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효 목사
장재효 목사(서울 성은교회)

안식일에 예수님이 바리새인 두령의 집에 초대받아 가셨습니다. 초대한 그 집 주인은 예수님을 존경해서도 아니고 은혜받기를 기대해서도 아닙니다. 단지 예수님이 어떤 사람인지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초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집에 들어가니 고창병 걸린 자가 있어 마음이 안타까우셔서 그를 고쳐 보내시며 바리새인들에게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셨습니다.

이것은 육신이 멀쩡한 바리새인의 두령이나 그 집에 초대된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이 고창병에 걸린 자는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로 안식일이라 하더라도 서둘러 고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반대로 바리새인들은 율법주의적 의식에 사로잡혀 교권행세만 일삼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시행하고 계시는 은혜계약의 성취라는 사랑의 은혜시대를 분별하지 못하기에 그들의 영적인 소망은 아직도 어두움에 사로잡혀 있다는 지적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또 다른 교훈을 의도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날 초대받아 그 집에 모여든 사람들은 그 주인이 바리새인의 두령이었기에 주로 바리새인이나 율법사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그 당시 스스로의 지위나 명분을 사회적 지도층 인물로 자처했기에 초대를 받아가면 의례히 자신들은 상석에 자리를 잡아 앉는 것으로 생각했기에 그날도 서로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했습니다.

그것을 보신 예수님은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좌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저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말석으로 가게 되리라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14:8-11)”고 교훈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말씀하시길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눅14:12-14)” 하셨습니다.

우리들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도 셈을 합니다. 자신에게 더 유익한가를 따지고 그 셈에 따라 투자하며 살아가는 처세꾼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이너스(-)에 마이너스(-)를 더하는 것이 곧 플러스(+)라는 교훈을 주십니다. 세상 조건으로 허락받은 모든 여건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십자가 너머에 영원히 저축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6:19-21에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새인의 두령은 이 세상 조건이 자기의 자랑거리이며, 기대할만한 것으로 여겨 세상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대접을 받으며 행세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적으로 지위를 갖추고 부유한 사람들을 청해서 자신의 수준을 그 사람들의 지위에 곁들여 더 높여 보여지기를 시도했던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14의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는 바울의 고백과 같은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것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의 확신이 없이는 천국에 대한 기대를 목적으로 행동할 가능성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갚을 능력이 없는 자들을 청하라는 말씀에 어떤 사람이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했습니다. 이것은 무심코 던진 말이겠지만 예수님은 이것을 설교 재료로 삼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고는 그 종을 보내어 잔치준비가 다 되었으니 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결같이 세상조건을 핑계하며 사양을 합니다. 이에 주인은 화가 나서 그 종에게 이르기를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고 합니다. 종이 말씀대로 했지만 그래도 빈자리가 많다고 전하니 그 주인은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초대장을 보낸 자들은 혈통적 이스라엘 민족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의 초대에 불응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길에 다니며 누구든지 청하여 오게 하는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말하는 이방인들입니다. 이제는 때가 임박했기에 강제적으로 끌고 오더라도 내 집을 채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악하고 선함을 스스로 구분하지 말고 그 사람의 형편, 처지에 상관없이 강권하라 하십니다. 영을 살피시는 예수님 심정의 기준은 지위의 높고 낮음이나, 유식과 무식의 차별이 없으며, 부유함도 가난함도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신 선교사명입니다. 누가복음 14:24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는 말씀은 처음에 복음으로 초청하셨을 때 순종하는 믿음의 지혜는 하나님의 자녀된 자격으로 그 집에 참여할 수 있었지만, 세상적 기대와 꿈에 도취되어 속물근성을 버리지 못해서 하나님의 복음을 사양함으로 주어진 기회를 다 놓치게 되면 다시는 그 기회를 얻을 수 없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 너머의 천국을 바라보지 못하고 눈앞의 세상조건만 생각하다가 결국 바깥 어두운 곳에서 슬피 울고 이를 갈며 후회하는 신세가 되고 말 것이라는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는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전도의 적극성을 띄기를 원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도 전도의 사명감으로 불붙어야 나가서 뜨겁게 전도할 수 있습니다. 영적 내세소망의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천국에서 예수님 앞에 서게 될 그날의 내 입장을 목적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 조건으로 열심히 복음 전하며 살면서 천국에 보물을 쌓아두는 자의 모습으로 전도할 때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하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입으로는 늘 천국 복음을 말하지만 생활하는 것은 세상조건의 더 나은 것을 바라는 모습만 보인다면 오히려 전도의 역효과를 남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생활전편에서 천국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 천국을 위해 사는 모습이라도 보여주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