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선교 초기, 미국 북장로교와 북감리회가 선교지 중복을 피하기 위해 20여 년간 치열한 협의 과정을 거쳤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한 지역에 여러 선교부가 들어감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불필요한 경쟁과 갈등 및 선교비 중복 투자를 피하고, 교회의 인적·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교단 간 협의는 이미 1820년대부터 전 세계에서 협력선교의 한 방편으로 시행됐다.
변창욱 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 선교역사)는 통일한국을 대비하는 한국교회 교단들을 향해, 북장로교의 언더우드 선교사와 북감리회의 아펜젤러 선교사가 중심이 돼 진행했던 '선교지 분할협정'(敎界禮讓, comity agreements)을 통해 그 방향성을 전했다.
'통일 이후 북한교회 재건 관련 한국교회 선교 전략 일치를 위한 컨설테이션(북한선교를 위한 한국교회 원탁회의 준비 2차 모임)'이 24일 오후 2시 서울시 종로구 여전도회관에서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 주최로 진행됐다. 한국 주요 교단들의 총무 및 북한선교 실무 책임자들이 자리한 가운데, 변 교수는 '선교지 분할 정책 합의 과정에서 교단의 역할이 주는 시사점'을 주제로 발표했다.
미국 북장로교·북감리회 선교사들,
과열 경쟁과 중복 투자 극복에 힘써
변 교수는 "교파주의가 극심하던 시기, 미국 북장로교와 북감리회 선교사들은 교파교회 설립을 위해 한국에 파송받았지만, 초교파 협력의 필요성을 절감했다"며 "함께 예배하며, 성찬식, 송구영신예배, 기도주간 등의 연합집회를 통해 선교 초기부터 협력의 분위기를 고취시켰다. 그 결과 타 교파 선교사들을 적이 아닌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함께 애쓰는 동역자로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양 선교부를 대표하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초교파 협력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선교구역 분할에 주도적 역할을 감당했다"며 "한국교회 초기 역사에서 합의되고 시행된 선교지 분할 협정은, 경쟁과 다툼보다 연합과 협력의 정신으로 시작됐다. 불필요한 경쟁과 중복투자로 인한 소비를 줄이기 위해 다양한 초교파 연합사업도 추진됐다"고 했다.
1893년 5월 27일 두 교단 사이에 정리된 8개 항목의 '선교구역 분할협정'은 공식 채택이 되진 않았지만, 향후 여러 선교지 분할과 협력의 매우 중요한 원칙을 제공했다. 7가지 항목은 다음과 같다.
▲인구 5천 명이 넘는 개항장과 도시는 공동 점유로 한다. 그러나 5천 명 미만의 도시는 한 선교부의 단독 점유로 한다. ▲한 선교부에 의해 선점된 지역이라도 1년 이상 사역이 중단된 경우에는 타선교부가 들어갈 수 있다. ▲선교 사업을 새로 시작하는 선교부는 아직 점유되지 않은 지역에서 시작해야 한다.
▲한 교파의 교인이 다른 교파로 교적을 옮길 때에는 직전 선교부 담당자의 추천장(移名證書) 없이는 받아서는 안 된다. ▲협력 교단의 치리를 상호 존중한다. ▲한 선교부에 속한 조사, 학생, 교사 및 보조인 등의 일꾼들은 그 선교부의 문서 동의서 없이는 받아서는 안 된다. ▲기독교 서적은 같은 가격에 팔아야 하며 무료로 주어서는 안 된다. ▲서울을 제외한 지역에는 하나의 종합 병원만을 설립해야 한다. 그러나 진료소와 여성병원은 예외로 한다.
'단일 개신교단'이냐, '분열된 교회들'이냐
분열 해소하고 일치될 마지막 기회 삼아야
변 교수는 이를 토대로 북한 선교를 준비하는 한국교회에 던지는 시사점을 8가지로 정리했다. 그는 첫째로 "북한에 (요 17:21에서 주님이 일치를 위해 기도하셨듯이) 하나의 개신교단를 세울 것인지, 분열된 교회들을 세울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고 했다.
둘째로 "북한교회 세우기에 함께할 교단과 배제시켜야 할 이단 사이비들을 구분해야 한다. 기독론 관점에서 공교회의 신앙고백을 공유해야 하며, 윤리적 측면에서도 문제가 없는 건전한 교회여야 할 것"이라고 했다.
