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여검사의 고발로 모 전직 검사의 어중간한 세례 간증과 교회의 변명이 비판을 받고 있다. 지난 130년 간의 한국교회사를 세례라는 관점으로 거칠게 간단히 살펴보자.
1. 목숨을 걸고 경건하게 세례를 받다, 1879-1890년
1879년(고종 16년) 초에 두 명의 의주 청년이 만주 우장의 스코틀랜드장로회 선교사 매킨타이어 목사를 찾아갔다. 그들은 친구 백홍준의 부친이 로스 목사로부터 받은 한문 신약전서와 소책자를 2년 이상 몰래 읽어 왔으며 예수교를 더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매킨타이어는 이들을 중국인 교회 초신자 반에 편입시키고, 한문에 능한 한 명에게는 한글 복음서 번역을 맡겼다. 당시 로스 목사는 안식년 휴가로 영국에 가 있었다. 두 청년이 세례를 요청하자 매킨타이어는 한국에서 서학을 하는 것이 알려지면 사형에 처해지므로, "예수를 공개적으로 시인할 수 있는 용기"를 시험하기 위해 고향에 가서 부모의 허락을 받아 오도록 했다.
두 사람 가운데 번역 일을 했던 청년(김진기로 알려져 있음)만 다시 돌아가 1월 말 영구교회에서 매킨타이어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는 생명의 도를 발견했기에 눈보라 천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영구(우장)에서 의주를 오갔다. 한국인 첫 개신교인의 모습이었다.
국내 첫 세례자인 노춘경은 1886년 7월 16일 언더우드 사랑방에서 선교사들이 보초를 선 가운데 목숨을 걸고 세례를 받았다. 이듬해 1월 23일에는 소래에서 신앙 생활을 하던 서경조, 정공빈, 최명오가 서울에 와서 "왕이 목을 쳐도 좋소"라면서 세례를 청원했기에, 언더우드는 알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례를 주었다. 서울에서의 두 번째 세례였다.
갑신정변 후 상해로 망명을 간 윤치호는 1887년 3월 10일 세례를 받고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상오 10시에 삼가 세례를 받다. 이날 하늘은 맑고 날씨는 따뜻한데 바람도 잔잔하고 구름도 걷히어 근일에 제일 좋은 날씨이다. 이날부터 나는 삼가 교를 받들고 주님을 믿을 것을 맹세했으니, 가히 일생에 있어 제일 큰 날이라 하겠다. 감리교회에 가입한 것이다." 그 전에 그는 2주일 동안 세례를 준비하면서 <루터의 전기>를 읽었다.
윤치호는 가짜 교인의 문제를 잘 인식하고 있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합법화하자 교인이 되는 것이 유행했다. 이교도들이 너도 나도 세례를 받기 위해 수 만 명이 떼를 지어 교회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마음으로 기독교를 체험했기 때문이 아니라 머리로 기독교가 우월하다는 것을 셈하였기 때문에 교회로 들어온 것이다. 어차피 세속적 이득을 바라고 개종한 이들에게서 참되고 순수한 기독교 덕목을 찾으려는 노력은 어리석은 일이다."(윤치호 일기, 1890년 7월 25일)
2. 학습 제도와 엄격한 세례로 토착교회를 세우다, 1891-1910년
1890년대부터 교인들이 급증하기 시작하자, 이들을 교육하고 '쌀 신자'를 방지하여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한국(장로) 교회에서는 세례 전 6개월 이상, 대개 1-2년 동안 복음서와 기본 교리서와 교회 생활 안내서로 교육하는 '학습' 제도를 1891년부터 공식적으로 채택했다.
초기에 공부한 주 교재는 네비어스 저, 마포삼열 역, <위원입교인규됴 爲願入敎人規條(1895)>였다. 입교인(세례교인)이 되려는 학습인을 위한 규칙과 기본교리와 교회 생활 모범을 모은 소책자였다.
