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식 교수(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Photo : 기독일보) 박동식 교수(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독서 모임에서 존 파이퍼가 쓴 『존 파이퍼와 떠나는 칼빈주의 여행』(Five Points)을 읽었다. 흔히 말하는 칼빈주의 5대 교리, 즉 TULIP을 다룬 책이다. T는 Total Depravity(전적 타락), U는 Unconditional Election(무조건적 선택), L은 Limited Atonement(제한 속죄), I는 Irresistible Grace(불가항력적 은혜), P는 Perseverance of the Saints(성도의 견인)를 의미한다.

파이퍼는 '전적 타락'을 설명하면서, 불신자들이 선한 행위를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과 완전히 단절된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결코 의롭지 않"고 '진정으로 선한 행위로 간주 되지 않을 것'이라 한다. 파이퍼가 무슨 의도로 이 말을 하는지 충분히 이해한다. 그럼에도 이 말은 비기독교인에게 할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기독교인인 우리 자신에게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우리 믿는 자들이 선을 행하더라도, 하나님보다 자신을 높이려고 했다면, 그것이야말로 선한 행위가 아니라 자기 우상이라고 말이다.

믿지 않은 이들이 행하는 선한 행위조차 선하지 않다고 간주한다면, 믿지 않은 이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어떻게 공공선을 추구할 수 있는가? 선은 오로지 기독교인만이 행하는가? 이런 식의 교리 해석이 기독교에 도움이 될까? 복음 전도에 도움이 되는가? 오히려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기회를 막는 것은 아닌가? 예수 믿지 않는 이들의 선한 행위를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악한 행동으로 규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모든 인간에게 있다는 칼뱅의 일반 은총의 기본 전제마저도 흔드는 해석 아닐까.

예컨대, 사마리아인의 선한 행동은 그가 예수를 고백하지 않았기 때문에 악한 행동인가?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의 선한 행위를 강도 만난 자를 보고도 그냥 지나쳐 버린 제사장과 레위인, 즉 종교 지도자들의 행위와 명백히 대조시켜서 보여준다. 영생을 질문하는 율법 교사에게 '너도 그와 같이 하라'(눅 10:37) 하신 주님의 원래 의도는, 믿음의 여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어려움에 처해 있으면 도와주라는 실천적 명령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의 접촉점이 있을 수 있다.

다윗은 '암몬 자손인 하눈의 아버지 나하스가 이전에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니, 나도 하눈에게 은혜를 베풀겠다'하고는 신하들을 보내 나하스를 조문하게 한다(삼하 10:2). 이것이 기독교인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야 할 태도 아닌가. 기독교인도 세상 사람들의 도움을 받고 도움을 주고 살아야 한다. 아니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 우리 기독교인은 누구의 도움을 받을 때 그 사람이 기독교인인지 물어보고 도움을 받는가. 그가 기독교인이 아니면 도움을 받지 않는가.

거듭 말하지만, 비판의 화살은 기독교 내부로 돌려야 한다. 우리는 정말로 '하나님'을 높이기 위해 선한 행위를 하는가, 아니면 '자신'을 높이기 위해 그렇게 하는가. 교리 해석이 상식을 무너뜨려서도 안 되며, 교리 해석에 복음을 끼어 맞춰서도 안 될 것이다. 믿지 않은 이들이 행한 선한 행위를 선한 행위로 인정하는 것이 상식이며, 그 상식이 믿지 않은 이들과의 접촉점을 만들어 주며, 주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라는 복음과 선교의 문도 그런 다음 열릴 것이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 Coffee Bean에 가서 African Sunrise 차를 주문했던 적이 있었다. 그렇게 몇 주 갔더니, 일하는 이가 내가 주문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아도 '너 그거 주문할 거지?' 하며 바로 알던 경우가 있었다. 사람이 사람을 어떤 이유에서든 자주 만나면 그 사람을 알게 된다. 공통분모가 형성된다. 기독교인이 비기독교인과 자주 만나 공통분모를 찾았으면 한다. 그것이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서 공공선을 이루어가는 출발 아닐까. 하나님을 믿지 않은 이들과도 만나 대화하고 또 대화하다 보면 세상을 이롭게 할 접촉점이 분명 있을 것이다.

물론 믿지 않은 이들의 선한 행위는 그들 스스로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반 은총으로 부어 주신 것이다. 믿지 않은 이들에게도 임하는 일반 은총이 있다. 그러나 이 은총만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특별 은총이 임해야 한다. 파이퍼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자연적 상태에서도 하나님을 찾을 수 있지만, 그것은 단지 자신들을 죽음의 위협에서 건져주거나 세속적 안위를 보장해 줄 수 있는 존재로서 신을 추구하는 것이지, 참되신 하나님으로서의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다. 회심의 은혜가 없으면 참되신 하나님께로 나올 수 없다.' 이 말은 전적으로 옳다. 회심과 구원을 위해서는 일반 은총이 아닌 특별 은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것을 우리는 전해야 한다.

우리가 받아들이고 고백하는 교리가 도그마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어느 특정 교파가 만든 교리로 크신 하나님의 속성을 제한하지 않아야 한다. 교리의 도그마는 참되신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 교파와 자기를 높이는 것 아닐까. 그것이야말로 사심자용(师心自用), 즉 '자기만 옳다고 고집하고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태도 아닌가. 우리가 지키는 교리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져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신학 공부에는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신학교에 들어와서 공부하는 것은 자신이 그동안 설교를 통해 들어왔거나 선교 단체에서 배워왔거나 개인 공부를 통해 습득한 지식을 확인받는 과정만은 아니다. 물론 그것을 전적으로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공부를 하는 중 그동안 몰랐던 것을 배우면 '내가 모르는 것이 있네, 들어봐야겠구나' 하는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지 않은 이상 신학 공부는 늘 도그마에 갇혀 있기 십상일 것이다.

예수님이 세례받고 기도할 때 하늘이 열렸다(눅 3:21). 신학 공부에도 하늘이 열리는 은혜가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기도하자. 이는 신학의 답이 땅 위에 사는 우리 인간의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열릴 때 부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신학만이 정답이라고 우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겸손 하자. 복음은 은혜로운데, 기계적 교리 이해는 결코 은혜롭지 못하기에, 교리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