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태복음 5장 43-48절)".
지난해 어둡고 불안하고 초조했던 일상들이 떠오르며, 언제 또 다시 회복되는 날을 기약할까요? 내심 걱정하는 동안, 어느새 2021년 신축년 새해는 모든 사람들의 부푼 기대와 희망을 품고 아침 먼동은 피어 올랐습니다.
그래도 불안한 마음과 무기력한 가운데서도 화려한 불빛과 아름다운 노래로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했지만, 당시 식민지 지배를 받던 백성들 가운데서 헤로디아의 탄압과 대학살의 위기 속에 간신히 피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오실 소망의 메시아는 말구유의 비천한 곳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작은 몸 하나 누일 곳 없어 냄새나는 짐승의 먹이통에 잠드신 아기 예수님, 찾아온 손님이라고는 멀리 타국에서 헤로디아의 부탁을 받고 찾아온 동방박사와 목동들 뿐, 동방박사는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고 헤로디아를 피해 본국으로 돌아간 후, 그곳은 과연 희망이 있었다고 볼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 사건 이후, 오직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신앙인들은 가혹한 탄압과 박해 속에서도 그들은 오롯이 복음 증거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서기 165-180년, 고대 도시는 한 순간에 무너졌습니다. 수백만 명의 로마 시민들이 죽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로마에서 발생한 역병 탓이었습니다.
파르티아와의 전쟁을 마치고 로마로 돌아온 병사들이 병균을 전파해, 당시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우스(121-180년)가 쓰러졌습니다. 적군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염병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70년이 지난 251년 말, 또 다시 전염병이 발생했습니다. 데시우스의 박해로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희생을 치르고 있을 때, 당시 이교도들은 잔인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전염병은 종교의 차별을 두지 않고, 거리는 이교도와 그리스도인들의 시체로 뒤섞여 나뒹굴었습니다.
부유한 이교도들은 도망을 쳤고, 남은 자들은 서로 경계의식을 풀지 못하고 감염자와의 접촉을 피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세상으로 온 천지는 변해버렸습니다.
하지만 죽음의 공포 속에 떨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교부 키프리안이 소리쳤습니다. "우리가 단지 우리 '그리스도'인만을 소중히 여기고, 우리들만 자비를 베푼다면 그것은 놀라운 일이다. '하나님께서 관용을 베푸신 것 같이, 우리도 관용을 베풀자".
"원수도 사랑하라", 주님께서 권고하신 대로 핍박하는 자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자고 외치며 설파했던 설교에는 큰 울림이 되어, 그리스도인들은 다시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두려움 없이 감염, 위험을 무릅쓰고 시신을 거두면서 병든 자들을 품으며 자기의 집을 내어놓고, 자신을 핍박했던 이교도들에게 기꺼이 손을 내미는 눈물겨운 헌신을 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헌신이 있었기에 기독교는 300여년 만에 로마의 국교로 공인을 받았으며, 드디어 열방을 향해 복음이 퍼져나갔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던 배경에는 전염병을 극복한 사랑의 실천이 있었던 것임을 우리 믿는 신앙인들은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전염병이 로마를 휩쓸 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환자들을 돌보며 사랑을 실천했던 그리스도인들을 '파라볼라노이', 즉 '위험을 무릅쓴 존재'라고 모든 이들이 불렀습니다.
빈부를 가리지 않고 심지어 원수까지도 보살피는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귀감이 되었고 교회 부흥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6,25 동란 때 공산당으로부터 사랑하는 두 아들을 잃었지만, 두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자신의 양자로 삼고, 심지어 한센병으로 고통 받는 환자를 위하여 환부를 입으로 빨면서까지 보살펴 주었던 손양원 목사님이야말로, 이 시대의 '파라볼라노이'가 아닐까요?
특히 마태복음 5장 43-48절 말씀은 사랑의 계명, 곧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최고의 윤리였습니다.
기독교의 중핵을 이루는 실천적인 윤리이자 참된 사랑, 그것은 세월의 흐름과 관계없이 어느 사회에서나 시대에서 동일한 의미를 지니는 거룩한 힘이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여정 가운데서도 사랑의 위력을 보여주며 헌신을 마다하지 않았고 그리스도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하지만 4세기 이전의 기독교회는 탄압받는 집단으로서 공개적인 회집이나 복음 증거가 불가능했고, 온전한 신자들만의 은밀한 예배와 교제를 나누던 시기였습니다.
지금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우리나라와 주변 국가, 인류 사회가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이 위험한 시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여태 사용하지 못하고 아껴두었던 헌신과 사랑을 쏟아 부어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온 몸을 던져 주님의 사랑을 그들에게 나누어야 할 때가 온 것 같은 데, 아직도 세상 연락에 심취되어 주님의 사랑을 전하기에는 아직도 머뭇거리며 이 핑계 저 핑계로 세월만 보내고 있으니,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기다리며 탄식하고 계심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단상에서 설파하시는 주의 종들의 입에 발린 설교는 이제 물리시고, 날마다 감동으로 가득한 뜨거운 열정으로 사랑을 품고 헌신을 실천하는, 앞선 주의 종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를 탄압하며, 예배를 드리지 못하도록 하는 적그리스도들의 만행에는 부드러운 항거로 대처하며, 그들을 위해 우리 신앙인들은 중보기도를 통해 실천적인 사랑을 마음에 품으며 행동에 나서야 하겠습니다.
지금은 코로나19 바이러스 위기 극복을 위한 전면적 교회 쇄신이 필요한 때입니다. 쇄신의 시작은, 우리가 나약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 질서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 앞에, 전염병은 생태계를 파괴한 인간 탐욕에 대한 자연의 경고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향후 바이러스에 관한 근본적 대책이 없다면, 코로나19 사태 이후에도 더욱 인류를 향한 공격이 심해질 것으로 보여집니다.
교회들마다 자기 교회만을 위한 이기적인 경쟁과, 탐심을 버리고 오롯이 공동체를 위한 생명 경제로 전환해야 하겠습니다. 공공의료를 강화하고 불평등을 해소해야 하며, 그리스도 사랑의 백신을 나눠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신앙인은 믿음과 삶의 거리를 좁혀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막을 이 시대 의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희망은 그냥 오지 않습니다. 위기의 현실에서 신앙인의 과제는 소망의 길을 찾아, 그 길 위에 서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새해는 세월이 가고 나면 늘 반복의 일상입니다. 평소 뜨는 해는 보지 못하면서, 새해에 떠오르는 해는 왜 보려고 그 난리일까요? 코로나가 그곳에는 가지 않을까요? 모두가 인간의 탐심에서오는 이기심이 낳은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연말연시가 되면, 교회 안에서 가장 큰 일은 다음 해 예산과 직분 자를 임명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모든 예산과 직분자를 임명하는 목적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곧 복음의 증거요, 천국을 움직이는 열쇠이기도 함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주님을 위해 당하는 고통과 탄압은 더욱 우리들의 신앙을 감동케 하며,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될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아무런 연고 없이 밋밋한 신앙의 결말은,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른다"는 주님의 음성으로 들려오게 될 것임을 명심 또 명심했으면 좋겠습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