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적 강해설교가인 박영선 목사(남포교회)와 김관성 목사(행신침례교회)가 대담집 <직설(두란노)> 출간을 기념해 26일 오후 서울 서빙고동 두란노서원 강당에서 북토크를 개최했다.
북토크는 책에서처럼 김관성 목사가 질문하면 박영선 목사가 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김 목사는 사전에 SNS 등을 통해 다양한 성도에게서 질문을 접수했다. 북토크에서 나눈 주요 문답 중 성도 개인들에 대한 내용들을 먼저 게재한다.
-하나님의 일하심과 사랑을 알고 성숙한 삶을 살더라도, 우리 삶은 많은 경우 기대와 다르게 나타납니다. 인생을 돌아보실 때, 현재의 자리로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평생 목사님과 함께 일하고자 하신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질문의 뜻을 압니다. 예수 믿으면서 가장 힘든 부분은 '신앙생활이 이해할 수 없더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분명한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하지만 조금 지나면 그 행복이 만족에서 의심으로, 모호함으로 더 진전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하심과 목적하신 영광과 승리로 데려가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물건으로 주어지지 않고, 각각의 인격과 실존에 담아내져야 함을 알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에 덜 소개되고 있는 것은, 그것을 이루시는 방법이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싫지요. 보통은 이를 잘잘못의 문제로 생각합니다. 욥기에 나타나는 가장 큰 주제이기도 합니다. 욥은 잘못이 없는데, 친구들은 그가 잘못했다고 합니다. 그가 벌을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벌은 고난입니다. 욥은 이해할 수 없지요. 잘못 없이 고난을 당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친구들은 '네가 잘못이 없는데 고난을 받고 있단 말이냐? 그 말을 하는 것만 봐도 넌 틀렸다'고 합니다.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는데, 끝에 누가 옳은 것이었습니까? 욥이 옳다고 하십니다. 욥기의 시작은 '욥은 의인이다' 입니다. 욥은 우리가 아는 이분법적 이해에서는 답이 없는 자리에 갑니다. 우리의 기대와 상상력을 깨시는 것입니다. 무산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더 크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에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3-4절)', 무시무시한 말씀입니다.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11절)',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 있으면 환난이 옵니다. 도전이 옵니다.
<톰 소여의 모험>이라는 소설을 아십니까? 톰이 제일 부러워하는 친구는 허클베리 핀입니다. 그는 고아입니다. 학교에 안 가도 됩니다. 금방 알아들으시네요(웃음). 허클베리 핀이 가장 부러워하는 것은 톰입니다. 학교에 가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톰은 학교에 다니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누가 보냅니까? 부모가 보냅니다. 왜 보내지요? 훌륭해지라고 보냅니다. 고생하라고 보내지 않습니다. 고난이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것을 놓치면, 계속 '뭘 잘못했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서 형통해질 수 있을까?' 하나님이 의도하지 않은 문제로 계속 나갑니다. 한국교회가 여기까지 나가야 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본다고 정의할 수 있지만, 그 하나님의 실체가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앙이 단순한 종교가 되지 않고 예수님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삶의 자리로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요. 목사님의 표현대로 삶의 밀림을 헤치고 걸어가다 보면, 정말로 답이 나오는 것인가요.
"이런 질문들이 현실입니다. 우리가 사는 인생, 처한 상황, 이를 제가 자주 쓰는 말로 '콘텍스트(context)'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그것이 있습니다. 창조와 죄가 같이 있습니다. 우리 개인을 보십시오. 모두 창조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창조와 죄가 같이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콘텍스트입니다. 여기서 무엇을 보게 하십니까? 창조와 죄를 비교해 보게 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세상은 하나님 없이 죄만 보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곳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 들어왔지만 콘텍스트를 통해 죄가 들어왔음을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계속 물으십니다. 죄가 만드는 것과 하나님께서 만드는 것의 차이를 직접 겪어 보라. 하지만 우리는 '안심'을 확보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자존심을 지키고 손해 보지 않으려 합니다. 우리는 기껏 해야 '고통을 겪지 않는 것'이 전부이지만, 하나님은 이 둘을 대조시킴으로써 창조의 그 영광을 나타내시고 그것이 우리의 실체가 되게 하십니다."
-책을 읽은 여러 분들에게 '최고 어록'을 뽑아달라고 했더니, '삶은 be동사+p.p', 즉 수동태라고 하는 말씀을 꼽았습니다. 40대 이상에게는 가슴을 확 울리지만, 젊은 세대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하는데요.
"옛날 분들이어야 알아들을 표현밖에 없는데.... '팔자야', 금방 알아듣겠지요(웃음). '팔자'라는 말을 왜 그렇게 많이 했을까요? 내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묶여 있습니다. 제한 속에, 가장 크게 시간과 공간의 제한 속에 있습니다. 미래로 다녀올 수 없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밖에 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할 거야 말 거야?'라고 묻습니다. 굉장히 자유로운 것 같지만, '학교 갈 거야 말 거야?'라고 하면 제한으로 다가옵니다. 가능성이나 미래 같은 말은, 아무것도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웃음). 인간의 가치와 궁극적 운명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기대하고 만들어내고 할 수 있는 것보다 크다는 성경의 약속입니다.
