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집단적 민족주의, 인간의 폐쇄적 교만 반성
본회퍼 피조세계 고찰 출발점, 공동체 아닌 개인
독일 신학계 왜곡된 심성 사로잡혀 있던 점 간파
◈신학과 집단: 독일 집단주의의 역사적 배경
통상 본회퍼의 신학이라 하면 '공동체의 신학, 사회성의 신학'이라고 알고 있는 연구자들이 많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는 하나, 많은 이들이 이것이 본회퍼 신학의 결과적 단면이라는 사실까지는 충분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본회퍼의 피조세계 고찰의 출발점은 공동체가 아니라 개인이다. 신앙의 공동체와 사회에 대한 본회퍼의 사유는 원래 인간 개개인의 실존적 개별성을 깊게 분석하고 파고드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그의 최초 대표 저서 <성도의 교제>(Sanctorum Communio)는 공동체와 사회의 성격을 현대 루터교 신학의 관점에서 면밀하게 분석하면서, 평등과 존중의 관계를 파괴하는 인간 본연의 죄성을 벗어나기 위한 공동체 모델을 정립하는 데 주력하는 내용을 담아내고 있다.
그가 이 논문(<성도의 교제>는 본회퍼의 박사학위 논문이었다)에서 공동체와 사회, 즉 집단에 우선 주목한 이유는, 이를 집필하던 1927년 당시의 독일 교회와 사회 전반이 심각한 독단성과 폐쇄성에 사로잡혀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참혹한 패전으로 끝난 뒤, 독일 국민들은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 하에서 경제침체와 배패감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주된 원인으로는 19세기 비스마르크 집권기 이후 독일 내부에서 크게 강화된 우월감에 가까운 민족주의를 들 수 있다.
현대 독일의 원류라 할 수 있는 프로이센과 북독일 소국들은 항상 유럽 역사에서 주변부, 약체 취급을 받아왔다. 근대 전반부에는 오스트리아-스페인의 합스부르크 황가, 프랑스 부르봉 왕가, 스웨덴 제국 황가, 러시아 로마노프 황가 사이 알력과 전쟁 가운데서 말 그대로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역사를 겪어 왔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1618-1648년 치러진 30년전쟁을 들 수 있다.
이렇게 열악했던 북독일의 사정은 근대 후반부로 들어서면서 크게 달라지기 시작한다. 우선 18세기 프로이센 군주로 프리드리히 1세와 2세가 집권하면서 국력이 크게 신장되고 영토가 점진적으로 확장되었으며, 중세적 사고를 벗어나 계몽주의적 시대정신을 받아들일 채비를 갖추게 되었다.
18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는 임마누엘 칸트의 등장으로 서구 철학과 학문의 주도권을 획득하였고, 19세기 초 프랑스 나폴레옹 군의 침략으로 잠시 주춤하긴 했지만 이후 빌헬름 1세와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협업 하에 당대 유럽 내 최강국이었던 영국, 프랑스, 러시아에 뒤지지 않는 신흥 제국으로 부상했다.
쉽게 말해 독일은 길고 긴 유럽 역사 내내 기를 펴지 못하다가 18-19세기 들어와 급성장한, 비유하자면 갑작스러운 행운으로 졸부가 된 것과 같은 상황에 놓여 있었던 민족 국가였던 것이다.
통상 이와 같은 국가들의 정서적 특징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뿌리깊은 피해의식, 다른 하나는 극단적 폐쇄성에 근간을 둔 독단성이다.
주변국들의 강성함에 항상 위축되어 있었던 까닭에 타민족에 대한 적개심과 피해의식이 생겨났고, 항상 약자의 입장에 처해 있었던 이유로 주변에 자기를 개방하는 일을 경계해 왔다. 그리고 이런 심성이 수백년 이상 누적되면서 민족 전체를 짓누르는 고질적인 정신적 문제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1910년 유럽 중앙부의 강대국으로 급성장한 독일 북부의 프로이센 왕국. |
◈신학과 인격: 인식 행위와 피조적 존재의 불협화음
사실 이 문제는 오늘날 한국인 전반의 심성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되는 것이다. 고려가 원나라의 실질적인 식민지가 된 13세기 이후, 한반도는 문명 발전의 극심한 정체로 인해 근 600년 이상 전 세계에서 최약체 수준의 국력을 가진 국가로 존속해 왔다.
