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법궤나 성전 자체가 아니라
성도들 각자 예배드리는 정신과 그에 합당한 행실
자기와 타인 영혼에 의롭고 성실히 책임지는 자세

영화 <잃어버린 법궤의 추적자들(Raiders of The Lost Ark)> 포스터.
영화 <잃어버린 법궤의 추적자들(Raiders of The Lost Ark)> 포스터.

1981년 스필버그와 루카스 두 성공적인 영화 제작자가 만나 처음 공동제작한 영화 <잃어버린 법궤의 추적자들(Raiders of The Lost Ark)>은 최고의 호평을 많이 받았던 다큐멘터리 영화로서 지금도 여전히 최고 10위 안에 들 정도로 흥행을 기록했다.

이 영화는 예루살렘 법궤의 행방을 유대 성서학자들의 자문 하에 상상력을 동원해 추적한다. 이집트 한 신전에 보관되었던 법궤가 세계 2차대전 중 나치 독일군과 인디아나 존스의 스릴 있는 경쟁 끝에 미국 고고학자의 손에 넘겨져, 국방성 창고에 보관되는 것으로 끝난다.

그런데 이 영화에 깊은 영향을 받은 영국의 한 언론인 헨콕은 1992년 <신의 암호: 상징과 봉인>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하였다. 이 책은 법궤의 역사적 행방을 추적한 수준 있는 논픽션으로 평가받았다고 한다.

솔로몬 왕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 보관되었던 법궤는 B.C. 6세기경 바벨론 군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때 사라졌다고 보는데, 위 영화와 책에서는 르호보암 5년에 이집트의 파라오 '시삭'이 쳐들어와 성전의 보물창고를 털어갈 때 법궤도 전리품으로 가져간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무튼 솔로몬 왕 사후 행방이 묘연한 법궤는 인류 역사 동안 최대 관심사 중 하나가 되어, 많은 작품의 소재로 씌여져온 것이 사실이다.

다윗의 법궤 안치

역대상 16장에는 '다윗의 장막'이 나온다. 일찍이 엘리의 두 아들 흡니와 비느하스의 불신앙으로 블레셋에게 법궤를 빼앗긴 이후, 벳세메스를 거쳐 기럇여아림으로 보내어진 법궤는(삼상 4장) 7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다윗에 의해 예루살렘 다윗이 쳐놓은 장막으로 옮겨진다(삼하 6; 대상 13:5).

그런데 아비나답의 집에서 언약궤를 옮기던 도중, 그만 언약궤를 붙들었던 웃사가 하나님의 치심을 당하는 불행한 사건이 일어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된 다윗은 석 달 전 실수를 거울삼아, 규례대로 아론의 후손과 레위 사람들만을 뽑아 엄중히 정결케 한 후 노래와 악기로 찬양하는 가운데 언약궤를 메어 오도록 하여 성공적으로 안치시킨다.

장막 안치식에서 다윗은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후 백성들을 축복하며 기념 음식을 나누어주고, 레위인들로 하나님을 찬양할 찬양대를 조직하여 섬기며, 자신이 직접 지은 찬양시로 감사찬양을 하게 하였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고, 다윗의 장막은 성소로서 오늘날 교회와 성도,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을 예표하는 것이다.

다윗의 장막의 의의

"그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저희로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하리라 이는 이를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암 9:11-12)".

사도행전 15장에는 바나바와 바울이 이방인 사역 중에 일어난 표적과 기사에 대해 말씀을 전한 후, 야고보가 아모스서 말씀을 인용하여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메시지를 전하는 내용에서 하나님이 장차 다윗의 장막을 일으키신다는 말씀이 나온다.

왜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암몬과 신약의 사도행전에서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솔로몬의 성전 대신, 제대로 양식이 갖추어진 모세의 장막도 아닌 허술하기 그지 없는 다윗의 장막을 들어 말씀하셨을까?

다윗이 살던 시대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블레셋)과 수세기 동안 연속 전쟁을 벌이고 있던 때였다.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기 직전 블레셋에게 언약궤를 빼앗긴 이스라엘은 언약궤를 성소로 되가져오기 위해 노력하는데, 언약궤를 탈취함으로써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큰 재난에 처하게 된 블레셋은 마침내 유대로 언약궤를 돌려주게 된다.

그러나 법궤는 수십년 동안 유대와 블레셋의 경계 지역인 아비나답의 집에 머무르게 되었던 것이다(삼상 5-7).

성경은 사울의 전 통치 기간 언약궤를 모세의 장막으로 되돌리려는 노력이 없었음을 시사한다. "우리 하나님의 궤를 우리에게로 다시 옮겨오자. 우리가 사울의 때에는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대상 13:3)."

사울은 인본주의 신앙으로 사무엘 선지자의 가르침에 계속 도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급기야 버림을 당하였고, 회개 대신 다윗에 대한 시기와 피해의식 때문에 놉의 제사장들을 죽이기까지 하였다.

즉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삶을 살았다. 당시 놉과 기브온에 성막이 있었는데, 번제는 언약궤가 없이 기브온 성막에서 드려졌다.

이 같은 상황에서 다윗은 왕이 되어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긴 후, 언약궤를 본 곳인 실로로 되돌리지 않고, 자기가 임시로 마련한 새 장막 가운데 안치시켰다.

이 장막에는 모세의 장막과는 달리 제단을 비롯한 제사기구가 없었기에, 처음에 법궤를 안치한 후 드려졌던 봉헌 제사외엔 그 후 다른 제사가 드려지지 않았고, 대신에 아삽과 그가 이끄는 찬양대가 궤 앞에서 주야로 날마다 섬기며 찬양을 했다(대상 16).

