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극심한 혼란상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서 무슨 역할을 했을까.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소장 박명수 교수)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1일 오후 서울 연지동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 소강당에서 '해방 후 한국정치와 기독교인'이라는 주제로 특별 심포지엄을 통해 이를 탐구했다.
박명수 교수(서울신대)는 이번 심포지엄에 대해 "종교개혁은 유럽의 정치 지형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고, 이는 신대륙 미국에서 오늘의 민주주의를 가져왔다"며 "이 같은 기독교의 정치 참여는 한국에도 전달돼 오늘의대한민국을 형성하는데 기여했다. 한국 기독교는 서재필, 윤치호, 안창호, 이상재, 이승만, 김구, 김규식, 조만식 같은 중요한 정치가들을 배출했다"고 취지를 밝혔다.
박 교수는 "이 같은 기본 전제 아래 해방 공간에서 한국 정치에 기독교가 미친 영향을 연구하고자 한다"며 "해방 공간은 과거 봉건 시대와 식민지 시대를 거쳐 민주주의 시대로 이행하는 격변기였기에, 한국 기독교가 이 시기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라고 전했다.
이승만, 김구, 김규식, 조만식, 함태영, 유재기, 배민수, 김창준, 최문식, 이만규 등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기독교인들은 이미 많은 연구가 진행됐기에, 이번 심포지엄에서는 지금까지 별로 다뤄지지 않았던 각 지방 대표 인물들을 선정해 학자별로 연구했다.
기조강연에서 박명수 교수는 '기도'로 대한민국 제헌의회의 문을 열었던 이윤영 목사의 반탁·통일운동에 대해 소개했다. 이윤영 목사는 해방 후 북한에서 조만식이 만든 조선민주당 부당수였고, 월남 후 이승만과 함께 건국운동에 매진하다 1948년 5·10 선거에서 제헌의원이 됐으며, 이승만에 의해 초대 국무총리로 지명됐으나 선출되진 못했다. 뿐만 아니라 북한 지역에서 감리교를 대표하는 인물이었고, 월남 후 감리교 재건운동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박명수 교수는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미친 기독교의 역할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이윤영을 살펴보는 일이 중요하다"며 "그는 이북 피란민과 기독교를 대표할 뿐 아니라, 이승만의 측근에서 그를 도와 대한민국 정부수립이 가능하게 한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일제시대 감리교를 대표하는 항일운동가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윤영 목사는 1890년 평북 연변에서 태어나 미감리교가 세운 숭덕중학교와 평양숭실사범을 수료하고, 서울 감리교신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운산 광동중학교와 평남 순천 일신보통학교 교장을 지냈다. 순천에 있을 때 3·1운동이 일어났고, 독립운동을 주도하다 평양 감옥에서 1년 6개월 징역을 살았다. 이때 조만식을 만났다.
이후 황해도 백천교회에서 목회활동을 시작, 1929년 진남포지역 감리사 겸 신흥리교회 담임으로 활동했다. 1930년대 초 미감리교와 남감리교가 연합할 때 미감리교에 속했던 그는 남감리교 중심지인 개성지역 감리사 겸 북부교회 담임이 됐다. 1934년 평양지역 감리사로 서북지역 대표 교회인 남산현교회 담임이 됐다. 이때 평양 광성중학교와 정의여고, 요한성경학교와 성림여자성경학교를 설립했다.
이윤영 목사는 1939년 9월 감독선거에 출마했으나, 1차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었음에도 2/3을 넘지 못해 재투표에서 정춘수 목사에게 패했다. 정춘수는 당시 총독부의 조일기독교통합운동에 발맞춰 한일 감리교 통합운동을 주도했는데, 이를 가장 강력하게 반대한 사람이 바로 이윤영 목사였다. 이에 일본과 정춘수 감독의 눈밖에 나 신의주로 갈 것을 요청받았지만, 불복하다 파면돼 남산현교회에서 떠나 고난을 받았다.
해방 후 상황은 역전됐다. 이윤영의 집에는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평양 교계가 과거 잘못을 회개하기 위해 개최한 부흥집회 강사로 초청됐고, 서부연회장에 추대됐다. 해방 후 평양의 주인공은 조만식이었고, 그가 기독교인 민족주의자들 중심으로 주도한 평남건준은 보름 간 평양을 민주적으로 잘 관리했다.
