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민수 교수(미드웨스턴침례신학대학원)
(Photo : 기독일보) 심민수 교수(미드웨스턴침례신학대학원)

종교개혁 500주년을 거친 지 여러 해가 지났다. 올해가 몇 년째인지 세어봐야 할 판이다. 아무리 루터의 위업을 애써 잊으려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도 그가 이룩한 종교개혁의 역사는 결코 과소평가되거나 외면될 수 없다. 중세 말, 부패할 대로 부패해 버린 종교 상황의 한복판에서 루터는 온 생애를 던져 개혁의 횃불을 듦으로써 기독교회사의 위대한 인물로 남았다. 루터가 후세에 남긴 총체적 개혁 정신은 구원 믿음의 회복과 성직주의에 대한 도전에 집약되어 있다. 요즘 들어 그가 남긴 거대한 발자취를 충분한 검토 없이 평가절하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는 학적이고 객관적인 검토단계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인물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전제사항이다. 이 글은 그의 역사적 평가에 대한 것은 아니다. 다만, 또 한 차례 종교개혁일을 보내면서 역사적 유산을 떠 올려 보고자 할 따름이다.

루터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이라는 복음신학은 소중한 영적 유산이 되어 종교개혁이후 오늘날까지 개신교가 자리를 구축하는 과정에 가장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신학적 성과이다. 구원의 믿음 교리에 대한 명확한 제시는 성경의 구원론을 교회 안에 회복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이 루터의 공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반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문제는 우리가 추가로 상기해야 할 점이 있는데 그의 신학 유산은 그것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루터는 당시 중세 교회가 망쳐 놓았던 사이비 구원 교리를 "믿음에 의한 구원"이라는 성경의 개념으로 돌려놓았을 뿐 아니라, 교회를 종교권력의 소굴로 변질시켰던 성직주의의 문제를, '만인제사장주의'라고 하는 성경적 개념에 입각하여 극복하려 했던 것이다. 루터는 이렇듯 중세 교회의 문제를 구원 교리의 측면에서 뿐 아니라, 직분 제도의 측면에서도 그 원형을 회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교회사에 있어서 직분론은 주후 4세기 로마제국 내에서 기독교가 국교화 과정에서 사제들이 제국의 행정 관료로 둔갑하면서 그 본질이 크게 훼손되었고, 중세 내내 성직주의의 토대 위에서 권력화와 제도화의 과정을 거쳐 위계 신분제도로 변질되었다. 원래 '~~주의'라는 말은 ~~에 의한, ~~을 위한, ~~ 중심의 사상(이념) 혹은 시스템(체계)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성직주의는 성직에 의한, 성직을 위한, 성직 중심의 사상 혹은 그런 제도적 체계를 상정하는 것이다. 이런 생리를 가진 성직주의 토대 위에서 중세의 모든 종교적 권력은 성직자들에 의해 독점되었다. 교회가 권력의 맛에 취하게 되자 교회 내부의 권력 행태는 속세의 권력조직과 다름없는 행태를 보이게 되었다.

특히 중세 후기로 가면서 성직매매라는 몰염치한 행각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성직매매하는 말은 영어로 simony라고 쓰는데, 사도행전에서 시몬(simon)이라는 마술사가 성령을 돈 주고 사려 했던 것에서 유래하였다. 면죄부 판매와 관련된 사건 중에는 프로이센 할버스타트의 주교인 알브레히트의 경우가 손에 꼽힌다. 그는 원래 성주로서 속권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었지만 종교권력이 세속권력 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돈을 주고 주교 자리를 얻어 냈었다. 하지만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자 베드로 성당 건축에 필요한 자금기부를 바티칸에 약속하고는 그 자금을 충당하고자 판매원 테첼을 시켜 면죄부를 판매하였다. 성직매매의 전형적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이런 고약한 상황에서 루터는 로마가톨릭의 성직주의가 성경적인 배경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로써 그는 만인제사장주의라는 직분론의 토대가 되는 신약성경의 원리를 찾아 가르쳤다. 당시 교회 상황에서 이 사상은 엄청난 파문을 일으킬 수 있는, 대단히 위험천만한 행위였다. 로마가톨릭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사제들의 위계를 지탱해 온 제직제도의 근간을 허무는 일로 보일 수밖에 없는 도전적 행동이었다. 루터는 이런 위험천만한 순간에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굽히지 않았고 이로써 로마가톨릭의 가혹한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예루살렘 종교세력 앞에 선 스데반처럼, 아데미 신전 앞에 선 사도 바울처럼, 무소불위의 종교권력 앞에 선 루터는 사명자로서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만인제사장주의는 모든 신자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다는 개념이며 모든 신자들의 평등한 권리를 알려주는 사상이다. 당시는 국교화로 인해 대부분의 유럽인들이 유아세례를 거쳐 교인으로 받아드려지던 시대였던 터라, 만인제사장주의라는 표현이 당시의 용어로는 적합했을지 모른다. 허나, 비국교화된 지역이나 현시대처럼 세속국가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상황에서는 전신자제사장주의라는 용어가 더 적합하다는 지적이 많다. 충분히 동의 되는 바이다. 만인제사장주의는 성경에서 비롯된 개념이라는 점에서 로마가톨릭과 정교회를 제외한 대부분의 개신교회에서 받아들여지는 교리이다. 루터에 의해 발굴되고 선포된 이 교리는 가톨릭 시대의 성직주의를 마감할 수 있는 엄청난 가르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감스럽게도 선언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그 시대는 종교개혁과 함께 사회개혁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사회개혁의 주도권을 놓을 수 없었던 정통주의 종교개혁자들로서는 안타깝게도 이 개념을 더 강화하거나 심화시키지 못하였다.

