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에 은밀하게 잘못 퍼져 있는 신화가 있다. 독신은 수준 높고 경건한 믿음의 사람의 것이고, 결혼은 수준 낮고 불경건한 사람의 것이라는 생각. 그리고 독신만이 하나님께 받은 은사이지, 결혼은 은사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결벽증. 그런데 한국인 목사 중에 사도 바울처럼 미혼 때부터 주님을 위해 헌신적·열정적으로 살며 생을 마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럼에도 상당수 목회자들이 성도들과 미혼 청년들에게 독신으로 주님께 헌신하는 것이 주님을 위해 더 훌륭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는 식으로 설교하며 권면하곤 한다. 정작 본인도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음에도, 왜 그러한 심리적 압박감을 느끼거나 맹신적으로 성도들에게 주는 걸까. 이는 성경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그릇된 경건주의, 영보다 육을 하찮게 여기는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의 악영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독신(獨身)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살펴보면, 독신과 결혼 모두 은사(恩賜, gift)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린도전서 7장 7절에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고 기록돼 있다. 이는 결혼하는 게 하나님께 받은 은사이듯, 독신으로 지내는 것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독신 은사를 아무나 받았다고 혼동해선 안 되며, 결혼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섣불리 "독신 은사를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결혼을 막으시는 것"으로 오해한다면 나중에 큰 후회를 할 위험성이 크다. 독신 은사를 받은 것을 판별하는 성경적 기준은 다음의 두 가지다.
하나는 타고난 고자의 경우다. 선천적으로 신체상 불구이거나 성욕이 극도로 미약한 사람의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성경은 이들이 독신의 은사자임을 일깨워 준다. 또 하나는 하나님께 헌신된 자일 경우에도 독신 은사자임을 일깨워 준다. 마태복음 19장 12절에 나와 있듯이,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가 이에 해당된다. 바울도 일평생 결혼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역에 전념했으며(고전 9:5, 고전 7:26), 구약의 나실인 제도(민 6장)를 통해서도 독신 은사의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 조심할 것은 자신이 진정 독신의 은사를 받았느냐 아니냐의 구분이다. 자신의 까다로운 배우자 조건으로 결혼을 못했거나, 다른 외부의 불가피한 상황 때문에 결혼에 장애를 겪고 있거나, 일시적으로 결혼할 수 없는 환경에 놓여 있거나, 과거의 상처나 이성교제의 실패 경험 등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독신의 은사인지 의심해 결혼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모두 독신의 은사자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아직 내가 바라는 조건과 기준에 맞는 배우자를 만나지 못해 결혼이 지연되고 있다면, 속히 내 결혼 장애물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버릴 건 과감히 버리고 포기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하겠다.
그런데 아직도 교회 내에 결혼과 신앙을 별개로 놓는 이분법적 사고가 팽배한 현실을 볼 때 너무나 안타깝다. 이제껏 결혼 문제로 피눈물을 흘리는 수많은 미혼 청년들과 상담을 해 본 경험으로 미루어, 이는 분명 잘못된 것이며 주님께서도 기뻐하시지 않는 일임에 분명하다. 더욱이 영적 리더가 미혼자를 결혼적령기가 지나도록 열심히 신앙 훈련·헌신시켜 이성교제를 억압하고 눈물과 탄식의 기도를 하도록 만든다면, 하나님과 그 어린 영혼 앞에 죄를 짓는 일이라 생각한다. 지금 추세대로라면 머잖아 한국교회는 서구교회처럼 급격히 쇠퇴하고 문 닫는 교회가 속출할 것이기에, 지금과 같은 시스템을 속히 뜯어고쳐 독신 은사자가 아닌 미혼 청년들에게 싱글로의 헌신을 강요해 선교 오지로 몰아넣거나 교회 안에만 가둬 놓아선 안 될 것이다. 독신 은사 없이 일평생 경건하게 홀로 산다는 건 불가능하며, 특히 오늘날처럼 음란하고 성적으로 문란한 시대엔 더더욱 그렇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사랑의 명령이다. 남자도 부모를 떠나야 하고 여자도 부모를 떠나야 한다(창 2:24). 결혼 은사자가 머물 자리는 둘이 한 몸을 이루는 곳, 바로 결혼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행복한 가정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독처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셨고, 인간도 홀로 존재할 때 외로움과 고독감을 크게 느끼며 인생에 어려움을 겪는다. 다만 독신 은사자일 경우엔 그러한 외로움의 강도가 덜하며, 홀로 견뎌내는 데 일반인만큼 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그런데 독신 은사자는 자갈밭의 특이한 돌멩이처럼 아주 극소수이다. 이를 억지로 제도화한 가톨릭의 성직독신제도는 제2차 라테란공의회(제10차 에큐메니칼 공의회, 1139)의 산물로, 1천 년의 역사가 채 안 된다. 이로 인한 폐해와 후유증은 역사가 증거하고, 오늘날 가톨릭에선 성직자의 결혼 문제가 핫이슈로 떠오른 상황이다. 그럼에도 결혼한 목사가 독신을 함부로 운운하는 건 시대착오적인 자가당착(自家撞着)이다.