그러다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이후 국력 신장에 주력한 지도자들과 미묘한 국제정치적 정황을 이용해 역사상 유례없는 빠른 국력 신장과 문명 발전을 이뤄냈다.
이런 운좋은 상황이 피해의식, 폐쇄성, 근거없는 자신감이 결부된 민족 단위의 정신적 문제를 유발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런 정신적 문제의 대표적인 징후로서 툭하면 'K-(K-방역이니, K-외교니 하는 용어들)'를 붙여대기 일쑤인 현 한국민 다수의 자부심을 빙자해 표출되는 열등감과 피해의식은 언급하기 민망할 지경이다.
독일 상황으로 다시 돌아와서 보면,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한 북독일 전역이 빠르게 강대국이 된 상황은 정신적으로 불안한 이에게 칼을 쥐여준 것이나 다름 없는 일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빌헬름 2세 본인의 태생적 장애에 기인한 정신적 콤플렉스가 독일 민족 전체의 피해의식 및 폐쇄성과 맞물려 발발했고, 이후 군인과 민간인 양측을 모두 합쳐 3천만에 가까운 사망자를 낳는 거대한 비극으로 발전했다.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프로이센의 빌헬름 2세. 개인적인 정신적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한 채 독일의 맹목적 자부심과 폐쇄적 집단주의를 이용해 독일민족 전체를 전쟁의 참화 속으로 이끌어간 인물이다. |
본회퍼는 칼 바르트와 마찬가지로, 당대 독일 신학계가 독일 민족을 지배하던 왜곡된 심성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간파한다.
1차대전 개전 당시, 아돌프 폰 하르낙을 비롯한 독일 신학계 지도자들은 빌헬름 2세를 지지하는 93인의 지성인 성명(1914년 8월)을 발표한 바 있다. 칼 바르트를 신정통주의 신학으로 돌려놓은 이 암울한 역사를 본회퍼 역시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본회퍼는 이처럼 교만과 폭력을 정당화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던 독일 민족주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던 광기의 원천을 기독교적 인간 이해에서, 원죄로 타락한 인간 본성에서 찾는다.
본회퍼가 우선 <성도의 교제>를 통해 개별성이 말살된 독일 집단주의 사고를 비판하고 기독교적인 사회적 관계 모델을 제안한 것은 그만큼 독일 사회 전반의 민족적 심성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로 나아진 것이 없었던 급박한 현실을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성도의 교제>를 집필한지 3년만에 그 내용을 보강하기 위한 종교철학 논문 <행위와 존재>(Akt und Sein)를 저술한다. 본회퍼의 교수자격 취득 논문이기도 했던 이 연구는 죄성에 깊게 물든 인간의 정신이 어떤 식으로 자신과 세계, 그리고 하나님을 대상화하여 인식하려 하는지 분석함으로써, 인간 인식의 신학적-존재론적 한계를 지정하는 동시에 이 한계를 애써 외면하다 못해 자력으로 넘어서려 하는 인간의 교만한 심성을 폭로하는 데 주력한다.
▲본회퍼의 두 번째 주저 <행위와 존재>와 본회퍼의 신학적 우군이었던 스위스의 신정통주의 신학자 칼 바르트. |
<행위와 존재>의 주된 비판 대상은 당대 독일 신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칸트 선험론과 독일 관념론, 그리고 후설에서 셸러로 이어지는 현상학적 존재론과 하이데거의 실존론적 존재론이다. 이 사상들은 당대 독일 사상계 전반에 신학적 인간 이해 방법을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본회퍼는 이 사상들을 일관된 철학사적 흐름 내에서 조망하고 비판하기 위해, 인간의 폐쇄적인 인식 행위와 피조세계의 유한한 존재 사이의 어긋남에 먼저 주목한다.
이는 성서적 창조론과 헤라클레이토스의 유전의 존재론에 힘입어 인간의 인식행위가 사물의 존재 자체, 칸트 식으로 말해 사물 자체를 포착할 수 없는 본연의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논증하는 본회퍼식 인식 비판의 출발점이 된다. <계속>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