학습인은 이 책의 내용(예, 십계명, 주기도문, 사도행전, 세례와 성찬이 무엇인가 등)을 암기하고, 우상숭배, 귀신숭배, 조상제사를 버리고, 주일을 성수하고, 바른 직업을 가지고(예, 술장사 그만 둠), 주색잡기(술, 첩질, 간음, 아편 담배, 노름)를 끊고, 믿음의 열매로 전도한 사람이 2명 이상 있어야 했으며, 세례문답에 임했을 때 교리 질문에 바르게 답하고 직접 입으로 신앙을 고백해야 했다. 따라서 이런 엄격한 심사과정을 통과하는 것은 어려웠고, 한두 번 떨어지는 것이 다반사였다.
다음은 1907년 새문안교회 당회록에 나오는 세례문답자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다. 이 페이지에는 6명이 나오는데, 믿는 집안의 한남이(13세)는 3년째 신자로, "잘 믿고 행위 있어" 두 번째 문답을 통과하고 세례를 받는다. 김상옥(24세)는 초신자로 집안이 믿지만 아직 죄를 알지 못해 대기하는 고대인이 된다. 믿은 지 6개월 된 강지수(46세)는 첫 문답에서 "아직 죄를 알지 못해" 역시 고대인으로 남는다.
학생인 이병희(26세)는 믿은 지 9개월째로 유식하고 두 번째 문답이지만 "믿음이 부족하고 주일을 온전히 지키지 않아서" 고대인이 된다. 김광현(52세)은 믿은 지 4개월밖에 되지 않았으나 변호사이고 연장자라 세례문답을 받았고, "아는 것이 부족하나 행위는 있소"라는 판정을 받아 학습반(원입교인반)에 들어간다. 기름장수 최인보(42세)는 3년 만에 첫 문답을 했는데, 역시 아는 것이 부족하나 행위는 있어 학습반에 들어간다.
곧 6명 중 제일 어린 한남이만 세례를 받고, 나머지는 문답을 통과하지 못하고 대기하거나 학습 교육을 받는다.
▲1907년 새문안교회 당회록 내 학습세례문답 기록. |
학습 제도를 시행할 수밖에 없었던 다른 이유는, 급증하는 신자에 비해 목사(선교사)가 적어 제 때에 세례 문답을 할 수 없었고, 시골에 있는 작은 교회들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세례를 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선교사는 대개 자신의 시찰 안에 교회 50-60개를 맡아 봄과 가을에 순회하였으므로, 각 시골 교회를 1년에 한 번 방문할 수 있었다. 그가 세례문답을 할 때에는 몇몇 작은 미조직 교회의 학습인들이 선교사가 방문하는 조금 큰 교회로 와서 함께 심사를 받고 세례를 받고 성찬식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다.
선교사가 방문하기 전, 지역 개교회를 담당하는 영수(안수 받지 않은 개교회의 설교자, 곧 장로가 됨)가 학습인들을 교육시켰고, 이어서 약 10-20개 교회를 담당하는 조사(안수 받지 않은 순회전도사/신학교 졸업 후 목사가 됨)가 미리 간단한 문답을 해서, 선교사가 심사할 후보자를 추렸다.
조사가 추린 후보자는 대개 문답을 통과할 가능성이 높았다. 왜냐하면 선교사는 세례 후보자 개개인을 잘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문답과정은 엄격하고 길었기 때문에 탈락자가 자주 나왔다.
이런 학습제도와 세례 과정은 한국인 지도자들의 자치 능력을 함양했다. 선교사보다 개교회의 영수와 지역을 순회하는 조사가 현지 사정과 개 교인을 더 잘 알고 그들의 추천에 의해 문답, 세례를 거쳐 입교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즉 선교사가 안수하여 세례를 주었지만, 그 사전 작업은 영수나 조사가 처리하고 담당했다.
