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며, 불쏘시개가 되어서 교회가 활활 불꽃처럼 힘차게 되살아나기를 소망한다.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과 질적인 성숙을 간절히 기도하며, 진심으로 염원한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교회의 부흥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려올 때에 교회는 충만한 사랑을 체험했다. 사도행전에 소개된 초대교회 그 모습대로 수천 명이 모이기도 하고, 때로는 핍박 속에서 흩어지기도 하였지만, 교회가 날마다 든든히 세워져 나갔다.
말씀으로부터 죄인의 심령에 울려 펴지는 감동, 이는 성도들이 흔들림 없이 신앙으로 살아가는 원동력이다.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으면, 말쟁이의 수사학에 불과하다. 생명의 원천이 되는 말씀이 증거되며, 심령에 부흥이 일어나서 회개하고 변화를 받으며, 감사와 찬양과 성도들 사이의 유무상통이 충만하기를 기도하는 심정이다. 우리는 전 세계 모든 교회 안에서 모든 성도들이 평안하고 행복하며 만족을 얻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한국교회가 체험했던 평양 장대현교회의 회개 기도와 여의도 광장에서 수백만 명이 운집하던 것만이 부흥이라고는 누구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성도가 홀로 말씀을 조용히 묵상하면서 홀로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나누는 모습도 소중하게 여긴다는 말이다. 우리는 말씀의 부흥, 기도 생활의 감격, 경건의 성장, 전도의 열매를 맺고 선교하여 개척교회를 세우는 일들을 모두 다 부흥이라고 말할 것이다.
오순절 날에 성령의 부으심이 있었고, 엄청난 숫자가 회개하고 돌아왔다.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일어나는 현상이 바로 부흥이다. 하지만 이런 부흥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질문이 남아있다. 부흥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일어나지만, 사람의 참여와 역할에 대해서는 각자 견해가 너무나 다르다.
영국 신학자 이안 머레이는 『부흥과 부흥주의』에서 오늘날의 복음적인 교회들이 이해하는 부흥은 세 가지 견해와 입장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첫째 견해는 부흥이라는 것을 평소에 진행하는 갱신 혹은 지속적인 변화로 이해하는 관점이 있다. 어떤 특별한 날이나 어떤 초자연적인 특정한 현상만이 부흥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화란 개혁교회가 취하는 입장이고, 아브라함 카이퍼가 『성령의 사역』에서 주장한 견해이다. 신약 시대는 이미 전체적으로 지속적인 성령의 사역이 있으므로 어떤 특정한 사건으로 부흥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성령은 이미 오셨고, 충만하게 지속적으로 (once for all) 역사하고 있는 해석이다.
두 번째 견해는 부흥을 일시적이며, 특별한 현상으로 이해하는 경우이다. 부흥을 특별한 사건적인 관점으로 보는 입장인데, 여기에서도 약간 차이가 나는 두 가지 흐름들이 있다. 그 첫째는 부흥은 사람의 순종에 대한 조건적 축복이다라고 해석하는 입장이 있다. 챨스 피니 (Charles G. Finney, 1792-1875)의 영향으로 인해서 확산된 부흥운동이 바로 이러한 전형이다. 사람이 열정적으로 노력하면, 특별한 초자연적인 부흥을 체험할 수 있다고 믿는다. 두 번째 흐름은 회개와 개인적인 거룩함을 갱신하는 노력을 하면, 부흥으로 연결된다는 입장이다. 1950년대에 요나단 고포트와 던컨 캠벨이 주장했는데, 근거로 삼는 성경이 역대하 7장 14절이다: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에서 고칠지라"는 말씀이다. 두 번째 견해는 알미니안주의에 근거한 부흥주의라고 지적할 수 있는데, 이들은 완전하고도 철저한 순종을 다짐하게 되면, 축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부흥의 상급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세 번째, 견해는 부흥을 성령의 주권적인 부으심으로 이해하되,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이들보다는 죄인들의 구원에 관련해서 발생하는 것으로 가르치는 입장이다. 이 견해는 가장 전통적인 부흥에 대한 인식이며, 존 오웬, 요나단 에드워즈, 마틴 로이드 존스, 패커, 이안 머레이 등이 취한 입장이다. 앞에 언급한 첫 번째 부흥에 대한 해석과는 달리, 세 번째 견해는 어떤 특별한 현상이나 사건을 통해서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간섭을 기대한다는 입장이다. 사도행전을 면밀하게 살펴본다면, 진정한 부흥은 교회의 일상적인 체험과 전혀 다르지 않으며, 성령의 강권하심으로 말씀을 통해서 기본적으로 심령에 부어지는 은혜로만 회심이 가능하다. 하지만, 세 번째 해석에서는 부흥이라는 체험과 현상이 일상적인 신앙생활과 동일한 종류이지만, 그 정도와 깊이가 다르다고 보는 것이다. 부흥은 성령의 부으심으로 훨씬 더 많은 사람의 회심이 일어나고, 일상의 신앙생활보다는 훨씬 더 영적인 성숙이 깊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죄에 대해서 깊은 확신이 주어지고, 보다 강렬한 체험을 갖으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생각으로 압도당하게 된다. 1907년 한국 대부흥 운동을 생각하게 될 때에, 필자도 이 세 번째 견해의 부흥 운동을 지지하는 입장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꿈꾸는 진정한 교회부흥과 목회 성공은 세상적인 평가와 세속적인 방법으로 이뤄져서는 안 된다. 교회에 나오는 성도들도 세상에서의 권세, 많은 재물과 물질적인 풍요로움,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명예와 인기, 육체적으로 즐기는 쾌락과 오락에서 과히 멀리 떨어질 수 없다. 이런 것들은 전혀 영원한 기쁨의 원천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일생 동안 매달려 살아간다. 교회는 이 땅 위에 있는 것들로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없음을 명확하게 가르치는 곳이다. 세상에 있는 것들과 눈으로 보고 바라는 것들을 통해서는, 진정한 행복과 평화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는 세상에 있는 것들로는 만족함이 없음을 깨닫게 해 주어야 한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다." (롬 8:6) 인간의 본질과 삶의 진실은 성경에 계시되어 있다. 말씀을 제시하여 어두운 마음에 빛을 주는 곳이 바로 교회이다. 부자든지, 권력자든지, 저명한 사람이든지, 깊은 공허와 미래에의 두려움에서 벗어난 사람은 누구도 없다. 모든 인간은 죄악에 뒤섞여 있기 때문에, 마음의 평화를 가질 수 없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여 요셉처럼 형통케 하심을 얻도록 성도들을 인도하여 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