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도성에는 미 북장로교에서 파송 받은 사무엘 마펫이 1894년 1월 7일에 대동문 안의 널다리골에 교회를 개척하였다. 그 후 1901년에는 교회가 크게 부흥되어 평양의 중앙인 장대재로 이전하여 ㄱ자 형의 큰 교회당을 건축하였고 부흥을 거듭하여 2천여 명의 성도들이 모였다. 그 후에도 계속 부흥되자 교회를 분립 개척하여 서문밖교회와 산정현교회, 창광교회 등으로 성 밖까지 부흥 개척되었다.
평양의 교회 개척은 두 개의 개신교가 주류를 이루었다. 미 북장로교와 함께 거의 같은 시기에 미 감리교로부터 파송된 윌리엄 제임스 홀은 1893년 3월에 평양과 한성을 오가면서 김창식과 함께 의료선교와 교회 개척을 통해 본격화 하였다. 이때에 평양 감사는 외국인이 집을 구입하지 못하도록 하였고 거주를 허락하지 않았기에 마펫이나 홀 선교사는 왕래하면서 사역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사무엘 마펫에게는 한석진이라는 조사가 있었기에 그를 대신하여 평양 교회 개척이 큰 힘이 되어 주었고, 홀 선교사에게는 김창식이 있어 선교사가 부재시에는 빈 공백을 헌신적으로 감당해 주었다.
평양의 최초의 감리교회는 1893년 3월에 집 두 채를 구입하여 하나는 교회와 진료소로 또 하나는 거처로 사용하였다. 그해 4월부터는 서문통의 '초당집'에서 정기 예배를 드렸고 그 곳이 후에는 '남산현교회'로 성장하였다. 1896년에는 학습교인이 30명, 세례 입교인이 21명으로 증가되었다. 이어서 교인들이 헌금을 하여 '남산재' 라는 평양의 언덕에 1백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기와집 예배당을 헌당하였다. 이 부지에 별도로 학교 건물을 다시 세워서 광성 소학교와 광성 고등학교로 발전시켰다.
1894년 11월에 홀 선교사가 순직한 후 미 감리교 선교회(연회)에서는 1896년8월에 노블(A. Noble) 부부 선교사와 의료선교사인 폴웰(E.D. Follwell) 부부 선교사를 파송했고 김창식을 그 교회의 전도사로 임명했다. 그 후 교인이 폭증하여 1899년에는 학습교인 703명, 세례 입교인이 77명으로 늘었다. 그러자 많은 교인들을 수용하기 위해 1903년에는 다시 벽돌로 된 예배당을 건축하여 1천2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예배당이 세워졌다. 그 이후에도 부흥이 계속되어 '봉룡동교회'와 '칠산교회'와 '이문리교회'가 분립 개척되었다.
이로서 평양에는 사무엘 마펫이 개척한 '장대현교회'와 감리교에서 개척한 '남산현교회'가 평양에 쌍벽을 이루었으며 많은 지교회들이 계속하여 개척되었고 부흥되었다.
1907년 1월에 '평양대부흥운동'에 장대현장로교회와 남산현교회가 중심적인 역할을 크게 하였으며 그로인해 남산현 교회는 교인이 3천 명이 넘었다. 실로 대단한 부흥의 결실이었다. 남산현교회는 단지 신앙적인 공동체로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1919년에 3.1운동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당시 그 교회의 담임목사인 신홍식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참여하고 후에 큰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다. 또한 부목사였던 박석훈은 3월 1일 교인들과 함께 교회에서 고종황제 봉도식과 독립선언식을 갖고 만세 시위를 지휘하다가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11월15일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또한 남산현교회 여신도였던 전도부인 김세지, 박승일을 비롯한 오신도, 손진실, 박현숙 등도 장로교 여신도들과 함께 1919년 11월 대한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상해임시정부와 독립운동을 돕다가 1920년 10월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45년 8월 15일 일제 강점에서 해방되자 교회 재건이 되었지만, 바로 소련에 의한 공산정권이 교회를 압살하려 하여 평양의 여러 교회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이남으로 남하하여 이남 곳곳에 교회를 재건하였다. 그러나 평양에 남아있던 남산현교회 목사가 1950년 6월 24일 밤에 납치되었고 그 후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 당시 김일성 정권은 6.25 남침을 획책하기 위해 전날 밤에 많은 목사와 교회 지도자들을 제거하였으며 다시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하자 이 때도 인민군대는 후퇴하면서 이북 지역 곳곳에 남아 있는 교회 사역자들과 지도자들도 집단 처형하였다. 1950년 10월에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탈환하자 약 1달간 교회들이 다시 문을 열고 주일 예배에 교회 재건 운동을 벌였으나 다시 중공군이 남침하자 그곳에 남은 많은 기독교인들과 목회자들이 국군과 함께 남하하여 이남 지역에 자신들이 섬겼던 교회의 이름으로 다시 교회들을 재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