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홍수 이전(세상, 두 도성의 시작)
에덴동산을 떠난 인류는 어찌되었을까? 타락의 결과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사람이 땅에 번성하면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들을 아내로 삼았다. 이들 사이에 태어나 자녀들이 바로 네피림이라 불리는 존재들이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결합 사건'을 "인간이 가진 자유의지 속에서 악에 물들어 버린 두 도성의 혼합"으로 설명한다. 성경은 사람의 죄악이 땅에 가득하였고, 그 마음의 생각은 항상 악했으며, 하나님은 사람 만든 것을 후회하여 탄식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창 6:6). 악에는 대가가 따른다. 악이 얼마나 창궐하였는지,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비롯하여 짐승과 기어 다니는 생물과 공중의 새까지 모조리 쓸어버릴 것이라고 선포하셨다. 이렇게 타락한 세상에 악은 창궐하였으나, 분명 하나님과 동행한 인물도 있었다. 에녹이 그런 인물이었다. '봉헌'(dedicatio)이라는 의미를 가진 '에녹'이라는 이름의 인물은 둘 있었다. 셋의 후손 에녹과 가인의 후손 에녹이었다. 가인의 도성 이름도 놀랍게도 에녹성이었다(창 4:17). 가인과 아벨처럼 사람들은 또다시 하나님 앞에 '봉헌'의 삶을 시작한다. 이렇게 세상에서 사람들은 성을 쌓았고, 사람(가인)의 도성과 하나님의 도성이 시작되었다.
2) 의인 노아와 신정론적 딜레마
그런데 에녹과 또 다른 성격의 의인이 있었다. 바로 노아였다. 노아는 타락한 세상에서 영원한 심판과 구원의 원형을 목격한 장본인이었다. 노아 당시 사람들은 죄악이 땅에 가득하였고 그 마음의 생각이 항상 악하여, 오죽하면 하나님께서는 땅에 사람 만든 것이 후회되어 탄식하며 노아에게 심판이 있을 것임을 계시하신다(창 6:7).
땅에 홍수가 나던 해 노아의 나이는 600세였고, 노아가 세 자녀 셈과 함과 야벳을 낳은 것은 500세가 지난 후였다. 그렇다면 홍수가 나던 당시 세 아들은 모두 100세 가까운 나이였다. 여기서 우리들은 성경 해석의 또 다른 딜레마에 처하게 된다. 도대체 노아는 500세까지 전혀 자녀를 낳지 않았다는 말인가? 딸들은 없었는가? 600세 되던 해까지 노아 부부에게 손주들은 전혀 없었는가? 아니면 셈과 함과 야벳과 그들의 자부(子婦) 등 8명을 제외한 가까운 친족들이 모두 심판의 대상이 되었다는 말인가? 그것이 지극히 작고 약한 것들을 사랑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의 질서에 합당한가?
어찌되었든 죄악의 대가로서의 대홍수 심판은 대격변이었다. 500세가 되던 해까지 노아에게 자녀가 있었는지 없었는지에 대한 문제(없었다면 그 나이까지 왜 없었느냐, 있었다면 손주들을 포함한 그 많은 후손들이 왜 불순종하였는가 하는 문제)는 홍수 심판을 앞에 둔, 인류의 준(準) 조상격인 이들 노아 가족 미스터리가 인류가 쉽게 풀지 못하는 신정론적 딜레마를 제공해주는 전형적인 사건임을 보여 준다. 어떤 해석이든 우리 인간은 멈출 수 없는 악의 심각성과 인간이 관여할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의 절대성 앞에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다.
3) 세상 도성에 임한 홍수 심판
하나님이 인정하신 의로운 자 노아는 창세기 6-9장에 나타난 홍수 사건에 있어 당연한 주역(主役)으로 등장한다. 방주는 구원의 모형으로 예비되었다. 구원 방주 설계는 오직 하나님의 설계도에 따른 것임과 동시에 노아 가족의 협력으로 준비되었다는 것은, 인류 구원 여정에 있어 예정론과 예지예정론 사이의 조화를 위한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신학자들이 이 문제를 가지고 싸우는 것은 부질없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 인간은 인류가 감히 풀기 어려운 이 하나님의 신비한 구원 섭리 역사 앞에 오직 고개를 숙여야 한다. 노아 가족만이 아니었다. 정결하고 정결하지 않은 모든 종류의 동물들도 방주 안에 보존되었다. 인간은 땅에 충만하고 땅을 다스리고 정복하되, 하나님의 생명을 하나님의 법에 맞게 다스려야 한다. 동물들을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
홍수는 노아 600세 되던 해 시작되었다. 노아 일행이 방주에 들어간 지 일주일 후인 그 해 2월 17일 홍수는 시작되었다. 이제 방주의 문은 굳게 닫혔다. 더는 기회가 없었다. 그날부터 모든 깊은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렸으며 40주야간 비가 내렸다. 방주는 땅에서 떠올랐고 물 위에 떠다녔다. 물은 계속 불어나 땅의 가장 높은 산조차 잠겨 버렸다. 물은 가장 높은 봉우리보다도 7미터나 더 불어났다. 사람을 포함하여 땅에 호흡하는 모든 생물들은 죽음을 맞았다. 물은 150일 동안이나 땅을 뒤덮었다.
