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환 목사.
(Photo : ) 김세환 목사.

신문에서 어떤 기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아내가 나에게 밑도 끝도 없이 한마디 던졌다. "당신은 이 다음에 죽으면 무덤에 뭐라고 써주면 좋겠어?" 왜 갑자기 아내가 이런 질문을 하나 궁금하여 아내가 읽고 있던 신문을 같이 보게 됐다. 거기에는 유명한 사람들이 남겼 다는 묘비명이 기록되어 있었다. 묘비명은 한 줄 분량으로 요약된 짧은 글이지만, 그 속에는 대부분 그 사람의 인생 전체가 담겨있다.

어떤 사람은 묘비명으로 교훈이 나 가훈을 기록하기도 하고, 살면서 경험했던 감동적인 문구들을 적어 넣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성경 구절을 적는 것으로 묘비명을 대신 하기도 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람들 중에 는 마지막 순간까지 위트와 유머를 잊지 않고 재미있는 글을 남긴 사 람들이 있다.

영국의 극작가 버나 드 쇼는 "내 우물쭈물하다가 이럴 줄 알았다"라고 썼고, 괴짜 스님 중 광은 "에이, 괜히 왔다"고 썼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일어나지 못해 미안하다"를, 고아들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스위스 교육자 페스탈로치 는 "모든 일을 남을 위해 일했을 뿐,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 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공산주의 철학의 대부인 칼 마르크스는 "전 세계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는 말로 죽는 순간까지 혁명정신을 부르짖었다. 어떤 할머니는 "평생을 처녀로 태어나서, 처녀로 살다, 처녀로 죽다" 라고 썼다. 그러자 그 옆 묘에 묻힌 어떤 할아버지는 묘비명에 여섯 글 자로 "설마, 그럴리가!"라고 썼다고 한다.

어떤 의도로 묘비명을 기록했던, 남이 써 주었던 아니면 자신이 써 넣었던, 어쩌면 묘비명은 그 사람의 일생을 평가하는 "인생 성적표"가 될 것이다. 우리 중에는 혹시 이런 문구를 남길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 르겠다.

"평생 화만 내다 죽다", "우 라지게 건강만 챙기다 여기 눕다", "평생 여행만 하다가 여기서 멈추 다" 그리고 "평생 고생만 하다가 여 기서 쉬다"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드 는 묘비명이 아니다. "여보, 나는 뭐라고 쓰면 좋을까? 당신이 한번 적어봐!" 나의 질문에 아내가 얄궂은 얼굴 표정을 지으며 간단하게 한마디 한다. "평생 걱정 만 하다 죽다" 나는 쓴 입맛을 다 시며, "당신같은 철부지 때문에 그 렇지!"라며 퉁명스럽게 한마디 던 지고는 벌떡 일어나서 화장실로 휙 가버렸다. 그런데 문득 화장실에 달린 거울 을 보니까, 정말 근심 걱정으로 쪼 그라든 중년의 초췌한 남자가 나 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눈에 힘 을 주며 그 남자를 뚫어져라 바라보 았다. 걱정과 근심으로 늙어버린 모습이 역력했다. 이러다가 정말 아내 의 말이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는 또 다른 걱정이 엄습해 왔다. 급한대로 이빨을 드러내며 한번 크게 웃어 보 았다. 영락없는 중년의 성질난 고릴 라의 모습 그 자체였다. 새해에는 다르게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