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과 삶의 무게: 그레이트 헝거(great hunger)에 짓눌린 청춘
8년 만의 신작으로 돌아온 영화계 거장 이창동 감독의 <버닝>은 이미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소설 <헛간을 태우다(納屋を焼く, 1982)>가 원작이다.
단도직입적으로, 이 영화의 주제는 뜻한 바대로 되지 않는 불우한 삶에 대한 청춘의 방황과 분노다. <초록물고기(1997)>, <박하사탕(2000)>이나 <오아시스(2002)> 등 이창동 감독의 대표작 속에서 이미 몇 차례 다뤄졌던 주제다.
그럼에도 매번 새로운 형태로, 시대에 맞게 진화된 형태로 동일한 주제를 세련되게 표현하는 그의 작가적 능력은 대단하다 할 만하다. 감독으로 알려지기 전부터 소설을 집필하던 문인 출신인 덕분인지, 연출력에 있어 대단한 내공을 발휘한다.
그러나 연출력의 대단함과는 별개로, 그의 작가적 정신세계는 때로 관객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일부러 삶의 가장 암울한 공간들만 찾아 파고 들어가는 집요함 같은 것이 엿보인다.
연출력에 미숙함을 보이는 감독들은 암울함을 흥행을 위한 자극제 정도로 활용하는 데 그치지만, 이창동 감독은 그 암울함으로 한국에서 삶을 영위하는 이들의 정신을 관통하는 담론을 이끌어낸다. 물론 그 담론의 방향이 때로 과한 정치적 진보 성향을 보이는 까닭에, 기독교적 입장에서 쉽게 공감하기 어려운 요소들도 다수 목격된다.
어쨌든 현재 <버닝>은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받았으며, 현지 평론가 및 언론인들로부터 상당한 호평을 받고 있다. 이처럼 국제적으로도 작품성을 인정받는 영화가 등장하면, 평론계에는 기묘한 경쟁의식이 불붙는다. 어느 평론가가 더 '맛깔나게' 작품을 분석하고 재해석하느냐를 두고 경쟁이 붙는다. 행여 뒤쳐져 보일까 싶어 전문적이고 현학적인 용어들까지 동원해 가며 자신의 분석을 내세우려 안달하는 모습들이 목격된다.
그러나 본 칼럼은 일반 영화평론이 아닌 까닭에 그런 대열에 동참하려는 의도는 없다. 단지 기독교적 입장에서 철학적 성찰의 도움을 힘입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의 의의를 평가할 뿐이다.
▲<버닝>과 같이 작품성이 뛰어난 영화는 평론가들의 도전정신 및 경쟁심리를 부추긴다. |
<버닝>은 언뜻 난해해 보이는 영화이지만, 이는 겉포장일 뿐이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대부분이 그렇다. 제법 난해한 주제를 다루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실은 그 메시지가 직설적인 것이 이창동 영화의 특징이다. 그리고 이 점이 그의 영화가 가진 매력이기도 하다.
그의 영화는 심오한 메시지를 직설적으로 전달하지만, 관객 입장에서는 장면들 하나하나에 깃든 소소한 난해함 때문에 이 메시지를 어렵게 발견한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관객 입장에서 왠지 수고스러운 듯한 이런 과정은, 영화 관람 후 제법 오래 기억에 남는 여운으로 변모한다.
<버닝>은 오늘날 이 땅의 젊은이들이 겪는 가치 상실의 문제를 다룬다. 이는 영화의 히로인 해미(전종서 분)가 배고픔의 두 종류, '리틀 헝거(little hunger)'와 '그레이트 헝거(great hunger)'의 의미를 밝히는 장면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작중 해미가 설명하는 바에 의하면, '리틀 헝거'는 물질적 빈곤과 배고픔을, '그레이트 헝거'는 삶의 의미 상실이 유발하는 인생의 참된 의미에 대한 갈망을 말한다.
그런데 <버닝>의 그레이트 헝거, 즉 가치 상실은 단지 젊은이들이 소극적이고 무능해서 유발된 문제만은 아닌 것으로 해명된다. 영화는 젊은이들의 가치 상실이 그들의 가정과 주위 세계로부터 강요되고 있는 현실임을 지목한다.
가정을 이룬 일에 대한 책임감이 결여된 세태, 불안정하고 각박한 청년 고용 실태, 자본의 힘이 선사하는 혜택을 누리는 자가 누리지 못하는 자에게 선사하는 박탈감을 극대화하는 세태 속에서, 오늘날 상당수 청년들이 삶의 의미를 성찰할 기회 자체를 박탈당하고 있다. 혹 운이 좋아 그런 기회를 획득했더라도 이 기회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실마리조차 제시해주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진정한 활용법을 고의적으로 은폐하는 것이 청년들이 직면하고 있는 한국의 현실이다.
