달린 바지는 그림의 떡이기도 했고, 주머니에 손을 넣는 것은 게으름의 상징으로 오해받기에 주머니에 손을 넣지 않았다.
17세기의 유물인 주머니에 손 넣는 것이 무례하다는 개념이 21세기에 한국 뉴스를 장식한다는 것이 놀랍다. 홍명보 감독이 사퇴하는 장면에서 손을 주머니에 넣는 것이 비난받을 때 ‘주머니 손이 이렇게도 비난받을 일인가?’라는 질문이 마음에 머물렀다.
주머니는 죄가 없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것도 시인 윤동주는 호주머니라는 시를 남겼다. 넣을 것 없어/ 걱정이던/ 호주머니는// 겨울만 되면/ 주먹 두 개/ 갑북갑북. 장갑도 변변치 않았던 시절, 얇은 바지 주머니였지만 언 손을 녹이기에 충분했다. 손을 넣고 걷다가 넘어져 다치기도 하고 바지 주머니를 찢어 혼이 난 적도 있다. 생각만 해도 빙그레 미소가 지어지는 아름다운 추억이 바지 주머니에 담겨 있다.
난처하고 어색한 상황에 손 처리가 불편하다. 설교자나 연설가에게 ‘손을 어떻게 처리하는가?’는 늘 있는 숙제다. 미국 정치 역사에서 탁월한 대중 연설가로 알려진 클린턴은 손 처리가 너무 과하다는 지적을 받았었다. 그래서 그는 손 위치를 교정하고 손동작을 가슴 중심으로 제한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잘 알려진 클린턴 박스 (Clinton Box)이다.
필자도 발표나 설교할 때 손 처리가 어렵다. 주머니에 손을 넣기도한다. 필자에게 최고의 설교자로 존경하는 목사님도 설교를 시작하면 주머니에 손을 넣은 버릇이 있다. 그의 인격과 평소의 모습을 고려하면 주머니에 손을 넣는 것은 무례함과 전혀 상관이 없는 습관일 뿐이다. 물론 설교자의 제스처나 손동작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주머니에 손 넣는 것을 권하지는 않는다.
이번 축구 청문회에서 주머니 손과 더불어 떠도는 말이 ‘왜 졌어요?’이다. 실소가 절로 나온다. 청문회도 언론의 보도도 모두 헛발질이다. 이번 청문회는 북미 월드컵 경기에서 보여준 국가 대표팀과 축구협회 헛발질의 핵심을 파헤치지 못했다. 축구협회와 프로축구연맹의 난맥을 지적한 어느 기자의 일갈을 겨우 건졌다. 청문회도 헛발질했고 언론도 헛발질이다.
주머니에 손을 넣는 것이 권장할 만한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언론, 시사 평론가, 그리고 정치권이 십자포화를 퍼부을 만한 일도 아니다. 축구협회와 축구팀이 헛발질에 분노한 맘이 가라앉는데, 다시 나타난 국회와 언론의 헛발질로 국민의 분노가 되살아날 것 같아 안타깝다. 이런 헛발질이 열대야에 시달리는 국민을 더 불편하게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