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향력이 적은 이단과 영향력이 큰 이단
이단 문제 전문가들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재림예수'로 자처한 인물은 약 50명에 달한다고 한다. 박태선(전도관, 1990년 사망), 구인회(천국복음전도회, 1976년 사망), 안상홍(하나님의 교회, 1985년 사망), 조희성(영생교, 2004년 사망), 문선명(통일교, 2012년 사망)과 같이 지금은 현존하지 않는 인물 외에도 신천지, JMS(기독교복음선교회) 등 여전히 많은 유사 기독교 단체는 자기들의 교주를 재림예수 혹은 보혜사 혹은 여타의 신적 존재로 추앙하며 신앙생활을 영위한다.
상기 집단이나 인물들이 우리 귀에 낯익은 것은 그만큼 사회에 끼친 폐해가 크다는 뜻이고, 또 그만큼 큰 폐해를 끼칠 수 있었던 것은 이단 가운데서도 다름 아닌 경전(text)을 쓰는 이단이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러나 그 파급력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경전이 대개 비유풀이나 상징풀이로 재구성된 교본에 지나지 않고, 또 거기 활용된 은유도 유치하고 정통하지 못한 까닭에, 대부분 (문학적) 소양이 떨어지는 사람 정도가 넘어가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이단 공동체에도 지식인이 입교인으로 존재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2. 저열한 은유와 정통한 은유
그렇다면 정통한 은유란 무엇인가?
이를테면, 신천지는 비유풀이로 유명하다. '씨=말씀', '밭=사람 마음/교회', '나무=사람', '가지=제자', '잎=전도자', '바다=세상', '어부=전도자', '그물=말씀', '고기=성도', '배=교회'..., 수도 없이 많은 이들의 비유와 상징 중에는 기독교에서 전통적으로 쓰던 것들도 있어 대략 난감할 때가 많다.
비유, 곧 은유라는 것은 유에서 종으로, 종에서 유로, 혹은 종에서 종으로 유에서 유로, 특히 전혀 다른 유와 종으로 옮겨 갈아태우는 일종의 권능이다. 가령 '디오니소스의 잔'과 '아레스의 방패'라고 했을 때, 오로지 소양을 갖춘 인간만이 '디오니소스의 방패'라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
이때 '디오니소스의 잔'에 속한 무리는 '디오니소스의 방패'로 건너오는 것이다. 같다고 유추하기 때문이다. 다만 신천지 같은 이단들은 이 대역폭이 얕다. 다른 말로 하면, 제 아무리 사회적 지위가 높은 지식인이라도, 이 대역폭이 낮음으로 인해 저런 이단의 입교인이 되는 것이다.
유대교 경전(Torah)인 동시에 기독교 경전인 구약성서 39권과 신약성서 27권 역시, 상당 부분이 저와 같은 은유와 비유로 구성되어 있는 게 사실이지만, 정경인 이 문집에는 그 은유와 비유의 균형을 꼭 붙들어 주는 책 한권이 있다. 바로 로마서다.
역사, 서사, 시... 성서의 다양한 장르 중에서도 서간의 형식을 띤 이 문헌은 편지로 된 직설의 언어 즉, 실존적 삶의 언어로 되어 있기에 역사적이지만, 그 저변의 신구약을 관통하는 은유와 비유는 그 삶의 언어를 천국으로 이행시키는 권능이 된다. 이는 상기 이단들이 로마서를 결코 읽어 내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과연 이단 중에 로마서를 읽어 낸 집단이 있던가?
▲로마서의 구조. ⓒ이영진 교수 제공 |
3. 로마서가 가져다주는 균형
통상 은유와 비유의 큰 단위를 통칭하여 알레고리라 부른다. 알레고리 자체가 나쁜 건 아니다. 교회가 교부시대에서 중세로 진입하기까지, 지적 수준이 낮은 회중과의 요긴한 커뮤니케이션의 방도가 돼 주었다. 이 과정에서는 버려진 알레고리들도 있다. 이단이 된 것이다.
그들은 세 가지 '단절'을 특징으로 갖는다. 그러나 로마서는 그들과 반대로 이들 세 가지가 단절되지 않은 상태로 보전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세 가지는 세상 모든 이단이 로마서를 읽어내지 못하는 교착점인 셈이다. 그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해석이 단절된 알레고리
-역사가 단절된 알레고리
-삶이 단절된 알레고리
따라서 이제 이 '단절'된 세 가지가 로마서에는 어떻게 보전되어 있는지, '연결'의 관점에서 살펴보자. 우선 로마서가 지닌 틀/구조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2, 3, 4항이 가장 중요).
1) 해석이 연결된 알레고리
로마서는 위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세 종류의 죄를 적시한다. '인간이라는 죄', '도덕적인 죄,' '유대인의 죄(율법 안에서의 죄)'. 과연 이들 세 종류의 본원적인 죄를 체험하고 회개하는 이단이 있던가?
