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들은 자신의 편견에 속지 않고, 세상에 속지 않고, 정확한 말씀을 전해야 하는 부담을 갖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설익은 성경 해석과 과도한 희망을 현실로 착각하여 실수하는 것을 힘써 피하려 합니다. 더욱이 미래를 감히 잘못 예견한다면, 이것이 얼마나 큰 실수가 되겠습니까? 성경의 열왕기에는 ‘속이는 영’(a lying spirit)에게 사로잡혀 잘못 예언한 선지자들이 나옵니다.
기원전 9세기경, 북조 이스라엘의 아합왕이 남조 유다의 왕 여호사밧과 연합하여 아람, 지금의 다마스커스를 수도로 삼은 시리아와 계속하여 싸웠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 연합군은 전쟁에 나가기 전, 아합왕이 후원하는 400명의 선지자를 불러 ‘길르앗 라못’ 지역에 가서 싸우는 것이 좋은지 물어봅니다. 모든 선지자는 하나처럼 “올라가소서 주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왕상 22:6)라고 대답합니다. 이에 여호사밧 왕은 다른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있는가”(22:7) 반문합니다. 아합왕은 할 수 없이 흉한 일을 예언하는 선지자 미가야를 부릅니다.
선지자 미가야를 기다리는 동안, 시드기야라는 선지자는 철로 뿔을 만들어 “여호와의 말씀에 왕이 이것들로 아람 사람을 찔러 진멸하리라”(22:11) 예언하고, 400명의 선지자도 그에게 동조하여 같이 예언합니다. 이윽고 초청에 응하여 도착한 미가야에게 아합왕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라고 명합니다. 미가야는 ‘천상의 어전회의’(heavenly council)에 참여하여 본 광경을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의 장엄한 보좌에 앉고 많은 천사가 그의 좌우편에 모셔 섰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누가 아합을 꾀어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서 죽게 할꼬”(20) 물으니, 천군 중의 한 영이 자신이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모든 선지자를 속이겠다고 말하는 광경을 미가야가 전합니다. 이에 시드기야는 미가야의 뺨을 치며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가서 네게 말씀하시더냐”(22:24) 공격합니다. 결국 아합왕은 미가야의 예언처럼 전쟁에서 활에 맞아 죽습니다.
진리는 다수결도 권력도 아닙니다. 종종 진실을 담은 예언은 상식을 뛰어넘습니다. 400대 1의 논쟁에서 진리는 한 사람 미가야 안에만 있었습니다. 미국의 제47대 대통령 선거를 보며, 주요 매스컴은 카멜라의 참패를 예상 못하고, 오차 범위 내의 ‘접전’ 혹은 ‘박빙’이라는 거짓을 방송했습니다. 고국의 많은 매스컴도 이 미국 주류 언론의 보도를 그대로 전달했습니다.
듀크 대학의 명예교수 탐 스프라겐스(Thomas Spragens Jr., 1942-2023)는 정치철학자의 임무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위기를 탐지하고 이에 대한 처방을 미리 제공하는 것이라며, 자신의 저서 『정치이론의 이해』에서 주장합니다. 권력이나 금력, 혹은 거짓 이데올로기에 압도되어 사실을 호도하는 것은 고대의 “거짓 선지자”가 “거짓을 말하는 영”에 사로잡힌 것과 같습니다. 과학이 만연한 이 시대에 ‘무슨 거짓 영이냐’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20세기의 예언자라 불리던 프랑스의 철학자, 법학자이자 신학자인 자끄 엘륄(Jacques Ellul, 1912-1994)은 현대의 “새로운 귀신들”(New Demons)이 있으니, 그것은 20세기의 새로운 신화, 이데올로기로 대표되는 ‘정치종교’(political religion)라고 했습니다. 과학기술, 돈과 함께 이데올로기는 현대의 우상입니다.
거짓 영에 사로잡히는 것은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을 합리화시켜 자신을 방어하고 상대방을 정죄하는 것이 이데올로기입니다. 그것이 역사를 왜곡하고, 자신뿐 아니라 집단을 속입니다. 결국 거짓을 믿는 다수가 수를 의지하며 “집단적 사로잡힘”(collective possession)에 빠집니다. 거짓이 폭로된 후, 그들은 겨우 진실을 보며 정신적 최면에서 깨어납니다. 속이는 영에 자주 속는 현대인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요 8:32).
민종기 목사(충현선교교회 원로 목사, KCMUSA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