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글로벌복음통일 전문선교 컨퍼런스(KONA 2021) 셋째 날 간증한 이연영 자매는 북한과 남한에서의 겪은 인생 여정을 소개하며, 절반으로 나눠져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는 한민족의 아픔과 안타까움을 대변했다.
1996년 북한 함경북도 회령시에서 태어난 그녀는 고난의 행군 시절에 태어났지만 굶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했다. 그녀가 3살 되던 해, 탈북한 어머니로 인해 아버지와 친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장사로 꽤나 많은 돈을 벌었던 할머니는 손녀를 위해 가정교사를 고용할 정도로 손녀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아버지와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성장했지만 12살이 되던 해, 부친이 갑자기 수용소에 잡혀가 사망하면서 생각지도 못할 어려움이 찾아왔다. 곁을 지켜주던 할머니마저 3년 후 세상을 등졌다. 15세 소녀는 어린 나이에 세상에 덜렁 남겨졌다.
가족을 모두 떠나 보낸 그녀는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치열한 생존 현장으로 내몰렸다. 국수장사를 비롯해 다양한 음식장사를 했고 시장에서는 채소를 팔았다. 미싱을 배워 남자 정장을 만들자 부자 고객들이 생겼다. 사업의 영역은 확장되어서 아이들 학용품 도매상으로 동네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신뢰를 쌓으며 큰 사업을 일으켰다.
5년 동안 부지런히 노력한 끝에 경제적으로 북한에서 살아가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을 즈음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가 한국에서 자신을 찾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통화의 결론은 한국으로 건너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안정된 사업을 운영하고 있기에 북한을 떠날 생각도 이유도 없었다. 일이 잘못되어 붙잡히면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발길을 떼지 못했다.
그녀가 탈북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배고픔이 아니었다. 최근 급증하고 있는 탈북 이유인 문화적인 갈급함도 아니었다. 그녀는 '엄마가 아프다'는 소식 때문에 두만강을 건넜다. 당시만해도 한국에서 살겠다는 계획이 아니라 엄마의 안부만 잠깐 확인하고 다시 북한으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그래서 장사 물품과, 장부, 돈가방 등도 전부 장롱 안에 넣어둔 채 한 달 뒤면 다시 돌아 올 것이라는 확신과 함께 집을 떠났었다.
2015년 10월 한국 땅을 밟은 그녀는 그제야 북한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너무도 황당하고 그리운 마음이 컸지만 어차피 다시 돌아갈 수 없을 바에는 한국에서 정착해 제대로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대부분의 탈북민들이 언급하는 것처럼 그녀에게 한국은 새로움 그 자체였다. 갓 태어난 아이처럼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었다. 어떻게든 한국 사회에 적응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북한에서 장사를 해본 경험을 살려보려고 했다. 인터넷으로 장사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기 시작한지 하루 만에 한국의 사정은 북한과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북한에서 했던 사업은 한국에서는 보따리 장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20년 동안 살아온 세상과 전혀 다른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야 한다는 충격가운데 몇 개월을 방황하다 대한민국이라는 사회는 무슨 일이든 배워야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북한에서는 하루 종일 일만했었다. 공부를 그만 둔지도 8년이 넘었다. '다시 공부를 시작할 수 있을까?' 라는 두려움과 '과연 내가 해낼 수 있을까?' 라는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음식 걱정, 입을 걱정이 없었고 열심히 노력만 한다면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있음을 발견했다.
그녀는 제대로 공부를 하겠다는 마음을 고쳐먹고 어릴 때부터 가졌던 선생님에 대한 꿈을 꿨다. 대안학교나 탈북 청년들을 돕는 단체에서도 노력하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용기를 북돋아 줬다. 하루 4-5시간만 자면서 공부하는 강행군이 이어졌다. 2016년 경인교대는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한 그녀의 도전과 용기를 높이사 초등교육과 입학을 허락했다.
대학 입시과정부터 4년의 대학생활 동안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스스로 생활비와 학비를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꿈과 목표를 위해 산다는 것 자체가 그녀에게는 희망이자 기쁨이었다. 친구들과 사회도 그녀의 노력을 지지했다. 대학 3학년 시절에는 과대표 활동하고 동아리도 운영할 정도로 주위사람들은 그녀에 대한 성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4년 동안 한번의 휴학 없이 지난해까지 열심히 대학생활을 했고 마침내 "정교사 2급 자격증을 취득하고 선생님의 꿈을 이루게 됐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그녀는 교육과 비지니스를 통합한 교육 비지니스 사업을 구상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경영대학원 또는 교육 대학원 입학도 준비하고 있다.
한국에서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고 꿈을 향해 달려가는 그녀에게는 또 다른 꿈이 생겼다. 그것은 바로 '통일된 대한민국'이다.
북한 땅은 어린 시절부터 그녀에게 너무도 많은 아픔과 상처를 준 곳이기도 하지만 그녀가 태어나서 자란 고향이다. 그곳은 생각만해도 가슴 한 켠이 아련하고 그리운 친구들이 있는 땅이다. 더구나 북한과 한국에서 모두 친구들을 가진 그녀는 자신의 친구들이 서로 적이 되어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는 비극에 아파한다.
이연영 자매는 "통일은 남북한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과제이기도하지만 남북한 두 곳을 모두 경험해 본 탈북 청년들에게는 무거운 과제이자 사명감으로 다가온다"며 "수 십년을 서로 다른 문화에서 살아온 한민족이 한 순간에 적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통일을 말로만 외칠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통일의 그 날을 준비해야 한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