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서는 이스라엘 왕정 시대 중에서 다윗이 죽은 후 남유다가 멸망할 때까지 약 400년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기원전 10세기에서 6세기에 이르는 이스라엘 역사는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다.

배경락 목사(서울 서북교회)는 1년간 수요예배 설교를 모아 '성도와 목회자가 함께 읽는 이야기 역사신학, 열왕기서 새로읽기'이라 이름붙인 <성경 속 왕조실록>을 펴냈다. 책은 열왕기상하 한 장씩을 한 챕터 삼아 솔로몬부터 시드기야까지 이스라엘 왕들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이에 대한 오늘의 교훈까지 곁들인다. 읽다 보면 저자의 다채로운 지식들도 함께 만날 수 있다.

배 목사는 "인류 최초의 역사서라는 헤로도토스의 <역사>가 기원전 5세기경에 쓰였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성경의 역사는 진정 인류 최초의 역사"라며 "열왕기서 저자는 정확한 사실만을 나열하기보다, 이스라엘 멸망의 원인을 살펴보기를 원했다. 역사를 보고 해석하는 사람들의 관점도 의미 있지만, 직접 역사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관점은 더욱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역사를 좋아한다는 배 목사는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다. 역사를 통해 인간을 이해할 수 있고, 세상을 보는 눈이 열린다"며 "성경이 기록한 이스라엘 역사는 단순한 인간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이끄시는 모습을 기록한 역사서다. 열왕기서는 인간을 이해하는 것과 더불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도 얻게 되고, 세상과 역사를 보는 하나님의 관점도 배우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다음은 인문학과 신학의 융합과 통섭을 지향하고 가능성을 모색하면서 끊임없이 공부하고 매일 블로그(https://brunch.co.kr/@rothem)에 글을 쓰는 배경락 목사와의 인터뷰.

◈"쇠퇴의 길 가는 한국교회, 열왕기서 읽어야"

-열왕기서를 '왕조실록'으로, 아주 신선한 표현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한 번 설교로 다뤄야겠다 해서 사무엘상하를 마쳤습니다. 원고도 따로 정리해놓지 않았고, 그때 그때 발견한 내용으로 쭉 했는데 반응이 의외로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서 열왕기상하부터는 글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고, 편집을 거쳐 책이 탄생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결론적으로 '패망사'입니다. 망해서 흩어지는 것으로 끝납니다. 왜 굳이 패망사를 써야 했을까요? '역사는 승리자에 의해 쓰여진다'는 말도 있듯, 보통은 '이렇게 승리했다'는 식으로 역사를 쓰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스라엘 역사는 변명하지 않습니다. 정직합니다. '우리의 문제점이 무엇이었나' 하는 문제에 지속적으로 징그럽게 집착합니다. 끈질기고 고집스럽게 집착하면서, '후대에게 결코 이 전철을 밟아 멸망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또 다시 패망했습니다. '인간은 역사로부터 배운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과 맥을 같이 합니다.

한국교회도 오늘날 쇠퇴의 길로 가고 있기에, 열왕기상하를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쇠퇴하고 있는지, 어떻게 하면 다시 반전을 이룰 수 있을지 깊이 생각하거나 고민하지 않습니다. 교회 성장과 부흥만 생각하지, 본질적 문제를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열왕기서를 통해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인가요.

"열왕기서를 설교하면서 많은 목사님들의 설교를 찾아봤지만, 열왕기서를 왜 썼는지 모르고 설교한 경우가 많아 깜짝 놀랐습니다. 역대기서와 열왕기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열왕기서가 포로 생활 때 쓰였다면, 역대기서는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다음에 쓰였습니다.

잡혔을 때와 돌아왔을 때는 전혀 다른 상황입니다. 돌아왔을 때는 나라를 다시 세우는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역대기서는 '이스라엘이 다시 회복될 것이다, 다시 돌아오게 하셔서 강대하게 설 것이다' 등 좋은 이야기들을 뽑아 썼습니다. 다윗도 솔로몬도 이렇게 훌륭했으니, 이 위대한 나라를 다시 회복시키자는 것입니다.