특히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이라는 죄'다. 모든 사람의 죄, 즉 원죄를 말하는 것이다. 원죄는 정통의 기독교인조차 신화화에 그치는 경향이 있다. 체험할 수는 없지만 저 멀리 태곳적부터 있어온, 단지 교리적인 죄라는 것이다. 이러한 신화화된 교리를 로마서는 지지하지 않는다. 우리는 원죄에 대해 충분히 인격적으로 접근할 수 있고, 또 회개할 수 있음으로써 이단이 아닌 것이다.
실상은 이 원죄에 대한 체험과 회개만이 바로 예수님과 직결되는 통로이기도 하다. 우리는 대개 자신의 자범죄를 통한 유추로 예수님을 인격적 만남으로 유인한다. 그러나 로마서는 선행된 아담의 죄를 통해 예수님과의 관계를 추인한다. 아담을 만난 적 없기에 이것은 분명 은유의 형식을 띠지만, 반드시 우리의 자아는 예수님의 자아와 만나도록 지음 받았다.
자신의 자아에 직면하지도 않고서 어떻게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겠는가. 이단은 자아를 마비시키는 것이지, 로마서처럼 자아를 깨우는 것이 아니다. 자아를 깨울 때 우리는 이 '처음 죄(Original Sin)'에 대한 회개와 더불어 예수님과 만난다. 아담이 된 것이다. 로마서 5, 6, 7장이 그것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단은 아담으로서 자아를 해석해주지 않는다.
2) 역사가 연결된 알레고리
우리가 아담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는 근거로 제시된 역사적 은유가 있다. 바로 '유대인의 구속' 형식이다. 은유인 동시에 역사로서 제시된 이 유대인의 구속사는, 예수님을 통한 인류 구원의 은유인 셈이다.
왜냐하면 유대인이 (믿음으로) '아브라함 안에서(In Abraham)'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은 (은유) 덕택으로, 우리 모두 (믿음으로) '예수님 안에서'(In Christ) 끊어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유의 총화라는 것이다. 은유는 수식이 아니라 권능인 셈이다. 이러한 권능으로 인해 모든 인류는 '아담 안에서(In Adam)' 죽은 바 될 수도 있었다. 이 역사적 사실을 이단은 밝힐 능력이 없다.
3) 삶이 연결된 알레고리
이러한 구속의 이행을 통해 얻은 '칭의(성화)'와 '자유' 그리고 '성령의 법'을 영위하게 되었지만, 이 은유의 완성은 로마서 저자 자신의 통렬한 비토(veto)에서 맺힘이 있다. 인류의 유일한 구원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동족을 버리지 않겠다는 이 비토는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로 읽히지만, 실상은 이 복음의 해설자 바울의 자의식의 맥락이기도 하다.
수많은 이단이 자기 집단에 가입하지 않는(자기네 교주를 영접하지 않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지 못한다면서 심지어 가족과도 이간을 시키는 것에 비하면, 전면적으로 다른 대목인 것이다. 이것이 이단들은 로마서를 읽을 수 없는 최종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퀴어축제 부스 중 한 곳에 놓여있는 '한백신학교실' 강의안. '퀴어신학'이 나타난다. ⓒ크리스천투데이 DB |
4. 그리고 퀴어신학
참고로 성서 전통을 파괴하는 이 시대의 이단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소위 퀴어신학 역시 은유를 구사한다. 이를테면, '예수의 옆구리(구멍)' 상처는 '여성의 성기' 라고 한다든지, 예수의 몸에서 (여성처럼) 피와 물이 나왔다고 은유한다든지, 도마에게 '손가락으로 넣어보라' 등....
일반 기독교인에게는 신성모독과 음란으로 여겨지겠지만, 이 류(類)와 종(種)에 속한 자들은 실로 구세주의 은유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동안 '아레스의 방패'에 전용되던 텍스트를 한 방에 끌어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천지에는 다소 (소양이) 떨어지는 사람이 넘어가지만, 동성애를 지지하는 신학에는 비교적 지적인 계층이 넘어가기도 하고 지원도 아끼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앞서 요약했던 세 가지의 단절, 즉 로마서에서 연결짓고 있는 '해석', '역사', '삶'의 알레고리에서 완전히 단절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어떤 이단보다도 '이단'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로마서는 친동성애 신학에 있어 가장 걸림돌이 되는 책이기도 하다.
이영진 교수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 전공 주임교수이다. 그는 다양한 인문학 지평 간의 융합 속에서 각 분야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도, 매우 보수적인 성서 테제들을 유지해 혼합주의에 배타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신학자로, 일반적인 융·복합이나 통섭과는 차별화된 연구를 지향하고 있다. <자본적 교회(대장간)>,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홍성사)>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