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구원을 이루어가는 교회
빌립보교회는 자주물감장수인 루디아의 집에서 시작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이 세웠습니다. 그 빌립보교회는 사도바울이 꽤 오래 머무르면서 진리와 성령의 역사로 영적인 체질신앙이 어느 정도 훈련받고 길들여진 교회였습니다. 사도바울이 마게도냐로 가서 데살로니가교회를 세울 때에도 이 빌립보 교회만이 선교헌금을 해 주었습니다. 빌립보교회가 사도바울의 복음사역을 위해 많은 헌신을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성과를 올리기 위하여 같은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빌립보교회를 향한 사도바울의 생각은 영으로 하나가 되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빌립보교회를 자신의 몸과 같이 여겼습니다. 성령은 하나 되게 하시는 목적에 역사하시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하신 말씀을 보면 아주 감동적입니다.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12절)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볼 때에는 구원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의미를 잘 살펴 볼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요한을 통해 바울과 같은 관점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을 예수님의 안내자라고 증거 하실 때, 세례요한은 오로지 그 사명을 위해서 자기 생애를 바치고 성령에 이끌리며 쓰임 받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표현에 의하면 천국에 가 있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지금 잘 믿고 살아있는 세례요한 보다 더 큰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세례요한의 신앙은 아직도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야 할 미완성이라는 얘기입니다. 반대로 천국에 들어갔다는 것은 가장 완성된 신앙인으로 서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도 예수님과 같은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빌립보교회가 잘 믿고 있지만, 그 믿음이 천국 들어가기 까지는 원수 마귀들의 유혹과 위협, 여러 가지 고문과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영적인 믿음이 혹시라도 육적으로 돌아서서 신앙이 무너지게 되면 그 인생은 지옥에 간다는 것입니다. 천국 들어갈 때까지 정신 바짝 차리고, 믿음을 끝까지 완성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너희 구원을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라”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자세히 보면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라고 말씀합니다.
2. 영혼구원이 소원인 교회
그 다음에 13절에 보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우리 말로는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라고 해석했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성령님”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 이유는 요한복음 14장 16-17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성령이 우리 속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아버지를 모신 것도 됐고, 아들도 모신 것이 됐다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다 나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은 아버지의 영이시며 그리스도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성령이 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까?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13절) 여기서 자기라고 하는 것은 성령님만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의 뜻이므로 신적작정에 의한 하나님의 뜻을 말합니다. 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 성령 받은 성도로서 그 남은 인생의 목적과 소원이 무엇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나라에 더 많은 영혼들이 들어가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성령 받은 사람의 당연한 의무입니다. 우리는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시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이고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소원으로 하는 성도들로만 교회 구성원이 다 이루어졌다면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의 심장으로 가난 때문에 신앙이 휘청거리는 형제에게 100만원을 도와줄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내 돈이 아니라, 주님이 내게 맡긴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 사람의 믿음의 뿌리가 더 깊이 내리게 하기 위해서 전달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곧 예수님의 이름으로 전달한 것이며, 전달된 것은 내 것이 아닌 예수님의 것입니다. 내가 관리하는 입장이지 소유권은 예수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질 때에 원망과 시비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이 하늘나라 확장을 위한 것이라면, 그 일을 위하여서 서로 주고받고 이끌어주고 할 때 절대로 다툼이나 시기가 있을 수 없습니다.
3. 목자의 면류관이 되는 교회
이러한 개인과 신앙공동체가 어떤 모습으로 보여져야 됩니까?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15절) 그렇게 살았다면 모든 사람들이 볼 때, ‘아, 저 사람은 이기적이거나 자기중심적인 것이 전혀 없고, 저 사람에게는 예수님뿐이구나. 저 사람에게는 예수님만 보여지고 전달되고 느껴진다.’ 이것이 곧 나를 통해 예수님만이 많은 사람들에게 빛으로 보여지게 하는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삽시다. 그럴 때 나는 흠도 주름 잡힌 것도 없이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숙한 성도로 성화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생명의 말씀이 밝혀집니다. 생명의 말씀은 예수님인데, 예수님은 나의 생활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느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통해서 예수님만 돋보여지고 전달되어지도록 성령의 도구로 쓰임 받아야 합니다.
그 다음 결론은 참 목 메이는 구절입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빌 2:17-18)
빌립보교회가 성령에 이끌려 그리스도의 나라 확장을 위하여 전도와 선교에 힘쓰면서 복음의 제물이 된다면, 그 제물위에 사도바울 자신의 생명의 피를 함께 쏟아 너희와 내가 함께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제물로 드려지고 싶다는 사도바울의 고백입니다. 이것이 빌립보교회를 향한 사도바울의 간절한 소원의 심정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