반면 열왕기서는 다윗도 솔로몬도 이러이러한 잘못을 했고, 여타 이러저러한 문제들이 쌓이고 쌓여서 망했다는 내용을 진술합니다. 관점이 정반대이지요.

그런데 목사님들이 열왕기서를 설교하면서, 역대기서의 비슷한 본문들을 그대로 끌고 옵니다. 역대기서는 솔로몬이 훌륭하다고 하지만 열왕기는 그렇지 않은데도, '짬뽕'시켜 버립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역사가 이상해집니다.

이처럼, 어떤 관점에서 썼느냐가 중요합니다. 열왕기서를 진짜 선지서들에 앞선 '선(先) 선지서'라고도 합니다. 선지자들은 시대를 보면서, 구약 신명기에서 하나님께서 그려주신 나라를 그대로 만들어야 하는데, 그 그림대로 그리고 있느냐를 보고 날카롭게 책망하는 사람들입니다.

열왕기서는 선지자적 입장에서, 신명기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지 못하는 이스라엘을 책망하고 비판하는 역사서입니다. 그들의 '메인 텍스트'는 신명기로, 이것에 의해 비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비춰, 역사를 보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하나님 말씀에 비춰 우리 역사를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약 백성들은 다윗과 솔로몬의 영화로운 시대만 생각하면서 '그때 하나님께서 크고 놀랍게 역사하셨지, 그러니 우리도 그렇게 지켜 주시고 보호하시고 계속 무궁한 발전을 이룰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1970-80년대 엄청난 부흥과 발전을 이뤄주셨듯, 이 21세기 마지막 세대에 선교적 사명을 대한민국에 넘겨 주셨는데, 이 영광스럽고 영화로운 직무를 감당하도록 끝까지 대한민국과 교회를 지켜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착각입니다. 지금 패망의 길로 가고 있는데, 과거의 영화만을 보면서 기독교는 시대적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열왕기서는 우리에게 매우 큰 의미가 있습니다."

배경락
▲배경락 목사는 "한국 기독교인들이 편향적인 기독교 시각에서만 머물러 있지 않고, 사고의 틀을 넓혀 인문학적 사고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샘솟는기쁨 제공

-열왕기서 저자는 누구인가요.

"알 수 없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 중 누구일 거라고 추측만 할 뿐입니다. 사무엘상하의 저자도 모릅니다.

하지만 '편집된 책'이라는 것만은 알 수 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역대지략을 참고하라'는 구절이 몇 번 나옵니다. 이것 저것 보고 편집했다는 것이지요. 사무엘상하는 사무엘이 원본을 조금 써 놓은 것 같습니다. 사실 몇천 년 전에 쓰였고, 우리 손에 전수된 것은 기원전 200년 전 사본이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왕국 시대의 가장 큰 미스테리는, 성경적 신앙을 회복하고서 돌연 죽임당한 '요시야'왕입니다.

"요시야 하나로 역사를 반전시키기에는, 이스라엘이 너무 썩고 곪은 데가 많았다고 하나님께서 생각하신 것 아닐까요. 요시야는 훌륭한 임금이었지만, 시대 상황을 읽는 데 부족했습니다. 역사의 균형추가 망해가는 앗수르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바벨론으로 넘어가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 보수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평화의 시대로 넘어가는 굉장히 중요한 '터닝 포인트' 가운데, 냉전적 프레임에 갇혀 '반공 이데올로기'만 고수하면 도태될 수 있습니다.

요시야는 굉장히 훌륭한 임금이지만 시대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시야를 통해 개혁의 근본이 무엇인가를 알려 주셨습니다. 요시야는 신명기 법전대로 다시 세워야 한다는 '마지막 불꽃'을 태운 분입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회복해야 할 나라도, 요시야가 추진하던 그 나라입니다."

◈"그래도 '신앙은 좋다'는 한국교회, 정말 그럴까?"

-한국교회도 신앙만은 요시야 왕과 비슷하지 않나요.