청년 싱글이든 돌싱이든 미혼자에게 가장 힘든 건 육체 정욕 제어의 문제이다. 미혼 청년들을 교회에 오랫동안 묶어둘 요량으로 "주님 오실 때가 가까우니 홀로 지내는 게 바람직하다"는 식으로 권면하는 것도 문제려니와, "예비 배우자가 반드시 자매가 출석하는 교회에 나와야 한다"는 조건을 붙여 갈라서게 만드는 건 하나님과 사람 앞에 죄를 짓는 행위다. 특별한 사정이 있거나 쌍방 합의가 없는 한, 상식과 신앙 전통에 비추어 형제가 출석하는 교회로 옮겨가는 게 일반적이기에, 훗날 그로 인해 실족한 영혼에 대한 책임은 영적 지도자가 져야 할 것이다.
고린도전서 7장에 보면 미혼자들을 혼란케 만드는 구절이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 있어, 이를 전체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어느 특정 구절만을 따 와서 적용시킬 때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킬 위험성이 크다. 각 사람의 특성에 따라 개별적으로 적용시키지 않고 무조건 모든 사람에게 일률적으로 적용시키려다 보니,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7장의 문맥 전체를 살펴보면, 독신 은사자인 바울의 시각에서 자신처럼 독신으로 사는 게 가장 바람직하다고 권면한다. 하지만 자신처럼 살 수 없는 결혼 은사자일 경우엔, 오히려 죄를 짓지 않도록 결혼하는 게 차선으로 바람직하다고 권면하는 것을 본다. 바울의 속마음은 독신, 현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혼이라는 뜻이다. 그걸 구별하지 않고 무조건 독신 은사자 혹은 결혼 은사자로 몰아세워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예외적으로 '주님 오실 날이 가깝고 환난이 임박했다는 판단'(26절) 하에 결혼하지 않는 '스스로 된 고자'(마 19:12)도 얼마든지 가능하고 권장해야 할 일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역사 이래로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독신 은사자보다 결혼 은사자가 압도적 다수임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특별한 계시가 없는 한 우리는 결혼 은사자라고 생각해야 하며, 스스로 냉철히 분별하여 자신의 본분을 잃어선 안 되며, 실족하여 성적으로 죄를 지은 후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1; 막 14:38)는 말씀을 들먹이며 변명해선 안 된다.
아무튼 우리는 교회 내 미혼 청년들에게 독신 은사자인지 결혼 은사자인지 정확히 분별·확인·인지케 하여 독신 은사자에게는 결혼 문제에서 초연토록 도와야 하며, 결혼 은사자에게는 결혼 문제를 소홀히 하거나 방치하지 말고 어렸을 적부터 기도하면서 정성껏 준비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믿음의 배우자를 만나 결혼하여, 행복하고 이웃에게 축복의 통로가 되는 '선교적 가정'을 세우도록 도와야 한다. 그게 하나님께서 결혼제도를 세우신 본래 목적에 가장 부합하다. 사도 바울조차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고전 9:5)며, 결혼한 사역자들을 당연시했음을 유념해야 한다.
목회자와 영적 리더들은 미혼 청년들이 결혼 전 시험을 이기기 위해 무엇보다 기도에 열심을 내도록 도와야 하며, 성경 말씀을 깊이 연구·묵상하고 암송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아무리 주님을 위해 열심히 헌신·봉사하고 기도해도 정욕의 시험이 떠나지 않고, 결혼 안 하고 홀로 지내는 게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호소하면, 믿음이 떨어졌다고 책망하거나 시험 들었다고 지적하기 전, 이제 미혼 청년이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한계점에 다다랐음을 깨닫고 얼른 '독신의 굴'에서 벗어나 '결혼의 광장'으로 나오도록 이끌어야 한다. 이는 결코 사역의 실패도, 죄 짓는 일도, 성경에 어긋난 불신앙이나 믿음 없는 행동도,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도 아니다. 미혼자를 결혼 은사자의 본래 자리로 돌려놓는 창조질서 회복 차원의 자연스러운 과정인 것이다.
프리섹스·동성애로 안목과 육체의 정욕을 쉽게 자극받는 이 시대에, 독신 은사도 받지 않은 미혼 청년에게 특별한 사명의식 없이 마음과 육체의 순결을 지키도록 강요·억압하는 건 고문을 가하는 일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특별한 헌신을 위한 금욕 기간 외 '평생금욕주의'를 강요하지 않았음을 유념해야 한다. 주님의 나라를 위해 '자발적 고자'(마 19:12)가 되려 할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독신생활을 허용하고 있음을 명확히 인식하고, 한 살이라도 더 먹기 전 교회 내에 산더미처럼 적체돼 있는 만혼자(晩婚者)들을 속히 '솔로의 동굴'에서 끄집어내 결혼시켜야 한다. 그 길이 곧 한국교회의 노쇠화와 급감소화와 소멸 위기를 예방하는 첩경임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