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분리와 신자 이탈이 정당화되는 교회 내 범죄
정인이 사건, 한국교회 전반 불신앙과 부덕함 입증
가해자 부모인 목회자 부부, 올바른 처신 감행하든
그게 안 된다면 교단 차원에서 엄정한 권징 시행을
◈교회 분열의 역사: 영국 국교회로부터 분리주의자들과 청교도들이 분리된 이유
한국 개신교회는 미국의 청교도 신앙 전통을 이어받은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정작 청교도(the Puritans)의 정확하고 구체적인 역사적 기원에 대해서 아는 이들이 많지 않은 듯하다.
청교도 신앙이 탄생한 곳은 종교개혁 운동이 한창이던 16세기 영국이다. 헨리 8세가 아라곤의 캐서린 왕비와 이혼을 시도하다가 로마 교황청과 관계가 악화되어 가톨릭 교회와 연을 끊고 영국 국교회 체계를 설립한 것이 영국 종교개혁의 도화선이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내막을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면, 헨리 8세는 제대로 된 종교개혁을 시도한 바가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헨리 8세는 영국 교회의 수장을 교황에서 국왕으로 교체했을 뿐, 가톨릭 교리 전반을 개혁하려는 의지는 거의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때문에 영국 국교회가 세워진 이후에도 영국 내에서 진정한 종교개혁을 원하는 이들, 루터와 칼빈 신학을 추종하며 순전한 신앙을 지키는 교회를 새우기 원하던 이들은 영국 국교회와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이렇게 좀 더 온전한 종교개혁을 바라던 이들 가운데는 두 부류의 신앙인들이 존재했다. 첫째는 영국 국교회 내부에서는 도저히 성경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없으므로 국교회로부터 분리되어 나와야 한다는 이들이다. 이들을 분리주의자들(the Separatists)이라고 불렀다.
반면 영국 국교회의 테두리 안에 남아서 온전한 종교개혁을 이뤄내야 한다고 믿는 이들은 국교회를 '청결하게' 한다(purify)는 의미로 청교도라고 불리게 되었다.
미국 메사추세츠 지역에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처음 건너온 이들은 엄밀히 말해 청교도 출신이 아니라 분리주의자 출신이었다.
영국 국교회 안에서는 도저히 신앙을 지키지 못하겠다는 분리주의자들이 네덜란드로 건너가 자신들만의 회중교회를 설립했다가, 네덜란드의 개방적 문화조류 때문에 자녀들의 신앙을 지키가 어렵다고 여겨 목숨을 걸고 북아메리카 플리머스로 이주한 것이다.
청교도들은 처음에는 분리주의자들과 같이 영국 국교회에서 떨어져 나오지 않았지만, 후일 제임스 1세 시기 청교도들에 대한 압제가 심해지자 분리주의자들이 먼저 건너가 있던 메사추세츠 식민지에 대거 합류하게 되었다.
이렇게 청교도들이 분리주의자들을 뒤따라 북아메리카 식민지로 대거 이주해서 곳곳에 회중교회를 세우고 난 뒤에는 굳이 분리주의자들과 청교도들을 분리해 생각할 이유가 없어진 까닭에 결국 모두 합쳐서 청교도로 지칭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바는 교회가 분리된 이유와 그에 대한 후세의 평가다. 당대 영국에서 분리주의자들과 청교도들은 교회 분열을 획책하고 국가 정책에 반하는 이들, 교회의 불순분자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후세의 교회사 연구자 대다수는 그들이 영국 국교회로부터 분리되어 나오기로 한 결정을 신앙을 지키기 위한 결단이었다고 평하며 칭송하게 된다.
성경의 가르침에 맞는 예배와 신앙생활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로마 가톨릭 교회 전통에 따르는 교회생활을 가르치는 것이 분리주의자들의 눈에는 묵과할 수 없는 죄악으로 여겨졌고, 이에 이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만의 공동체, 회중교회를 세우는 형극의 길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Bernard Gribble의 'Mayflower'. 영국 국교회에서 나와 북아메리카로 이주하는 분리주의 회중. ⓒbritannica.com 캡처 |
◈교회분열의 전조: 교역자와 교인들의 죄악이 초래하는 분열과 고통
디트리히 본회퍼 역시 순전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 교회 분리의 결단을 내린 인물이다. 1933년 나치가 장악한 독일의 정국과 그에 환호하던 독일교회의 죄악된 모습을 견디다 못한 본회퍼는 1934년 히틀러의 비윤리적 사상에 반대하던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고백교회 설립에 참여한다.
당시 나치는 저명한 신학자인 동시에 열렬한 나치당원이었던 루트비히 뮐러의 주도 하에 독일 복음주의 교회 설립을 지원했다. 이 교회는 아리아족 중심으로 성경을 개작하고, 유대인 기독교인들을 교회에서 추방하며, 나치와 히틀러를 칭송하는 데 앞장서는 만행을 저질렀다.
