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위배 위험성에도 무장투쟁
정치적 정당성 있어도 조심해야
암살 외에 다른 선택지 없었는가
신앙인 안중근 선택 일말 아쉬움

◈안중근의 비폭력 항일운동: 기독교 신앙에 기반을 둔 반제국주의, 민족자주 운동

1905년, 을사조약 체결로 한국의 쇠락한 국운을 절감한 안중근 의사는 국권회복 운동에 힘쓸 것을 결심한다. 처음 그가 채택한 국권회복 방편은 교육을 통해 정치, 경제, 국제정세에 무지한 국민을 계몽시키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 그가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만난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가르침과, 상해에서 만난 프랑스 가톨릭 성직자 르각 신부의 조언을 따른 것이었다. 그리하여 1906년 안중근은 가문의 재산을 모두 쏟아부어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세운다.

이처럼 비폭력 자주운동 노선을 걷던 안중근이 직접 총칼을 들고 항일무장투쟁에 뛰어든 것은 이듬해인 1907년이었다. 그는 강원도와 황해도를 거쳐 연해주까지 각지의 의병부대들을 찾아다니며 항일운동을 벌일 기회를 찾았다. 

사실 안중근의 타고난 기질은 이렇게 총칼을 들고 침략해오는 일본군과 싸우는 데 더 적합한 것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무재에 능했고, 이미 10대 때부터 부친과 함께 황해도 지역에서 일어난 동학군을 진압하기 위해 의병으로 참전한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그가 을사조약 이후 즉시 무장투쟁에 뛰어들지 않은 것은 동학란이 잠잠해진 후 그의 가문이 가톨릭 신앙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개신교와 가톨릭을 막론하고 기독교 신학은 교회와 신앙인들이 먼저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금한다. 기독교인이 총칼을 들고 인명을 살상하는 것은 살인을 금하는 신구약 공통의 계명에 위배된다.

다만 외적의 무력 침략과 같이 자위권 발휘가 불가피한 경우에는 기독교인도 정당한 국가권력의 명령 하에 방어전을 펼칠 수 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연합군 스나이퍼 다니엘 잭슨 이병(베리 페퍼 분)이 독일군을 하나씩 사살하면서 시편 구절을 외우는 장면은 기독교적 관점으로 볼 때 정당하다. 나치 독일의 침략전을 막기 위해, 국가의 정당한 명령을 받아 참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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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독실한 기독교인 스나이퍼 다니엘 잭슨 이병(베리 페퍼 분). 기독교적 관점으로 볼 때 정당한 전투를 치르는 인물이다.

안중근의 경우는 상황이 모호했다. 일단 일제 지도자들과 군인들이 식민지화 작업을 차근차근 수행해 가고 있는 것은 분명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이전 임진왜란 당시처럼 명백한 무력 외침을 감행한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게다가 을사조약 체결에는 고종과 대한제국 조정 대신들도 깊게 관여되어 있었다. 

안중근은 이렇게 애매한 상황에서 자신의 가톨릭 신앙에 위배될지 모를 위험성을 무릅쓰고,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무장투쟁의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끝은 모두가 알다시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것이었다.

사건 직후 가톨릭 교회 측은 이 암살 사건에 대해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 안중근이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것은 인정되나, 암살 행위 자체는 성경의 계명을 명백하게 어긴 것이라는 입장을 발표했다.

오늘날 대한민국 어느 누구도 하얼빈 의거가 나라를 위한 순국의 결단에 따라 감행된 것임을 부정하는 이는 없다. 이 땅의 기독교인들 또한 안중근 의사가 영웅적인 순국 열사라는 사실에 어떠한 반론도 제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조금 다른 시각으로 하얼빈 의거라는 사안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안중근의 항일 무장투쟁: 안중근과 본회퍼, 기독교인의 암살 가담의 문제점

정치적으로 본다면 이 사건은 통쾌하고 정당한 일이다. 일본 제국주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일본 내각 초대 총리를 징벌한 쾌거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시각은 오늘날 국제정치 질서에서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두 가지 원칙, 바로 민족 자주권과 민주주의 원칙에 따른 것이다.

세속 정치 관점으로는 이 두 가지 원칙을 위배하려는 세력이 등장했을 때 적극적으로 무력을 동원해 저항하고 징벌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물론 민족의 자주독립을 주장하던 약소국 독립운동 지도자들 가운데는 앞서 언급한 한국의 안창호 선생이나 인도의 간디처럼 마지막까지 비폭력 노선을 고수한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는 소수의 사례에 불과하고, 정당한 민족 독립운동이나 민주주의 혁명은 거의 항상 국가 간 전쟁이나 대규모 내전을 수반했다.