개교회의 설교와 목회와 치리는 이 지역 자율성(自治)에 의해 실시되었고, 자급, 자전의 원리와 더불어 이 현지 자율성 때문에 한국 개신교가 1895년 이후 급성장할 수 있었다.
아무튼 1세대 교회는, 아프거나 늙어 곧바로 세례를 받아야 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대개 회개하고 신앙을 고백한 후 생활에 신자로서의 열매가 충분한지 관찰한 후 세례를 주었다. 특히 그의 삶과 증언을 통해 믿는 사람이 두 세 명이 있어야 했다. 가족이나 이웃이야말로 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진정 변했는지 알기 때문이다.
3.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다, 1910-1945년
일제 시대 한국교회는 서너 차례 쇠퇴기를 경험하고 위기에 빠진다. 요즘 한국 개신교는 70년만에 처음 쇠퇴기를 경험하기 때문에 갈팡질팡하지만, 1910년대, 20년대, 30년대, 40년대의 쇠퇴기에서 배워야 할 것이다.
일제 초기 한국 개신교를 대표한 인물은 이상재(1850-1927) 선생이었다. 1900년 전후 감옥에서 성경을 배웠으나, 1902년 감옥에 다시 투옥되었을 때 요한복음을 읽는 과정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고 50대 초반의 나이에 세례를 받았다. 고향에 내려가 초가집 교회당을 세우고 전도했다.
이후 1903년에 세워진 YMCA를 중심으로 청년 운동, 민족 운동을 선도했다. 그의 지도로 기독교 민족운동이 힘차게 일어나던 1919-1923년 어간이 한국 개신교의 전성기였다. 이때 "교인이라고 명목만 건 사람을 전부 빼어버리고 오직 세례를 받은 참다운 교인만 20여만 명"이었다. 가톨릭이 약 10만 명이었으므로 참교인은 30만에 불과했다(구자옥, "이상재 시대의 십년," <삼천리>, 1935년 6월호, 44쪽).
그러나 이상재 선생이 돌아가신 지 10년이 될 무렵, 감옥에서 나온 안창호(1878-1938) 선생에게 이목이 집중되었다. 당시 개신교 신자 30만, 재산 수천만 원을 자랑하는 큰 집단이었으나, 사회에서 영향을 미치는 지도자가 별로 없었다. 파쟁으로 사분오열하고 있었기 때문에 월남 선생이 지도하던 옛 황금시대를 모두 동경하고 있었다.
큰 인물이 나서서 국면을 바로잡지 않으면 기독교의 전도는 암담했기에, 안창호 선생에게 기독교 사업에 참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도산은 연약한 몸을 겨우 추스르다가 병사하고 만다("安島山과의 問答 四個條," <삼천리> 1936년 12월). 1938년 3월 도산 선생이 사망한 후 한국교회는 훼절과 배교의 길로 갔다.
▲손석희 앵커의 1월 31일 앵커브리핑 모습. ⓒjtbc 캡처 |
4. 가짜 교인이 양산되다, 1950년 이후
해방이 되고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북한 지역 교인이 대거 남하하고 피난을 오면서, 한국교회는 무정부 상태가 되어, 교단 간 경쟁과 교단 내 분열로 이단이 성장하는 혼란기에 접어든다.
무엇보다 학습제도가 형식적으로 시행되었다. 특히 1950년대 초 포로수용소와, 1970년대부터 군대나 교도소에서 집단 개종과 세례식이 이루어지면서 중간 점검 과정이 생략되었다.
1970년대 삼박자 구원론에 이어, 1980년대 중반 이후 교회성장론이 지배하면서 대형 교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세례반이나 등록자반 4-8주 과정을 시행했는데, 기본 교리 교육에 QT하는 법, 교회 소개 등을 넣어 그 교회에 맞는 신자가 되도록 유도했다.
왜냐하면 비신자보다 다른 교회에서 옮겨온 교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등록자반 교육을 더 중시할 수밖에 없었다. 비신자, 초신자, 기존 신자를 함께 섞어놓고 등록 교육을 실시했기 때문에, 회개나 삶의 변화는 대충 점검했다.