반면에 급진적(근원적) 종교개혁자들이었던 아나벱티스트에 의해 이 사상은 실제적으로 적용되었다. 이들 아나벱티스트는 '성직자'라는 용어 자체를 거부하였다. 중세의 성직주의에 대한 반감이 누구보다도 강했던 아나뱁티스트에게 성직주의는 전혀 성경적 가르침이 아니었다. 이들은 성직주의가 권력화된 계급주의에 불과하다고 보았고 따라서 이런 비성경적 가르침을 도려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아나뱁티스트에게 있어서 성직자는 그저 신자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는 방해물이었다. 중세 후기 로마가톨릭 교회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문제는 사실상 권력화를 가속시키는 성직주의에서 기인되었고, 성직자 되기를 선호하였던 동기가 사회적 계층 상승에 이르는 길이라는 잘못된 도식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아나뱁티스트들의 과감한 실천은 시대를 뛰어 넘는 개혁적 실천행동이라고 높이 평가되는 것이 타당하다.

대조적으로 주류 개혁라인에서 보여주었던 성직주의에 대한 철저하지 못했던 개혁의 결과는 오늘날까지도 그 잔여물을 남겨놓고 있다. 윌버트 쉥크의 아래 지적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역사적으로 기독교 세계(Christendom)는 제도적이고 목회적인 성격을 강조하였다. 위계적인 리더십과 교회의 전통은 교인들 위에 군림하는 교회론의 권위를 강화시켰다." 교회 안에 남아 있는 성직주의의 잔여물이란 여전히 위계적인 계급의 산물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개신교 교파들은 교회의 직분을 계급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점에 공감하면서도 사실상 교회 안에 만연된 직제 문화는 "계급인 듯, 계급 아닌, 계급 같은" 위계질서를 다분히 유지해 오고 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서구의 교회가 그러했고 한국의 교회가 그렇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이 주제는 개신교 역사 가운데 늘상 고민거리로 남아 있다. 다행히 최근 수 십 년 동안 이 문제를 신학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들이 있어 왔다. 교회 문제의 실마리는 항상 성경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신약성경에 하나님의 백성(λαός)이란 용어가 그 실마리를 제시한다(벧전2:9-10). 폴 스티븐스의 해석에 따르면 라오스란 하나님의 '한 백성'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계급이나 차별이 없는 하나님의 하나 된 백성을 나타낸다. 누구도 더 높고 낮음이 없이 모두가 평등한 형제애로 하나가 된, 하나님의 백성이란 뜻이다. 이 한 백성 개념이야말로 성직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결정적 단서가 된다. 이는 루터의 만인제사장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실제로 신약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하나 된 백성임을 자명하게 보여준다. 모든 신자가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로서 높고 낮음이 없이 각각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고유의 은사를 받았다. 그에 따라 자신의 기능을 담당하는 가운데 모두 하나로 연합된 몸이 되는 것이다. 모두가 각기 제 기능을 감당하기 때문에 우리 몸의 모든 지체가 한 결 같이 다 중요하다는 원리가 따른다. 더 나아가 은사를 통한 사역의 결과로 모두가 유익을 얻고 결실이 있을 때 교회는 그 지체에게 직분을 부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 얻게 되는 모든 직분은 역할기능론에 입각해서 해석되어야 하며 이로써 교회 리더십의 위치에 있는 직분조차도 주어진 은사를 따라 기능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리더십에 해당되는 직분은 결코 계급이 아니라 역할 자체에 초점을 맞춘 섬김의 자리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