셋째로 "북한 전역을 분할하여 교파별로 나눌 것인지, 아니면 단일 개신교단을 세울 것인지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또한 지역별로 나누더라도 거주 인구수에 대한 정보도 고려돼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날 북한선교를 위한 한국교회 원탁회의 준비 2차 모임에서 주요 교단 북한선교 책임 실무자들은 각 교단별 준비 상황을 공유했다. ⓒ송경호 기자 |
넷째로 "교파를 초월해 하나님 나라 확장의 관점에서, 그리고 '교회의 선교'가 아닌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관점에서 북한교회 세우기 운동이 추진돼야 한다. 개교회의 지교회 혹은 지성전 같은 예배당 세우기는 지양되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다섯째로 "북한교회 세우기 운동은 남한교회끼리 나눠 먹기식, 혹은 자기 몫 챙기기처럼 비쳐서는 안 되며, 점령군처럼 행세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종류의 교회가 세워져야 할지 탈북 목회자/신학자들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한다"고 했다
여섯째로 "북한교회 세우기 운동은 한국교회가 그동안 보여준 수많은 분쟁과 분열의 모습을 해소하고 일치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일곱째로 "북한교회 세우기를 위한 한국교회의 준비 단계로, 교인들에게 타 교단 선교사들은 적이나 경쟁자가 아니라, 함께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일하는 동역자('partner')라는 인식을 심어 줘야 한다"고 했다.
여덟째로 "북한교회 설립을 준비하는 동안, 북한의 절실한 필요를 채우는 사회복지 사업을 교단연합으로 추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마지막으로 "북한교회 세우기 운동을 구체화하기 위한 초교파 상설기구(협의체)를 구성해 합의안을 이끌어내야 한다. 교회 이외에 병원이나 학교 등을 초교파 연합사업으로 추진할 것인지, 아니면 할당된 지역에서 교단별로 추진할 것인지 등을 결정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변 교수는 "한국에 온 미국 장·감교회 선교부는 1888년부터 선교지 분할 논의를 시작했지만, 20년 이상이 경과한 1909년에 가서야 최종 합의에 이르렀다"며 "이처럼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만큼, 1990년대 중반 이후 거의 중단된 북한교회 세우기/재건/북한선교를 위한 논의를 재개하는 KWMA의 노력은 중단없이 지속돼야 한다"고 밝혔다.
안인섭 교수, 13가지 발전적 제안
▲안인섭 교수(총신대 신대원, 기독교통일학회 명예회장)는 1995년도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북한교회재건위원회가 세운 '북한 교회 재건 3원칙'을 소개하며 발전안을 제시하고 있다. ⓒKWMA 제공 |
한편 앞서 발제한 안인섭 교수(총신대 신대원, 기독교통일학회 명예회장)는 1995년도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북한교회재건위원회가 세운 '북한 교회 재건 3원칙'을 소개하며 13가지 발전안을 제시했다.
그는 1. 북한 교회 재건은 기독교 역사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방향을 잡아야 한다. 2. 복음의 보편적 가치를 담아내는 성경적 관점을 합의된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3. 통일과 북한교회재건의 과정에서 '연방주의적인 교회 체제'를 세울 수 있다면 교회 연합은 물론 통일 국가 형성에도 공헌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 교회 재건의 방향을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특정 정파에 함몰시키지 말아야 한다. 5. 북한 교회 재건은 한반도의 통일국가 형성과 맞물려 있다. 6. 북한 교회 재건은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조명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7. 북한 지역이 정전 이후 외부와 단절되어 버린 채 70년이 지나버린 상황에서 북한지역에 교회를 재건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신학적·사회학적으로 점검해야 한다. 8. 교회의 머리 되시는 예수그리스도는 구원과 화해의 주이심을 고백하는 토대 위에 서야 한다. 9. 북한에 재건될 교회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평화의 매개자임을 고백하는 신앙 위에 서야 한다. 10. 북한 교회 재건은 디아코니아 신학 위에 세워져야 한다. 11. 청지기 신학이 요청된다. 12. 양극화를 넘어서야 한다고 했다.
이날 모임은 김승민 목사(한교총 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의 기도에 이어 1부는 강대흥 선교사 (KWMA 사무총장)의 사회로 조봉희 목사(KWMA 통선위원장)가 환영사, 이순창 목사(예장 통합 총회장), 박종순 목사(예장 통합 증경총회장), 김상복 목사(세계성시화운동본부 대표회장), 임현수 목사(캐나다 큰빛교회 원로)가 격려사를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