칼 바르트, 마르틴 니묄러, 본회퍼 등은 이러한 죄악을 자행하는 교회와는 도무지 함께할 수 없다고 판단, 고백교회를 따로 설립하고 이듬해인 1935년에는 '바르멘 선언'을 통해 히틀러를 칭송하는 독일 복음주의 교회의 행각을 '마귀적'이라고 지탄했다.
이들에 대한 현대 교회사가들의 평가는 당연히 칭송 일색이다. 후세의 기독교인들 모두 이들의 행적이 신앙의 양심을 지키는 순교적 결단이었으며 그들의 믿음의 정신을 거듭 되새겨야 한다고 확신한다.
이처럼 교회사를 보면 교회 공동체의 분열과 신자 이탈이 정당화되는 사례들이 종종 확인된다. 성경은 항상 교회의 연합과 하나됨, 신앙의 일치를 강조한다.
▲나치의 죄악에 동조하는 독일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고백교회 지도자들. 중간열 맨 왼쪽에 본회퍼의 모습이 보인다. ⓒ위키피디아 |
하지만 특정 교회나 교단이 엄중한 죄악을 범하는 경우, 그리고 그런 죄악을 진정성 있는 회개와 엄중한 권징을 통해 발본색원하지 않는 경우, 해당 교회에서 따로 분리되어 나와 순전한 신앙을 지키기 위한 공동체를 따로 세우는 것 역시 성경적으로 혹은 교회사적으로 허용되는 일이다.
물론 이 경우 기존의 교세는 크게 약화된다. 분열을 통해 새로 탄생한 공동체에 소속된 교인들의 수는 대개 소수에 그치고, 이들만이 결국 온전한 교회, 온전한 신앙 공동체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그만큼 교회 혹은 교인들의 죄악이 초래하는 고통이 크다는 것을 이같은 교세 약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최근 한국교회가 이처럼 교회 분리가 정당화되는 비극의 임계치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크게 우려된다.
교회 내에서 교역자들이나 그 주변인들이 저지르는 비위와 죄악이 반복적으로 무마되는 상황이 지속되면, 한국교회는 커다란 내홍 끝에 심각한 분리와 신자의 대량이탈 사태를 겪을 것이고, 한국 사회 전반에 대한 교회의 영향력은 지금보다 더욱 약화될 것이다.
정인 양 학대치사 사건에 대한 관심이 한층 사그라든 상황에서, 경북 지역에서 목회를 담당하고 있는 가해자들의 부모들에 대해 해당 교단과 교회 교인들은 과연 어떤 권징 조치를 내리고 있는가? 또한 가해자들의 부모들은 자녀들을 신앙으로 양육하는 데 완벽하게 실패한 데 대해 스스로 책임지는 자세를 보이고 있는가?
이번 정인 양 사건을 계기로 한국교회가 뼈아픈 신앙의 갱신을 이뤄내려 한다면, 여기에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 전체의 눈으로 볼 때, 이 일은 단순히 가해자들 개인들만의 범죄가 아니라 한국교회 전반의 불신앙과 부덕함이 입증된 일로 비춰진다.
특히 가해자들의 부모들이 현재까지도 목회를 담당하고 있는 현직 교역자들인 까닭에,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신앙의 진정성과 윤리적 자질이 근본으로부터 의심되는 상황이다.
순전한 신앙, 윤리적인 교회를 추구하는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도저히 그런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이들, 그리고 그런 범죄자들의 악독한 심성을 묵과해온 교역자들과는 멍에를 함께할 수 없다고 판단할 만한 비극적인 상황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의 분리와 신자들의 이탈은 교회사적 관점으로 볼 때 정당화된다.
한국교회가 이 일과 관련해서 더 이상 신뢰를 잃지 않으려면, 그리고 이런 죄악들이 축적되어 발생할 심각한 내홍과 분리, 교세 약화 사태를 방지하려면, 현재 목회자로 활동하고 있는 가해자들의 부모들이 신앙 양심에 따라 교역자로서 자신의 자격요건을 되돌아보고 올바른 처신을 감행하든가, 아니면 교단 차원에서 엄정한 권징을 시행할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가해자들의 범죄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심판을 받겠지만, 그들을 양육한 이들과 교회들의 무책임함은 신앙 양심의 차원에서 치리되어야 할 것이다. <계속>
▲정인 양을 학대해 죽음에 이르게 한 양모 장씨가 재판을 받고 나오는 모습. 가해자들 모두 경북 지역 현직 목회자 자녀로 밝혀져 사회와 교계에 충격을 주었다. ⓒKBS 캡처 |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