그것이 매일 와서 우리를 붙잡습니다. 붙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붙드심, 그것이 가장 큽니다. 붙드신다는 것은 쓰러지는 걸 붙잡는다는 뜻이 아니라, 끌고 나가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진하는 길이 아니고, 옳은 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후회와 자책을 만들어내고 계시지 않습니까."
-수동태의 삶일지라도, 젊은이들이 이 시점에서 능동적으로 시도할 만한 일은 무엇이 있을까요.
"젊은이들은 막연하게 꿈을 갖고 가능성에 관해 이야기하지만, 선택의 폭 자체도 '수동태'입니다. 그들이 본 것 속에서만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른이 있어야 합니다.
제 젊은 날을 돌아보면, '어른'이란 '저분 같이 해야지'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저분 같이 하지 말아야지'도 있었습니다. 둘이 같이 일하는 것입니다. 잘나서가 아니라 먼저 태어나서 어른입니다.
처음엔 모든 걸 다 잘할 수 있을 것 같고 나는 안 그럴 것 같지만, 한 개인의 제한 속에서 책임이라는 것을 서서히 깨닫습니다. 제한이란 내가 이것도 저것도 그것도 되는 것을 제약받는 게 아니라, 구체적으로 무언가가 되는 것입니다. '나'를 사십시오. 나와 너가 합쳐서 우리가 되지만, 그래서 '나도 너도 없는 제3의 존재'가 아니라, 내가 너를 끌어안고 네가 나를 끌어안는, 내가 있어야 너와 나의 구별이 있고 우리라는 말을 만드는 각각의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대답'을 잘하셔야 합니다. 정답을 이야기하는 게 다가 아니라, 여러분이 할 수 있는 답을 하십시오. 이런 말씀들을 많이 하셔야 합니다. '미안해, 그건 나도 몰라, 살아봐야 해, 더 열심히 살아 봐, 네가 스스로 너 자신에게 물어 봐, 답을 찾기까지 타협하지 마'."
-좀 예민한 질문인데, 동성애자가 주일예배를 드리러 찾아온다면 함께 예배드려야 할까요.
"예배에는 아무도 제한을 둘 수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잡으러 온 사람이라도 놔둬야 합니다. 동성애자가 오면 받으십시오. 예수를 믿고 예배를 보겠다는 것을 다 허락하십시오.
동성애는 오해받고 있는 것 중 하나입니다. 결혼은 남성과 여성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셨습니다. 다르게는 부부가 될 수 없습니다.
동성애가 현실이니 합법화해 달라는 것은 잘못된 요구입니다. 그것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죄는 안 되지요. 죄는 누구나 짓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짓기 때문에 합법화할 수는 없습니다. 거짓말이 죄인 것을 누구나 압니다. 죄책감을 가져야 하고, 잘못이라고 못 박아 놔야 합니다. 그래야 질서도 분별도 회개도 할 수 있습니다.
동성애가 있는 것이 현실이고 그것 때문에 잡아 죽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죄로 못 박아 놓아야 합니다. 지금 동성결혼 합법화로 초점이 옮겨가서 마치 이를 찬성하는 사람은 관용의 표본인 것처럼 돼 있는데, 그건 동서남북을 바꾸자는 이야기처럼, 옳고 그름을 없애자는 것처럼 지나친 이야기입니다. 이는 화를 내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 믿어서 좋은 것이 많지만, 하나만 고르라면 무엇일까요.
"저는 테니스를 좋아하는데, 가장 많이 생기는 싸움이 '인이냐 아웃이냐'에 대한 판정입니다. 아마추어 게임에는 심판이 없어서 자기 코트에 떨어지면 자기 쪽에서 콜을 해야 하는데, 다 우깁니다(웃음). 우리의 잘난 점은 '상대방에게 져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져 줄 수 있는 이유는, 아마추어 게임이기 때문입니다. 이기더라도 윔블던에 나가는 게 아닙니다. 재미있게 치면 됩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있어, 영화 제작이나 흥행을 바라시는 게 아닙니다. 역할을 맡아 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역할을 하십시오. 명연기를 하십시오. 그런데 여러분이 자꾸 제작에 참여하려 합니다. 영화를 성공시키고 예술성을 높이려 하는데, 그건 감독과 제작자가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기 역할을 하시면 됩니다.
예수 믿고 가장 재미있는 것은 '져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환갑이 돼야 압니다(웃음)."
-하지만 가까운 사람일수록 져 주는 게 어렵습니다.
"질문을 확대해서, 오늘 모인 최고의 유익을 하나 나누겠습니다. 상대방이 이야기하면, 들어 주십시오.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들어 주십시오. 해설과 심사를 하지 마십시오. 넋두리를 하는 겁니다. 적당히 추임새만 넣어 주시면 됩니다. '그랬구나, 그랬구나, 그랬구나.'
'너 왜 그랬어?' 이렇게 말하는 건 죄입니다(웃음). 상대방은 편을 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아무에게나 그러겠습니까? 편들 사람이니 하소연하는데, 우리는 꼭 낚아챕니다. 억울한 일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것을 잘라서 더 극적인 경우를 증언하는 것, 아주 나쁜 짓입니다.
가까운 사람들 만나고 집에 돌아오면, 왜 만났을까 늘 후회가 듭니다. '저 웬수를 내가 왜 만났을까? 내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내가 하는 말마다 반박하고 지랄 떨고...', 그나마 그 사람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