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급제의 꿈을 안고 한양으로 향하던 자들이 꼭 지참했던 필수품이 있다. 엿이다. 각종 요소들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엿만큼 최고급 영양제도 없었을 뿐더러 엿에 들어있는 설탕만큼이나 공부하느냐 소진된 당분을 보충할 수 있는 것 또한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과거를 치러가는 서생들의 아내들은 며칠 전부터 엿을 필수로 고았고, 서생들은 그 엿을 허리춤에 차고 과거길에 올랐던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지만 엿에 얽혀 내려오는 재미난 민담이 있다. 과거 길을 떠난 서생들이 뉘엿뉘엿 해가 지게 되면 근처의 주막에 함께 모여 주전부리로 엿을 꺼내 먹는다. 그때 빠지지 않고 했던 일이 각자 들고온 엿을 다른 서생들의 것과 비교하는 것이었다. 다 같은 엿인데 왜 비교하는지 의아해 할 수도 있겠지만, 엿이라고 다 같은 엿은 아니었다. 엿을 켤 때 양손으로 가생이를 움켜잡고 잡아당기기를 반복하면 할수록 엿의 식감은 더 쫀든해지고 색도 연해진다. 늘어날 때 발생하는 열 때문이다. 물론 엿을 늘어뜨리는 횟수가 많을 수록 아내의 노고도 더 들어가지만 과거길에 오르는 애처로운 남편을 생각하며 보다 식감이 좋은 엿을 만들기 위해 이마 위의 구슬 땀을 쓸어 내린것이 조선의 아내들이었다. 이런 사실을 잘 알았던 짖굳은 남편들은 엿의 색만 보고도 아내의 정성이 얼만큼 들어갔는지 알 수 있었으니, 주막에 모인 서생들은 각자의 엿 색깔을 견주며 누구의 아내가 가장 많은 땀과 노력과 정성을 쏟았는지를 품평함므로 은근히 아내 자랑을 했던 게다.
가끔씩 나는 내 자신이 하나님의 장중에 붙들린 새까만 엿과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분의 손에 의해 끊임없이 늘어지고 또 늘어지고 있는 나. 한 번 늘어질 때 마다 이사야의 입을 씻었던 숯불이 뿜어내는 것과 같은 열이 전신을 휘감아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느껴지지만 고통 후에 전보다 더 찰지고 투명해질 내가 있을 것을 알기에 이를 악 물고 성화(聖化)의 고통을 견딘다.
나로 하여금 이 고통을 인내하도록 힘을 주는 구절 하나가 있으니 엡 2:7이다. 이 구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 중 하나가 당신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가 우리를 통해 당신의 좋으심을 세상에 나타내시기 위함이라는 말이다. 여기에 "나타내다"고 번역된 헬라어(ἐνδείξηται)는 문맥에서 '공개적으로 진열하다'는 의미로 쓰여 우리가 하나님의 좋으심을 공개적으로 진열하는 작품임을 넌지시 의미한다.[1] 그래서 많은 주석가들이 이런 일을 감당하는 성도들을 "트로피"에 비유하기도 했다.[2] 나 같은 미물이 하나님의 좋으심을 세상에 공개적으로 알릴 수 있는 그분의 트로피라니 얼마나 가슴벅찬 일인가? 바로 이런 여정 속에 성화(聖化)가 있기 때문에 엿가락처럼 늘어질 때 찾아오는 아픔을 이를 악 물고 참을 수 있는 것이다.
오, 하나님! 더 늘이고 더 늘여 주옵소서. 제 검은 부분이 더 투명해 지도록, 제 요동하는 모습이 더 찰지게 되도록 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은혜를 더 밝게 세상에 나타내는 트로피가 되기 원합니다.
이제야 깨닫는다.
울릉도 호박엿도 필요 없다.
전라도 창평 쌀엿도 필요 없다.
무안지방 고구마엿도, 제주도 닭엿도, 임실 삼계전통쌀엿도 다 필요 없다.
주님 보시기에 찰지고 깨끗한 엿, 그게 최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