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들에게 있어서 참된 중생(重生)의 은혜는 어떤 믿음의 열매 또는 증거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았는데, 이는 중생한 자들의 영혼 속에 지속되는 참된 회개와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 그리고 온전한 사랑 가운데 나아가기를 열망하는 마음 등이다. 그런데 이 은혜와 더불어 인간의 심령은 전투장으로 변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 전투에서 육(옛사람)은 영(새사람)의 주권을 뺏기 위해 지칠 줄 모르고 싸운다. 크리스천은 육과의 충돌 없이 영을 만족시킬 수 없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우리 주위에는 성령을 받아 거듭났으면서도 여전히 육신의 욕구에서 해방 받지 못하여 무기력하고 방황하는 영적 삶을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이 대단히 많다. 귀신들의 첫 번째 방어 선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빛 앞에 나오지 못하도록 속임수로 그들의 영혼을 가리는 일이다. 그런데 이 방어선이 무너졌을 때 귀신들의 두 번째 방어선이 있다. 그것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들어온 사람들을 가능한대로 거룩한 은혜에 이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일인 것이다.
영국 런던에서의 어느 주일날. 새벽에 묵상할 때 두 가지 그림이 내 마음에 떠올랐다. 하나는 불량 상품이 공장에서 나오는 그림이었고 또 하나는 어떤 여인이 무언가 자신의 죄악을 합리화하려는 울부짖음이었다. 나는 이 두 가지 그림을 가슴에 새기면서 기도의 제목으로 삼았다.
그날 초청받은 교회의 주일 설교에서 나는 이 두 가지 성령께서 주신 이미지를 성도들에게 소개하며 기도의 시간으로 초청하였다. 그러자 강한 성령의 능력 가운데 신자들이 앞에 나와 무릎을 꿇고 눈물로서 새로운 헌신을 다짐하는 시간이 되었다. 성령께서는 그 교회 성도들의 거룩한 삶에 방해되는 구체적인 죄악들을 지적하신 것이다.
이처럼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구원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지만 그러나 승리로운 간증을 확보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요 성경의 교훈도 아니다. 이들이 이러한 승리로운 영적 단계에 올라가지 못하고 방황하거나 혼미스런 생활을 하고 있다면, 그러한 삶의 이면에는 귀신의 책략이 조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부자유 속에 있는 이들의 영적 상태를 성경을 통해 조명해 보면 다음과 같다.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 8:5-8)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한다(5절). 즉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언제나 자기의 이기적인 욕망 중심으로 모든 일을 생각한다. 성령의 일을 분별하지도 못하고, 기도를 해봐도 온통 잡다한 생각과 욕망으로 방해를 받아 장시간 깊이 기도하지 못한다. 생활 속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다(6절). 육체적으로는 살아 있으나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향하여 죽어 있다. 하나님의 영광과 기쁘신 뜻을 삶 속에서 찾아 확신하며 살지 못한다. 매사에 죄악과 헛된 욕망과 자아 중심적인 생각을 따라 결정하게 된다. 결국엔 자기 자신만을 위한 삶, 결국에는 죄와 정욕 그리고 불안과 좌절감, 열등감, 시기 등으로 영혼이 온통 얼룩져 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7절). 성경 말씀이나 설교 말씀의 내용과는 거리가 멀다. 하나님께서 양심을 통해 책망하시곤 한다. 하나님을 좋으신 하나님으로 느끼지 못한다. '벌주시는 하나님!', 즉 두려운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강하다.
육신의 생각에 머물고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도 없다(7절). 양심의 가책과 설교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여 하나님께 즐겨 순종치 못한다. 육신의 생각에 거하는 한 성령의 생각과 일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8절). 아무리 육신의 생각과 욕망을 따라 신앙생활하려 해도 만족스럽지 않다. 정죄감과 신앙적 무기력이 찾아올 수밖에 없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9-11)
여기서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은 모두 다 성령을 지칭함이다.
1) 거듭난 자는 영혼 속에 하나님의 영, 즉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살아가는 자이다. 이런 자들은 이미 육신을 좇는 삶에서는 벗어난 이들이다(9절); 그러므로 이제는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교제하며 섬기는 삶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다. 육신의 욕망과 생각과는 이젠 관계가 없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이것은 중단 될 수 없는 삶이다. 언제나, 어디서나 그리스도와의 이 관계는 지속되어져야 한다.
2) 이들의 몸은 죄로 인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나, 이들의 영은 그리스도와 함께 의를 향하여 산 것이다(10절); 옛사람의 죽음과 새사람으로 살아감 - 십자가의 능력과 부활의 능력이 항상 우리 안에 역사한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얻어지는 이 경건의 능력을 삶 속에, 세상 속에 나타내는 삶이다.
3) 미래에 있을 몸의 부활 역시 성령의 능력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다(11절); 역시 우리에겐 몸의 부활에 대한 소망, 즉 천국에 대한 소망이 중요하다. 피곤하여 늙고 약해지는 몸, 세상에서의 나그네 생활을 마치고 돌아갈 내 본향! 이에 대한 소망은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충만해진다.
성령을 좇아 살아가는 삶은 한 순간의 경험이 아니다. 때때로 우리의 영적 삶에 강렬하고도 신비로운 현상들이 나타나지만, 성령과 동행하는 삶은 그런 순간들을 맞은 기쁨과 간증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령 충만의 능력은 우리의 평상시 삶 속에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