▲<버닝>의 히로인 해미(전종서 분).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를 동시에 겪으며 심적인 고통 속에 살아가는 인물이다. |
영화 <버닝>은 일부 청년들이 절박하게 체감하는 이런 부조리하고 부자유한 현실 속에서 어떻게든 돌파구를 마련해 보려는, 그러면서 좌절하는 청년들의 모습을 연쇄살인이라는 제법 진부하면서도 자극적인 소재를 활용해 폭로하고 있다.
◈젊음과 삶의 중심: 인생의 중심 혹은 토대를 박탈하는 시대
영화의 주동 인물 종수(유아인 분)는 '택배 알바'를 전전하는 애달픈 청춘이다. 불우한 가정환경과 그로부터 유발된 경제적 빈곤에 짓눌려 그레이트 헝거를 느낄 마음의 여유조차 갖지 못한 종수는, 택배를 전달한 집에서 어릴 적 동네 친구 해미와 우연하게 재회한다.
해미 역시 카드 빚에 쫓겨 사는 인생이지만, 해미는 종수와 달리 리틀 헝거만 아니라 그레이트 헝거까지 느끼는 인물이다. 해미와 재회 후 둘 사이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종수는 해미가 느끼던 삶의 의미 결여가 주는 고통에 동참한다.
해미는 나름의 방법으로 인생의 중심되는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그러나 그런 해미의 노력은 어떤 측면으로 여전히 통속적이며 참신성 없는 것이다. 해미는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라는 말의 출처가 된 아프리카 부시맨 원주민들의 삶을 '참관'하러 해외여행을 떠난다.
나름 인생의 목적을 찾아보려 한다는 명분이었지만, 실상 며칠 혹은 몇 주에 걸친 겉핥기식 참관만으로 인생의 무슨 심유한 가치를 찾는 방법을 배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해외여행이라는, 그저 남들 다 하는 통속적인 방식으로는 자기 삶의 중심과 토대를 정립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절감한 채, 그저 원주민들이 누리는 삶의 의미 및 가치를 먼발치에서 부러워할 수밖에 없는 자기 처지를 재확인하고 절망하는 과정에서, 해미는 벤(스티븐 연 분)이라는 남자를 만나 종수 앞에 데려온다.
▲아프리카 여행에서 돌아온 해미와 함께 등장한 벤(스티븐 연 분). 그의 등장과 함께 영화는 점차 미스터리 스릴러 국면으로 접어든다. |
이후 종수-해미-벤 사이에 은근하면서도 지독한 갈등이 발생한다.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난 벤은 자신이 가진 물질적 풍요가 선사하는 권태를 극복하고자 자극적이고 퇴폐적인 유희를 즐기는 인물이고, 종수는 사건의 전모를 유추하고 복수를 가한다.
사이코 스릴러 드라마에 등장할 법한 이 음울한 서사를 통해 감독이 말하고자 한 바는 무엇일까? 오늘날 한국의 현실이 남녀 불문하고 삶의 중심적 의미와 가치를 찾을 길을 고의적으로 은폐하고 가로막고 있다는 것을 폭로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일면으로 해미는 절망 속에 살면서도 그 절망을 감지조차 못하는 둔감한 생을 살아가는 종수로 하여금 자신의 절망스런 처지를 분쇄할 당위성, 삶의 중심을 찾아야 할 희망의 당위성을 일깨워주는 빛과 같은 존재다.
그러나 종수에게 일말의 빛이 되어주는 해미조차 결국 고단하고 무미건조하며 무가치한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고통스러워하고, 여기에 무가치한 삶의 극치를 보이는 벤의 희생양이 된다. 종수는 해미의 실종을 통해 자신이 살아가는 주위 세계가 결코 인생의 중심적 가치를 허용치 않는, 그래서 사람을 절망 가운데 빠뜨리고 절망의 노예로 만드는 세계임을 절감한다.
▲작중 해미는 종수에게 인생의 새 지평을 열어주는, 미약한 한줄기 빛과 같은 존재로 인식된다. |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적 관점으로 보면, 사실 이런 것이 인생이다. 하이데거는 비본래성이라는 개념을 들어 이런 삶의 양상을 규정한다. 인간은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자기 삶의 고유한 의미 및 가치와는 무관한 것에 몰두하며 살아간다. 이런 삶의 방식은 특히 어려서부터 외부로부터 주입된 사상과 학습내용에 의해 강요된다.