"신앙은 '내가 믿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뭐라고 할까요. '쟤들, 믿는 사람 맞아?'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말을 보지 않고, 행동을 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안 믿었을까요? 망할 때까지 믿었습니다. 왕국 시대 당시, 참 선지자든 거짓 선지자든 공통된 이야기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모스나 예레미야, 에스겔 등은 '너희들은 하나님을 안 믿는다'고 했습니다. 말은 믿는다고 하지만, 행동을 보면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믿습니다' 하고 말하지만, 무엇을 믿는가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목사로서 고민이 많습니다. 교회를 이끌어가는 것에 대한 한계, 한국교회의 장래에 대한 고민 등입니다.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이 인도 선교를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가면서 '편하게 안식해야지' 했지만, 영국 기독교가 다 죽어 있었습니다. 인구조사를 하면 다 기독교라고 하지만, 교회는 텅 비어 있고 남은 공동체는 굉장히 근본주의적이었습니다. 타자(他者)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깨달았습니다. '인도가 아니라 영국이 선교지구나.'"

-깊이 생각하게 하네요.

"로드니 스타크(Rodney Stark)의 <기독교의 발흥>에서 한 가지 재미있게 본 것이 있습니다. '통일교의 전파 과정'인데요, 미국에서 '한국의 문선명을 믿으라'고 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미국에 통일교도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저자가 통일교의 전파 과정을 살펴본 것입니다.

2,000년 전으로 돌아가 봅시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예수 믿으세요' 한다면, 누가 믿겠습니까? 당장 '예수가 누군데?'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초대교회 교인들은 어떻게 전도했을까요? 그것이 저자의 고민이었습니다.

이화여대 교수 출신이 열심히 통일교를 전도했습니다. 교회에 초청하고 미디어를 다 동원하고..., 말을 기가 막히게 했지만, 단 한 사람도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조카 한 명에게 사랑을 나누기 시작합니다. 작은 공동체를 이룬 거지요. 정말 진실하게 사랑하고 아껴주고 그의 편이 돼 줬습니다.

그래서 조카가 한 명을 데려왔습니다. 그도 사랑해주고 아껴주고 보듬어줬습니다.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 넘어간 것입니다. 사랑의 공동체의 힘이 그런 것입니다. 초대교회도 비슷했습니다. 그 안에 '타자 환대'의 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로버트 뱅크스(Robert J. Banks)가 <1세기 교회 예배 이야기>에서 말하는 것도 '환대'입니다. 작은 교회 공동체에 느닷없이 누군가 찾아왔는데, 그를 환대하는 내용입니다. 그것이 그 시대 기독교 공동체의 모습이었습니다. 설령 더 이상 찾아오지 않더라도, 누구든 환대했습니다. 그가 나를 고발해서 죽더라도, 감사하고 찬송하면서 죽어갔습니다.

불신자들이 그런 기독교 공동체를 보면서 '저기는 뭔가 다르구나' 하고 깨달은 것입니다. 초대교회 공동체가 점점 세력을 확장하면서, 사랑의 공동체도 확장됐습니다. 죽을지언정 이 공동체에서 벗어나기 싫으니 순교까지 합니다.

이후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믿든 안 믿든 모두 교회로 들어왔습니다. 예전에는 타자들에 대한 환대였는데, '타자'가 사라지고, 같은 공동체가 돼 버렸습니다. 그래서 환대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잘 받아들일까'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요리문답과 신조를 가르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다 점점 그들이 분화되고 소그룹화되고 파벌이 생겼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우리 파벌 아니면 환대하지 않게 됐습니다.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가 쓴 소설 <장미의 이름>을 보십시오. 파벌을 만들어 싸웁니다. 오늘 한국교회도 타자를 향한, 그리고 공동체 내에서도 환대의 정신을 잃어버렸습니다. 기독교가 원래 가졌던 환대의 정신이 모두 사라진 것입니다."

◈"인문학, 기독교와 세상과의 소통 위해 필요"

-인문학에 조예가 깊으시다고 들었습니다. 이번 책에도 인문학이 가미돼 있지요.

"기독교와 인문학의 접목에 관심이 많고, 그런 쪽으로 쓰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번 책도 성경 이야기이지만 인문학이 녹아 있다고 해야 할까요? 둘을 접목시키면 재미있는 스토리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 시대 문화와 사람들의 사고방식, 가치관들을 성경을 통해서만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여러 고고학적 자료들이나 역사서 등을 함께 보면 보다 풍성한 상상력이 동원되고 해석의 폭도 넓어집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의 고민들, 문제들, 아픔들을 과거에는 어떻게 풀어갔는지, 비슷한 사례를 보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성경을 보는 시각도 다양해집니다."