(대형) 교회들이 등록 교인을 늘리는 성장 정책을 지속하자, 교인은 늘었으나 교인과 비교인의 삶이 구별되지 않고, 교회와 세상이 비슷하게 되는 세속화가 가속화되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1년에도 여러 차례 대형 비리와 스캔들이 터졌고, 그곳에는 언제나 목사나 장로들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따라서 세례 교육에서 삶의 변화나 기독교인의 윤리를 강조할 수 없었다. 성수 주일, 주초 금지, 십일조 헌금을 신자의 생활 3대 규범이라고 신조처럼 가르쳤다. 이 세 가지를 잘 하면 장로가 되었으므로, 사회에서 부정부패를 해도 상관이 없었다.
1987년 이후 사회가 민주화되고 변하자 신학교에서 레위기를 강조하고 거룩한 삶을 강조하기 시작했지만, 이미 1990년대 한국교회는 영성과 거룩성을 잃기 시작했다. 숫자에 눈 먼 교권 지도자들은 이를 보지 못하거나 애써 외면하고, 강단에서는 회개의 메시지가 사라졌다.
일제 때엔 이 땅에 소망이 없었기에 "예수 천당"으로 살았고, 6·25 이후엔 가난했기에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가 통했으나, 강남 대형 교회가 늘어난 1990년대에는 교인들의 죄를 덮어주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는 메시지가 교인들을 위로하는 데 급급했다. 몸집만 비대해진 교회 지도자들은 숫자와 돈의 힘에 취해, 호텔에서 회의하고 파티 예배나 하며 세월을 낭비했다. 그 결과가 20년 정체기 후 오늘의 쇠퇴기이다.
과거엔 교회가 '신자'를 만들었으나, 오늘날에는 '교인'을 만든다. 과거엔 예수 믿고 변화된 삶을 보았으나, 오늘날에는 예수 믿기 전 업적을 본다. 그래서 그런저런 교인들이 모인 교회가 관행으로 유지되다 보니, 이런저런 관행으로 업적을 쌓은 자들이 교회에서 교인 행세를 하고 있다.
세례교인에게는 치리가 따른다. 한국교회가 사는 길은 초대 교회 정신과 제도로 돌아가서, 엄격한 세례 문답과 세례 전후 바른 교육을 실시하고, 교인들로 하여금 지속적인 회개와 거룩한 삶을 살도록 권면하고 지도해야 할 것이다. 초신자들의 간증이나 집회를 금하고, 생활의 열매를 충분히 본 후에 간증이나 강의에 세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세례교인의 경우 고백하지 않은 죄가 발견되거나 고발되면, 교회는 그를 권면하여 공개 회개하도록 하고, 사회나 교회법에 따라 응분의 처벌까지 받도록 지도해야 한다. 치리(책벌)와 용서가 조화를 이루는 교회라야 교회의 거룩성이 회복되고 유지된다.
▲옥성득 교수가 강연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
옥성득
현재 UCLA 인문대 아시아언어문화학과의 임동순·임미자 한국기독교학 석좌교수다. 서울대 영문학과와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장신대 신대원을 거쳐 프린스턴 신학교와 보스턴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기독교역사로 학위를 받았다.
저술로는 『마포삼열 자료집』 1-4권(책임편역), 『다시 쓰는 초대 한국교회사』(이상 새물결플러스), 『대한성서공회사』 1, 2권(1993, 1995), 『대한성서공회사 자료집』 전3권(2004, 2006, 2011), 『언더우드 자료집』 전5권(2005-2010), Sources of Korean Christianity(2004), 『한반도 대부흥』(2009), The Making of Korean Christianity(2013), 『첫 사건으로 본 초대 한국교회사』(2016), 『한국 근대 간호역사 자료집』 1, 2권(2013, 2017)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