하지만 노아 일행은 달랐다. 하나님은 노아와 그와 함께한 모든 짐승과 생물을 기억하시고 땅에 바람을 불게 하셨으며, 깊은 샘들과 하늘의 창은 막히고 비가 그쳤다. 땅의 물은 점점 줄어들고, 홍수가 나기 시작한 지 150일 후인 7월 17일에 방주는 '아라랏 산'에 정박하였다. 석 달 후인 10월 1일에는 다른 산들의 봉우리가 드러났고, 이후 40일이 지나 노아는 배의 창을 열고 까마귀와 비둘기를 일주일 간격으로 연달아 내보내어 땅의 상황을 체크하였다. 7일 후 두 번째 내보낸 비둘기가 연한 감람나무 잎사귀 하나를 입에 물고 돌아 온 것을 확인한 노아는, 땅에 물이 줄어든 것을 알고 다시 7일을 기다렸다가 비둘기를 내어놓자 이번에는 비둘기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노아가 601세 되던 해 1월 1일 배의 뚜껑을 열고 보니 땅에서 물은 빠지고 2월 27일에는 완전히 말랐다. 그때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셨다. "하선하라"고. 그래서 노아와 그 가족과 동물들은 모두 함께 안전하게 하선하였다. 이렇게 하나님은 노아와 그 가족들에게 이 세상의 새로운 희망을 선물하셨다.
4) 홍수 이후(또다시 시작된 두 도성)
노아가 하선하자마자 한 일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것이었다. 노아는 단을 쌓고 정결한 모든 짐승과 새 중에서 골라 번제를 드렸다. 하나님은 제물을 기쁘시게 받으시고 혼자 말씀하셨다. 비록 사람의 생각이 어릴 적부터 악하긴 하나,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거나 대홍수로 모든 생물을 전멸하지는 않을 거라고(창 8:20-22). 이 새 언약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며 모든 동물을 지배하라는 명령과 함께 주어졌다. 하지만 세상은 이미 많이 달라져 버렸다. 홍수 이전처럼 여전히 세상에는 어두움이 많이 있을 것이다. 땅이 남아 있는 한 심고 추수하는 때가 있을 것이며,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그치지 않게 되었다. 또한 모든 생물들은 인간을 무서워할 것이며, 인간은 식물(植物)뿐 아니라 동물들도 식물(食物)로 허락받았다. 다만 생피가 들어있는 고기를 그대로 먹어서는 안 되었다. 그리고 살인은 금물이요, 사람을 죽인 짐승이나 인간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창 9:5-6). 세상은 이렇게 더욱 험난한 곳이 될 것이다. 홍수 이전처럼 여전히 세상의 도성과 하나님의 도성은 재현될 것이다. 하지만 홍수 이후, 이전 세상에는 없던 새 소망의 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새 언약의 영원한 증거의 표로 구름 속에 무지개를 주셨다(창 9: 8-17).
5) 세상 도성 속에 생겨난 심각한 딜레마(가나안 저주 문제와 그 후손들의 미래)
가나안 저주 문제는 성경의 여러 난제 가운데 하나다. 노아의 가나안 저주 사건에 대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다. 하루는 그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자기 천막 안에서 벌거벗은 채 누워 있었다. 가나안의 아버지인 함이 자기 아버지 노아의 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 사실을 두 형제에게 말하였다. 그러자 셈과 야벳이 옷을 어깨에 메고 뒷걸음질 쳐서 들어가 아버지 노아의 나체를 덮어 주고, 계속 얼굴을 돌린 채 아버지의 나체를 보지 않았다. 노아는 술이 깬 후에 함이 자기에게 한 일을 알고 "(함의 아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자기 형제에게 가장 천한 종이 되리라"고 했다(창 9:20-27). 이것이 내용의 전부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가나안을 저주하신 것이 아니란 점이다. 인간 노아가 함의 아들 가운데 오직 가나안을 저주하였다. 하나님이 아닌 노아의 자기 손자 저주가 과연 어떤 유효성이 있을까? 조부가 손자를 저주한다는 것이 과연 타당은 한 것일까? 함이 행한 그 일이, 도대체 함의 아들이요 노아의 손자인 가나안에 대한 저주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함의 행동 자체가, 그렇게 자기 아들 넷 가운데 가나안이 할아버지 노아에게 저주를 받을 만한 행동이었는가? 그렇다면 아들 함부터 저주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노아와 함께 그 가족을 하나님이 축복하셔서(창세기 9장 1절) 하나님의 축복을 어떤 사람도 저주로 바꿀 수 없었으므로 노아는 함부로 자기 아들 함은 저주하지 못했단 말인가(Walter C. Kaiser, Jr., 「More Hard Sayings of the Old Testment」, IVP, 1992, 51-52)?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예수 믿는 모든 이들을 무자비하고 잔인하게 처형한 조선 후기나, 신앙인을 잔혹하게 대하는 북한 유물주의 무신론 철권정권의 행동보다도, 가나안이 더 잔인한 저주를 받을 만한 행동을 했단 말인가? 설령 그렇더라도 그것이 노아가 자신의 손자를 저주할 만한 일이었을까? 부자가 목욕탕 가는 일이 흔한 우리 사회가 볼 때, 과연 이 사건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 사건에는 필경 우리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는 어떤 사연이 숨어 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성경은 그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다. 