성경 속 왕조실록
▲성경 속 왕조실록, 배경락, 샘솟는기쁨, 304쪽, 14,500원

-성경과 인문학의 접목, 많이 들어봤지만 감이 잘 안 옵니다.

"성경이나 신학에는 '고정관념'들이 있습니다. 신학적 개념들, 기독교의 고정된 개념과 관념 속에서 사용되는 언어들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사랑, 은혜, 성화 등이 있는데, 이것이 세상 사람들과 소통하는 데는 오히려 방해가 됩니다. 세상에서 우리의 언어를 잘 못 알아듣습니다.

그래서 소통할 수 있는 길을 고민하다, 인문학 도서들을 읽으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이 사회 여러 문제들을 고민하다 찾은 답이 성경적인 답과 맥락이 닿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분명 일반은총 속에서 그들이 발견한 지혜일텐데, 특별은총 속 진리와 맥을 같이한다면 연결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작업들을 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가 되면서 다양한 시각이 허용되지만, 우리 기독교는 기껏해야 보수 아니면 진보 양쪽뿐입니다.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포용성이 매우 약한데, 인문학 쪽의 시각들로 성경을 읽으면 좀 더 풍성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경 관련 글을 쓰면서도, 인문학에서 빌려온 개념들을 활용합니다.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시간에 대한 관점은 굉장히 많습니다. 구속사적 관점이 대표적이지요. 하지만 공간적 관점은 다소 부족합니다.

그래서 얼마 전에 쓴 '인류, 추방의 역사(https://brunch.co.kr/@rothem/553)'라는 글에 인문학적 공간의 개념을 차용했습니다. 지금 예멘 난민 문제가 나오는데, 이것도 우리 공동체 안에 들어오느냐 나가느냐 하는 '공간'의 개념 아닙니까.

성경을 이런 관점으로 보면 굉장히 풍성합니다. 에덴에서 쫓겨나 다시 에덴으로 돌아가는 이야기, 아브라함은 고향에서 떠나 다시 돌아오는 이야기, 요셉은 형들에 의해 팔려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 공간적 관점으로 성경을 읽으면 굉장히 풍성해지는데, 그 동안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인문학이 결여돼 있다 보니 세상과 소통하지 못할 뿐 아니라, 세상이 말하는 윤리를 따라가지도 못합니다. 아주 전근대적이고 굉장히 보수적인 윤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윤리는 사회가 발전하면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따라가질 않고, 우리 것만 지키려 합니다. 그러니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이슈들에 대해 말해도, 고리타분한 19세기 이야기로 치부됩니다. 논외로 쳐 버리니, 함께 더불어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이는 선교적 마인드가 없는 것입니다. 대신 '꾸란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식의 선교적 마인드를 갖고 있습니다. '믿으려면, 믿고 말려면 말아라. 소통하기 싫고, 알고싶지도 않아. 우리가 옳으니 오려면 와' 하는 자세입니다. 그러면 아무도 안 옵니다. 기독교가 스스로 문을 닫고 있습니다."

-인문학을 가미한 설교, 성도들 반응은 어떤가요.

"너무 좋아하십니다. 나이 많은 성도님들도 좋아하십니다. 알고 보면 목사들이 교인들 수준을 너무 낮게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매일 같은 소리를 반복합니다. 그런데 목사가 열심히 공부해서 수준을 높여 설교하면, 다 알아듣고 이해하십니다. 그래서 깜짝 놀랐습니다. 교회가 위치한 동네가 서울 강남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잘 알아듣고, 너무 좋아하십니다.

물론 결론은 성경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고민에 대한 것입니다. 목사의 책무는 교인들이 일상에서 부딪치는 문제들, 개인적 문제들뿐 아니라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서도 성경적인 답을 찾아줘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9세기적 해답이 아니라, 당대의 고민을 함께하면서 문제를 풀어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목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