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신비주의 종교자 라마크리슈나에 얽혀 내려오는 이야기다. 그를 따랐던 한 남자가 갠지스 강에서 몸을 씻으면 죄를 씻을 수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너무 기뻤던 나머지 라마크리슈나를 찾아가 그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물었다. 라마크리슈나는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사실이고 말고! 갠지스 강은 너무 거룩하기에 그 곳에 들어가 몸을 씻는 사람은 죄 씻음을 받게 되지. 그동안 얼마나 큰 죄를 졌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그 강은 너무 거룩하기에 이 세상에서 씻지 못할 죄가 없을 정도거든. 그러니 자네도 그 강에서 몸을 씻으면 분명히 죄를 씻을 수 있을 거라네.
뛸 듯이 기뻐한 남자는 갠지스 강을 향하여 몸을 돌렸다. 그러나 라마크리슈나는 그를 멈춰 세우며 한 가지를 더 말해주었다.
잠깐!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이 있네. 갠지스 강 둑에 있는 커다란 나무들을 본 적이 있나? 그 나무들이 왜 거기에 있는지도 알아야 해. 잘 듣게나. 자네가 갠지스 강에 들어가서 몸을 씻을 때에 죄가 씻겨 내려갈 걸세. 그러나 아예 떠나는게 아니야. 잠시 씻겨 내려가는 듯 하다가는 강 둑에 있는 나무들 위로 꾸물, 꾸물 올라가서 자네가 나오기 만을 기다리지. 자네 위로 다시 펄쩍 뛰어 들기 위해서 말이야. 그러니 갠지스 강에 들어가 몸을 씻어도 별 도움은 안될 걸세.
남자가 이 말을 듣고 시무룩해지자 라마크리슈나는 그를 이렇게 위로했다.
그러나 너무 염려하지는 말게. 내가 아끼는 자네니까 한 가지 비밀을 더 말해 줄께. 죄를 영원히 씻는 법이 하나 있어. 일단 갠지스 강에 들어간 후에는 절대 나오지 않는거야.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는 것이지. 그러면 된다네.
이 말의 뜻을 깨달은 남자는 힘없이 발걸음을 돌렸다고 한다. 풍자적인 이야기지만 라마크리슈나의 말에는 깊은 성찰이 담겨있다. 그는 인도 사람이 가장 성스럽게 여기는 갠지스 강 까지도 인간의 죄를 씻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 곳에서 아무리 몸을 씻는다 해도 죄를 씻을 수 없다고 가르칠 수 밖에 없었다.
성경에는 "사함"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아페시스(ἄφεσις)"다. 이 단어의 일반적 뜻은 '떠나 보내다'지만 죄(罪)와 함께 쓰일 때에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도록 영원히 떠나 보내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이것이 성경이 증거하는 죄 사함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죄 사함은 일시적이거나 순간적이지 않다. 죄가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거나,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게 아니란 말이다. 그대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도록 영원히 떠나 보내시는 온전한 사함이다. 이러한 죄 사함을 받은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했다.
주께서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시 103:12)
동이 서에서 얼만큼 먼가? 끝없이 멀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만큼 멀다. 절대로 만날 수 없도록 멀다. 그렇게 우리의 죄과를 흘려 보내신 것이다. 미가도 고백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미 7:19)
하나님께 밟힌 후 깊은 바다로 던져진 죄악을 생각해 보라. 우리에게 돌아올 수 있을까? 없다. 절대로 없다. 밑도 끝도 없는 심연의 바다로 던저진 죄는 영원히 가라앉는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죄 사함이다.
그렇다. 갠지스 강은 죄를 씻지 못하지만 보혈의 강은 씻을 수 있다. 갠지스 강은 죄가 돌아오는 것을 막을 수 없지만 보혈의 강은 막을 수 있다. 갠지스 강은 죄를 시퍼렇게 살려 놓지만 보혈의 강은 흔적도 없이 도말해 버린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속에는 죄 사함의 언약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 26:28).
그러므로 보혈의 강에 몸을 담글 때에 죄 씻김과 죄 사함을 받는다.
오! 죄 씻음 받기를 원하는 구도자들이여! 여기에 그대들이 찾아 헤매던 신비한 강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강으로 오라! 그리고 그 곳에 온 몸을 흠뻑 담그라! 그대들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 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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