즉 우리가 모르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비밀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는 저주 개념을 함부로 운명에 적용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결코 함을 저주하신 적이 없다. 노아가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기 손자 가나안을 저주했을 뿐이다. 그것이 과연 무슨 효력이 있었을까? 그것이 노예 제도나 함의 후손인 흑인의 노예 운명을 합리화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만일 그렇다면 반만 년 민족사에 19세기 말이 되어서야 겨우 복음이 들어온 우리 민족만큼 영적 저주를 받은 민족이 어디 있겠는가? 천한 종이나 저주라는 말은 함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모세 율법은 종이 6년을 봉사하면 자유케 하였다. 평생 종이 되는 경우는 주인을 사랑해서 자원할 때 뿐이었다(출 21:2-7). 사도 바울도 종의 제도에 대해 적극 반대하지는 않았으나, 할 수 있으면 자유하라고 권면하였다(고전 7:21). 주인에게서 탈출한 오네시모를 감싸면서, 전 주인인 빌레몬에게 정중하게 오네시모를 종이 아니라 종 이상의 믿음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로 대해 줄 것을 정중하게 요청하는 아름다운 절창(絶唱) 빌레몬서를 보라! 어떤 종이든 노예이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 저주는 하나님의 사랑의 은총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노아의 술 취함은 분명 그리 보기 좋은 장면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한 아들 함도 칭찬받을 행위를 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의인 노아조차 당연히 허물이 있음을 알려 주고, 우리 인간의 보편적 타락상을 보여 준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전혀 성경적 근거가 없는, 특정 민족의 운명적 저주가 마치 진실인 양 언급하는 일은 금해야 한다고 본다.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 인간은 모두 동일한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요 왕 같은 제사장이 된다.
가나안의 후손 시돈이 같은 함족인 붓족속과 함께 카르타고를 건설하여 탁월한 초기 기독교 인물들을 배출한 것이나, 갈릴리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시돈 사람들이 훨씬 복음에 더 반응한다는 예수님의 충고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주시는 울림이 큰 말씀이 아닐 수 없다. 가나안의 후손들은 역사상 탁월한 사람들이었다. 물론 그들도 타락한 사람들이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그들을 전혀 차별 없이 동일하게 부르고 계신다. 세상의 도성에서 하나님의 도성으로 돌아오라고.
6) 노아 방주가 보여 주는 신정론
노아 시대 홍수 가운데 생명의 구원 도구는 오직 방주였다. 방주는 그 제작 의도와 목적과 방식(크기와 구조와 모양과 치수)이 모두 하나님의 계시였다. 홍수를 감당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계시된 방주밖에 없었다. 방주 이외 육적 생명의 심판을 면할 생명은 결코 없었다. 홍수는 "저희를 다 멸하였다"(마 24:39; 눅 17:27). 육체 구원은 결코 쉽지 않다. 홍수에서 구원받은 사람이 겨우 여덟 명에 지나지 않았음을 기억하라(벧전 3:20). 하물며 우리의 죄악과 더러움은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신은 아직도 인간 수명 120세나 150세를 나팔 부는 황색 언론을 믿는가? 강건해야 80이요, 의학적 연장으로 인한 피곤한 40년 생명 유지가 그렇게도 낙원일 것 같은가? 또한 그 이후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몸은 그렇다 치고 지옥으로 가는 내 몸과 영혼은 어찌할 것인가(마 10:28)? 믿음과 하나님의 심판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죽음과 악의 본질에 대해 그저 지나치고 방관하고 간과할 것인가?
노아는 믿음으로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대하여 하나님의 경고를 받고, 그분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지체 없이 방주를 만들어 홍수 때 가족을 구원해 내었다(히 11:7). 베드로 사도는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고 했다(벧전 3:21). 성경이 말하는 예표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소홀히 여기지 말라. 악을 세상 법정은 혹시 방치하더라도, 하나님은 결코 방치하지 않으신다. 홍수가 말하는 예표가 바로 그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본 노아의 믿음을 보라. 그는 세상에 있는 죄를 분명히 보았고, 죄가 있음을 선언하였으며, 믿음으로 의의 상속자가 되었다(히 11:7).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www.kictnet.net)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글 역시 저자의 허락을 받아 연구소 홈페이지에서 퍼온 것이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