그래서인지 삶의 진정한 가능성과 한계, 그리고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자기에게 있어 최대한 고결한 가치를 발견하는 순간은 지극히 희박하다. 그리고 그런 기회가 와도 포착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비본래적 실존에 대한 성격 규정의 요지라 할 수 있다.
이창동 감독은 이런 비본래적 삶의 실존내부적 편재성을 인정하면서도, 한국이라는 특수한 시공간에서는 이 비본래성의 상당 부분이 사회적 압제의 결과물로 확인된다고 영화를 통해 역설한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그가 지니고 있는 1980년대적 정신과 감성이 확인된다.
어떻게든 정도(正道)를 발견하고 개척해야 하며, 이는 사회정의 구현을 통해 일정 부분 달성될 수 있다는 진보 계열 공통의 사고방식이 그의 작품 전반에 녹아들어 있고, 이는 <버닝>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창동 감독은 이처럼 중심적-토대적 가치의 발굴에 대한 갈망과 그것의 절망스런 포기가 인생에 혼재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바로 이런 생각이 그로 하여금 전통적인 기독교적 인생관과 현대 실존철학의 인생관 양면과 충돌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성서를 통해 인간에게 알려진 하나님의 사랑과 계명이라는 절대적 가치의 존재를 의심치 않았다. 물론 이 절대적 가치의 내용과 궁구 방식은 시대와 인물과 신학적 사조에 따라 다변화된 면이 없지 않지만, 어쨌든 각자의 입장에서 확고부동한 절대가치의 존재를 확신한다는 점은 동일했다.
반면 실존철학은 이런 중심적 가치의 존재에 대한 확신을 해체한다. 각 개인의 삶은 명료하게 파악하기 힘든 우연성과 개별성으로 인해 특정한 절대적 가치에 예속될 수 없다는 것이 실존철학의 중심적 메시지다. 이로 인해 실존철학 입장에서 교의에 의해 절대화된 신앙은 회의되고 새로 성찰되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진다.
영화 <버닝>은 감독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양측의 중간 입장에서 양측 모두를 비판하는 동시에 수용한다. 한편으로는 극히 허무하고 중심과 토대가 결여된 인생이라도, 우리 사회가 그로부터 확고한 가치를 탐구할 자유와 기회를 박탈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이로 인해 그의 작품은 1980년대 386세대의 순진무구했던 사회정의에 대한 열망에 깃든 것과 유사한 감성을 표출하고, 이로써 관객에게 묘한 향수와 같은 감정을 느끼게 해 준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극히 가볍고 허무해 도저히 확고한 중심이나 토대 같은 것은 발견할 수 없는, 지극히 역동적이고 불확실한 인생을 있는 그대로 수긍하려는 태도도 엿보인다. 이런 관점에서는 사회정의라는 정치적 이념, 가족애라는 친족적 이념,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계명이라는 기독교적 신앙 등이 헛되고 부질없는, 가상적인 위로의 일환으로 간주된다.
부조리한 정치적 이념의 허상은 <박하사탕>에서, 퇴색된 가족애의 허상은 <오아시스>에서, 왜곡된 신앙의 허상은 <밀양>에서 각기 중심적으로 비판되고 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들. 당위성과 임의성 사이의 모호하고 중의적인 태도로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조명한다. |
사실 이런 중의적 태도는 향수와 비판의식의 조합을 통해 관객들에게 상당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는 점에서, 영화적 장치로서는 손색이 없다. 그러나 종교적이나 철학적 관점으로는 일종의 혼합형 사고방식이라, 그 진면목을 확인하기 쉽지 않다. 일면으로는 인간의 삶을 시시각각 일관되지 않은 방식으로 보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부분적이나마 인간의 삶을 편의 위주로 재단하는 자기중심적 면모가 <버닝>을 비롯한 이창동 감독의 영화 전반에서 확인되는 것으로 사료된다.
그의 작품들이 자의식이 강한 일부 관객들에게 매니아적 인기를 누리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가치라는 측면에서 절대성과 허무 사이의 어느 한 편에 구속되지 않고 마음가는 대로 인생을 판단하는 재미가 그의 작품에 깃들어 있고, 이 점이 자기중심적 가치판단을 선호하는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요인이 되는 듯하다.
이런 판단기준의 자의성은, 사실 기독교적 입장에서든 실존철학 입장에서든 쉽게 수긍하기 어려운, 정체가 모호한 사상에 불과한 것이다.
인생 자체가 역설의 연속임은 분명하다. 그렇다 해서 서로 상반된 입장에 있는 가치들을 별다른 대안 없이 마음대로 취사선택하는 태도는, 부분적으로 고된 성찰을 감내하기보다는 편의 위주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계속>
▲박욱주 박사. |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