그러나 8월 26일 소련군이 평양에 진주했고, 그들은 이틀만에 건준을 좌우 1대 1로 개편한다. 이윤영은 조만식과 함께 좌익과 싸우는 인물이 됐다. 조만식은 소련의 권유로 민족주의자들 중심의 조선민주당을 창당한다. 기독교 조직을 통해 확산된 평안도 지역 조선민주당은 상승세를 타고 있었으나, 12월 말 신탁통치가 결정되면서 운명이 바뀐다. 소련은 조만식에게 신탁통치안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했고, 이윤영과 밤새 논의한 조만식은 이를 거부했다.
이에 소련은 조만식과 이윤영을 연금시켰고, 조선민주당에서 축출시켰다. 이윤영은 반탁을 주장하는 결의문을 남한에 전달했고, 이것이 북한에도 알려지면서 이윤영은 반공청년 2인과 1946년 2월 7일 평양을 떠나 월남하기에 이른다. 이윤영은 월남하자마자 서북청년들과 38선 철폐대회를 개최하고, 북한의 실정을 알리면서 조선민주당을 남한으로 이전했다. 이후 새로운 정부 수립에 참여하게 된다.
박명수 교수는 "남한에서 이윤영은 이승만의 측근으로 부상했고, 월남민과 북한 기독교의 대표자로서 활동하게 됐다. 이윤영은 남한 사회에서 조만식을 대리하는 인물로서 주목을 받았고, 각종 월남민단체와 행사에서 월남민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게 됐다"며 "월남민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첫째로 북한실정을 남한에 정확하게 알리는 것이었고, 둘째는 38선을 철폐해 통일을 이룩하는 것이며, 셋째는 월남한 이북인들을 돕는 일이었다. 이윤영은 월남민 대표로서 이런 일들을 위해 노력했다"고 했다.
박 교수는 "월남한 이윤영은 이승만 친위단체인 민족통일본부에 가담해 중심인물이 됐다. 특히 1947년 1월 김구가 이승만의 우익세력을 자신의 세력 아래 두려 했을 때 이윤영은 배은희와 함께 이것을 막았고, 그해 5월 재개된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우익단체들의 연합체인 임시정부수립대책위원회 대표로 이승만 입장을 대변하는 인물이 됐다"며 "이런 공로로 이윤영은 해방정국의 가장 큰 단체인 독립촉성국민회의 부위원장이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윤영은 월남한 이북인으로서 원칙적으로 38선의 철폐와 남북 통일정부를 지지하지만, 현실적으로 이것이 소련의 반대로 어려워졌기 때문에 보통선거를 통해 남한에 독립정부를 세우고, 이 독립정부를 근거로 남북통일을 추구해야 한다는 이승만의 입장을 적극 지지했다"며 "좌익은 이런 이승만의 주장을 남북을 분단시키는 단독정부 수립이라고 비판했지만, 이윤영은 북한이 이미 임시인민위원회를 만들어 남북을 분단시킨 상황에서 남한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민주적 통일을 위해 가장 현실적 입장이라고 반박했다"고 밝혔다.
박 교수는 "이승만은 이윤영을 조만식을 대리해 북한을 대표하는 인물로 이해했고, 따라서 이윤영을 우익의 각종 단체의 핵심요직에 등용했다"며 "이윤영은 이승만의 핵심조직이던 민족통일총본부의 중심 인물이고, 이승만과 함께 대한민국 수립에 결정적 공헌을 한 독촉국민회의 핵심인물이었다. 이런 점에서 이윤영을 대표로 하는 월남인과 월남 기독교인들은 이승만의 대한민국 수립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이후 이은선 교수(안양대)가 '배은희 목사(전북)의 건국활동'을 주제로 기조강연을 전했다. 또 임희국 교수(장신대)가 '1945-1948년 대구지역 기독교 지도자들의 정치참여', 박창훈 교수(서울신대)가 '종교개혁과 기독교의 정치참여', 김권정 교수(대한민국역사박물관)가 '해방 후 박용희(서울)의 정치 참여와 정치단체 활동', 김정희 교수(서울장신대)가 '이남규와 전남지역 기독교', 허명섭 교수(서울신대)가 '해방 후 한국정치와 조남수 목사(제주)', 이영식 교수(총신대)가 '해방 정국 충북지역 기독교인의 활동', 장금현 교수(서울신대)가 '해방 정국에서 김창근 목사와 충남·대전 지역의 정치', 서영석 교수(협성대)가 '해방 후 이규갑과 서울 지역 기독교 정치 활동', 이상규 교수(고신대)가 '해방 전후 윤인구의 경남 지역에서의 활동'을 각각 발표했다.
이번 심포지엄은 한국교회연합(대표회장 정서영 목사)이 주최하고 한국정치외교사학회(회장 조성환 교수)에서 공동주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