다윗에게 있어 법궤는 곧 하나님의 임재이고, 제사의 형식과 절차를 뒤로 한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제이며, 성령의 충만함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쁨 자체였다. 찬양 가운데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광대하심과 인자하심과 신실하심이 선포되었고 기도의 향이 올려졌다.

이와 같이 다윗의 장막은 다윗이 하나님 얼굴을 전심으로 구하는 곳이었다. 다윗의 삶은 사울에게 쫓겨 풍전등화와 같이 목숨이 위태롭던 수많은 경우에도, 오로지 하나님의 얼굴만을 바라보는 진정 법궤와 함께 한 삶이었다.

모세의 언약궤를 본 따 만든 제품
▲모세의 언약궤를 본 따 만든 제품. ⓒWikimedia Commons

영적 시대상황의 교훈

다윗이 법궤를 가져오기 70여년 전,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에벤에셀 전투에서 패하여 언약궤를 빼앗겼을 당시는 사무엘이 성장하던 시기였다. 당시 제사장들은 엘리의 두 아들에게서 보듯 영적으로 무지하고 윤리적으로 타락한 시대였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삼상 3:1)".

영적 지도자들은 자신의 소유와 관계를 더 중요시하여 말씀의 권위를 땅에 떨어뜨리고, 말씀을 맡은 자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는 죄악을 저질러 성전을 죄의 소굴로 만들었다.

개인 윤리, 가정 윤리, 사회 윤리가 무너져 성적 타락이 팽배한 시대였으며, 바르게 교훈해야 할 지도자들이 어두워짐으로 모두가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경고인 바, 블레셋의 침입에 직면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회개하며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는 대신, 타성적으로 하나님의 임재의 외적 상징일 뿐인 법궤만을 믿고 실로에서 가져온 언약궤를 앞세워 전쟁터로 가져갔다. 그러나 도리어 이로 인해 적군의 기상을 자극하는 역효과만 가져오는 바람에, 결국 전쟁에 패하고 법궤마저 빼앗기게 되었다(삼상 4:3-11).

법궤 자체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오인한 이들의 신앙은 미신적이고 기복적인 성격을 지닌 것으로, 다분히 비순수하며 외식적인 것이었다.

이들은 법궤의 참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간과하여, 자신들의 순결한 신앙을 통하여서만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로서의 법궤의 상징적 역할이 제 구실을 하게 된다는 원리를 망각했다. 즉 법궤의 참 정신을 외면했다.

다윗의 출생 시기는 사무엘 선지자가 노쇠해 두 아들 요엘과 아비야를 사사로 세웠던 때였다. 불행히도 이 두 아들 역시 부당한 이익을 탐하며 부정한 재판을 하는 악행을 저질러 백성들의 원성을 들음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게 하였던 그야말로 영적으로 암울한 시대적 상황이었다(삼상 8).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다윗은 사울 왕과 달리 70여년간 법궤를 빼앗긴 상태였다. 자신이 그토록 갈망하던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드디어 예루살렘 장막에 성공적으로 안치하게 되었다(삼하 6).

다윗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사모하는 순전한 예배 정신으로 제사의 직분과 조직을 정비함으로써, 성막을 근간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생활을 재정비하였다.

다윗의 장막을 포함한 이 역사적 기록이 이미 B.C. 5세기경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언약궤가 있던 성전을 재건축하고 신앙을 회복하기 위해 쓰여졌다는 사실은 오늘 날의 교회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성전의 의의

구약 시대에도 법궤나 성전 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저절로 대변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하나님께선 생수의 원천인 하나님을 버리고 떠남으로 스스로 죄악에 빠진 백성들이 오히려 "하나님이 이 성전에 사신다"고 자위하거나,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고 떠드는 거짓말을 더 이상 믿지 말라고 책망하셨을 뿐 아니라, 성전을 의지하고 죄만 짓기 때문에 성전을 부수겠다고까지 말씀하셨다(렘 7).

바벨론 강변에 앉아 버드나무에 수금을 걸고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던(시 137) 포로된 저들의 상황은, 비단 틸리히가 보았던 역사내 인간 상황의 실존적 상징뿐 아니라, 오늘날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영적 상황에 대한 교훈과 상징인지도 모른다.

결국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법궤나 성전 자체가 아니라, 한결같이 그리스도인의 예배 정신과 합당한 행실, 자기와 타인의 영혼에 대하여 의롭고 성실히 책임을 질 줄 아는 자세와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의 정의 세움인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 사는 동안 법궤와 성전이 갖는 고유한 상징과 의미를 축소하거나 경시해서도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엔 일곱 교회에 대한 말씀을 필두로, 매우 중요한 결정적인 계시가 시작되는 일곱째 천사가 나팔 불때(11:19)와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나올 때(15:5), 꼭 하늘 성전과 언약궤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상 성소는 그 원형이 되는 하늘 성소의 모형이므로(히 9:24) 법궤와 성전이 가지는 상징성과 모형성은 오늘날 말씀과 교회에 상응하는 연장선상에서 본질적 생명력이 있는 영원한 가치를 지닌 것이다.

이제는 우리 모두 잃어버린 법궤를 찾기를 소망한다. 박제된 상징과 외식이 아닌 생명과 진실의 법궤 정신인 예배 정신을 바로 회복해야 한다. 날마다 말씀과 기도 속에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늘 간절히 사모하는 삶이 되기를 기도드린다(고후 5:2).

박현숙
▲박현숙 목사.

박현숙 목사
인터넷 선교 사역자
리빙지저스, 박현숙TV
https://www.youtube.com/channel/UC9awEs_qm4YouqDs9a_zCUg
서울대 수료 후 뉴욕 나약신학교와 미주 장신대원을 졸업했다. 미주에서 크리스천 한인 칼럼니스트로 활동해 왔다.
시집으로 <너의 밤은 나에게 낯설지 않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