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21:12-13
12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이장렬 교수(미드웨스턴침례신학대학원 신약학)
이장렬 교수(미드웨스턴침례신학대학원 신약학)

거듭 제자들을 다시 찾는 부활 예수의 은혜로운 방문으로 (21:1, 14 참조) 이제 제자들 가운데 예수 부활에 대한 확신이 자리 잡는다.

제자들이 주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요21:12)

그들은 이제 부활하신 주님을 거듭 들었고, 눈으로 주목했으며, 손으로 만졌다 (참조요일 1:1; 요20:19-23, 20:24-29; 21:1-14). 다소 신학적인 표현을 사용하자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들의 스승 예수와 부활하신 그리스도 사이의 연속성에 대한 확신이 이제 제자들 안에 뿌리내렸다!

부활의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을 아침 식사로 직접 초대하신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21:12).

다시 사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밥상을 친히 챙겨주신다. 이 밥상은 아마도 제자들이 고기를 잡는 동안 주님께서 미리 준비해 두신 듯하다. 왜냐면 베드로가 가서 주님의 도움으로 잡은 생선을 가져오기에 앞서 이미 숯불 위에 생선이 놓여 있었고 떡도 함께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21:9-11). 이 특별한 날의 아침 메뉴는 떡과 생선이다 (21:13).

떡과 생선의 조합은 자연스럽게 오병이어 사건을 회상시킨다 (요6:1-14). 요한복음 6장의 오병이어의 기적과 요한복음21장의 아침 식사 모두 디베랴 바닷가에서 벌어진 일인데, 사실 신약성경에서 “디베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은 이 두 사건뿐이다 (요6:1 & 23; 21:1).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떡과 생선으로 풍성히 먹여주신 사건이 “디베랴” 바닷가에서 일어났다는 저자 요한의 기록은 자연스럽게 이날의 아침 식사를 오병이어의 기적과 중첩시킨다. 부활 주님과 함께 하는 식사는 오병이어적 잔치다. 예수의 제자들이 부활의 공동체로 모여 성령을 그 가운데 모시고 사랑과 연합의 식사를 나눌 때마다 그 식사는 오병이어의 기적 같은 잔치가 된다.

남자만 오천 명이나 되는 큰 무리가 다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을 정도로 풍성하게 군중들의 필요를 공급하셨던 주님께서 이날 아침 미리 아침 식사를 준비해 두신 데다가 제자들이 먹고 충분히 남도록 153마리의 큰 물고기들까지 포획하게 하셨다. 밤새 노동에 지치고 허기진 제자들을 그렇게 풍성하게 먹이신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친히 공급하실 것이다. (물론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들은 아니지만……)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필요 역시 풍성히 공급하신다.

주님께서는 잠시 후 베드로가 주님의 양을 돌보는 사역을 하도록 세워주실 것이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 내 양을 먹이라! (21:15-17)

그러나 그에 앞서 먼저 베드로를 먹여 주신다.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21:13)

오병이어 사건 때는 주님께서 제자들을 통해 군중을 먹이셨다 (요6:11; 눅9:16 및 공관복음 병행구). 그러나 부활 후 제자들을 세 번째로 만나 주신 이 자리에서는 주님께서 제자들을 먹이신다. 제자들은 사역자의 모드로 아니라 부모의 돌봄과 공급함을 경험하는 어린아이가 되어 주께서 친히 먹여주심을 경험한다 (참조: 요21:5 [“얘들아”]). 베드로와 친구 제자들은 주님의 전적인 사랑과 은혜로운 공급을 경험한다. 우리의 사역은 주님의 은혜로운 공급 없이는 결코 존재할 수도 그리고 지속될 수도 없다. (껍데기는 유지 될 수 있을는지 몰라도 속은 절대 그렇지 않다!) 이날 아침 베드로와 제자들이 그랬듯, 우리 역시 먼저 주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양식을 받은 먹은 후에야 다른 이들을 먹일 수 있다.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우리는 부활의 몸에 대해 생각할 때 종종 과도하게 영적으로 (hyper-spiritually)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부활의 몸이 마치 이 세상에서 완전히 유리되고 분리된 실체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 말이다. 아울러 “영성(spirituality)” 그리고 “영적(spiritual)” 같은 개념에 대해서도 극단적인 이원론적 접근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말씀과 기도는 거룩하게 생각하지만 (이것은 물론 옳다!), 일상의 삶은 열등하고 심지어 죄악된 실체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복음 21장에 따르면, 부활하신 주님은 영광의 몸을 입으셨으되 결코 과도하게 영적이시지 (hyper-spiritual) 않다. 부활 후 제자들을 세 번째로 만나주신 주님은 밤샘 노동으로 지친 제자들에게 친히 아침 밥상을 차려 주신다. “내가 부활의 몸을 입었는데 너희 하찮은 끼닛거리 챙기는 일이나 신경 쓰게 생겼니?”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내가 영광의 몸을 입었는데 너희 일상의 일들이나 챙겨주게 생겼니?”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제자들의 필요와 고민을 친히 헤아리시고 그들의 삶의 자리 바로 거기서 친히 그들을 만나주시고 도와주시고 공급해 주신다.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시며 제자들의 발을 친히 씻기셨던 예수님이 바로 부활의 주시다. 십자가에서 제자들의 죄를 그리고 세상 죄를 대신 지셨던 그 예수님이 바로 영광의 그리스도시다. 예수님은 영광의 몸을 입으신 후에도 겸손히 제자들의 밥상을 챙겨 주시는 섬김의 구주시다. 예수님은 너희 중에 가장 위대한 사람은 섬기는 자라는 가르침을 부활의 몸으로 이렇게 친히 보여 주신다 (막10: 35-45 참조). 우리가 믿고 따르는 부활 예수가 그런 분이라면, 필시 참된 제자도란 일상의 삶에서 하루하루 그분의 사랑의 섬김을 좇아가는 것이리라.

영적인 삶이란 결코 일상을 회피하거나 적대시하는 게 아니다. 영적인 삶이란 매일 삶의 한복판에서 크고 작은 도전들을 직면하면서 성령의 인도 하심을 따라 한 발짝씩 앞으로 내딛는 것이리라. 그리고 그 가운데서 십자가와 부활의 주 예수님처럼 내 옆에 있는 이들을 겸손으로 그리고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리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요21: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