오늘날 세간에서 큰 칭송을 받는 근현대 민주주의의 출발점, 미국 독립혁명과 프랑스 대혁명 모두 애초 전제군주의 부당한 압제에 저항하기 위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총칼을 들고 정권에 반기를 들면서 시작된 일이다.

이렇게 정치적으로 정당한 폭력 사용의 개념이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는 세간의 관점으로 본다면, 하얼빈 의거는 칭송받아 마땅한 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기본적으로 세속의 정치원리보다 성경의 가르침을 우선 따르려는 삶의 태도를 갖는다. 따라서 정치적으로 정당하고 칭송을 받는 일이라도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면이 있다면, 그것을 행하는 데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안중근 의사 사례에서처럼 기독교 신앙과 정당한 정치적 폭력이 내적인 갈등을 빚어내는 일은 유럽에서도 존재했다.

하얼빈 의거 35년 뒤인 1944년, 나치 독일 패망이 확실시되던 시점에 히틀러 통치 방식에 불만을 가졌거나 패전 후 독일의 앞날을 걱정하던 독일 정치권과 군부 유력자들과 명사들은 히틀러 암살과 쿠데타를 시도했다. 하지만 폭탄을 이용한 암살 기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주요 군 장성 몇 명을 죽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히틀러는 경상을 입는 데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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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작전명 발키리>의 등장인물들. 중앙의 군인은 당시 히틀러 앞에 폭탄가방을 놓아두는 역할을 맡았던 암살음모의 주역, 슈타우펜베르크 대령(톰 크루즈 분).

영화 <작전명 발키리>로 널리 알려진 이 7·20 음모에는 나치 정권에 저항하던 독일 고백교회 주요 인물이었던 본회퍼 목사도 동참하고 있었다. 

본회퍼는 안중근 의사처럼 직접 암살을 실행한 인물은 아니지만, 이 암살과 쿠데타 성공을 위해 해외 기독교계 인사들과 미리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업무를 맡았다. 그는 체포당해 나치 독일의 완전한 패망을 2주 앞둔 1945년 4월 수용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본회퍼는 자신이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암살 사건에 가담한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입장을 밝혔다. "미친 운전기사가 버스를 몰고 있을 때, 기독교인의 본분은 그 버스에 치어 죽은 사람의 장례를 치러 주고 기도를 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 운전기사를 끌어내리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 신학계의 일반적 해석은 본회퍼의 이 말이 그가 원래 주장했던 기독교 신앙윤리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아있다. 과연 암살 외에는 다른 저항 방식이 없었는가? 본회퍼 같은 출중한 기독교 지도자가 직접 거사에 가담할 만큼 암살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는가?

안중근에 대해서도 같은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기독교적 관점으로 볼 때 안중근의 의거는 김구, 김원봉, 이봉창, 윤봉길 등의 활약과는 약간 다르게 봐야 할 측면이 존재한다.

다른 독립운동가들은 신앙과 무관하게 오로지 국가의 자주독립을 최고의 가치로 바라보고 암살을 단행했다. 하지만 안중근은 이 땅의 나라 외에도 저 하늘로부터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를 유념하고 자신의 앞길을 선택해야 하는 독특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안중근 의사가 우리 민족의 관점에서 혹은 현대 국제정치 관점에서 영웅적인 삶을 산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에게는 도산 안창호 선생과 같이 마지막까지 신앙의 정신에 의거해서 국민들의 교육과 계몽에 힘쓰는 선택지도 존재했다.

그리고 실제로 기독교 선교사들과 기독교인 독립운동가들의 비폭력 반제국주의 저항운동은 무장투쟁이나 암살을 통한 독립운동 못지않게 후대의 대한민국에 큰 발자국을 남겼다.

그러하기에 영화 <영웅>에 묘사된 안중근 의사의 치열했던 무장투쟁의 삶은 한국인 관객 입장에서 볼 때 독립운동가 안중근의 뜨거운 애국의 열정을 증명하지만, 한국 기독교인 입장에서 바라볼 때는 신앙인 안중근이 마지막까지 믿음에 입각한 독립운동 노선을 확고하게 고수하지 못한 데 대한 일말의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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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역 군중 속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도착을 기다리는 안중근(정성화 분).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