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가장 큰 명절인 추석을 앞두고 '제사' 문제에 대한 신학적 논의가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28일 오후 2시부터 서울신학대학교(총장 유석성 박사) 백주녀기념관 국제회의실에서 진행된 기독교효학회(학회장 최성규 목사) 제 2회 학술세미나에서는 먼저 이은선 교수(안양대학교 기독교문화학과)가 '기독교의 효와 제사와 추도 예배'를 주제로 발제했다.
이은선 교수는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올 때 가장 갈등을 빚었던 문제가 조상제사였다"며 "기독교는 인간이 죽으면 천국이나 지옥에 간다고 믿기 때문에 조상제사가 없었다. 기독교는 4계명에 따라 살아있는 부모에게 효도를 강조하지만 죽은 후에 부모에 대한 의례가 없었다. 그런데 유교에서는 조상제사가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후에 부모에게 효를 표하는 가장 중요한 의식이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을 수용한 사람들이 유교의 전통문화인 조상제사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중요한 문화적 갈등의 요인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중국 명나라에 천주교 선교사들이 처음 들어왔을때, 예수회 선교사였던 마테오리치(1552-1610)는 현지문화적응 방식을 채택하여 제사를 지내도록 허용하였다"며 "그는 중국인들의 옷을 입고 중국 문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여 중국인들이 천주교인으로 개종하는데 제사를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허용하였다. 마테오리치는 제사를 우상숭배가 아니라 조상에 대한 효와 공경이라고 보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 후에 들어왔던 도미니크회(1631년)와 프란체스코회(1633년)선교사들은 원칙주의의 입장을 취해 제사를 우상숭배로 규정하여 금지했다"며 "교황청에서는 인노센트 10세가 종래의 제사에 대한 타협적인 정책을 중지하고 1645년 위반하면 파문하겠다고 규정하면서 제사를 금지했다. 그런데 교황 알렉산더 7세는 다시 예수회측의 요구를 승인하여 '비도덕적인 것이 아닌 한 어떤 민족의 관습과 전통도 배척하지 않고 상처를 입히지 않는 신앙을 가져가도록 해야 한다'고 권유했다. 그 후 인노센트 12세(1691-1700)와 클레멘트 11세(1700-1720)는 다시 제사를 우상숭배로 규정해 금지했다"고 했다.
이 교수는 "이에 청나라 시대에 천주교는 박해를 받았다. 청나라의 강희, 옹정, 건륭 황제가 천주교를 강하게 핍박하였고 천주교는 포교의 자유를 잃어버렸다가 남경조약을 체결할 1845년 이후에 회복하였다"고 말했다.
제사를 우상숭배로 볼 것이냐, 전통 문화로 봐야 할 것이냐의 천주교의 입장은 교황에 따라 달라지는 역사를 반복하다 1958년 천주교는 제사에서 귀신숭배와 연결된다고 판단된 의식드을 제외시키고 나머지 의식들을 인정했다. 이 교수는 "그런데 1995년에 발표한 사목지침서에는 제사에 대한 금지사항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이어 이은선 교수는 "천주교보다 후에 중국에 들어갔던 기독교 선교사들은 천주교가 이미 제사를 우상숭배로 규정하고 금지하고 있던 것에 영향을 받아서 자연스럽게 제사를 금지하게 됐다"며 "우리나라의 선교사들은 중국에서 기독교 선교사들이 결정하고 시행했던 제사금지 정책을 그대로 수용하여 시행했다"고 말했다.
중국에서는 1877년, 1890년, 1907년 기독교 선교사대회가 열렸는데 1877년의 제1차 선교사대회에서는 보수적인 선교사들의 입장이 주류를 이뤄 제사제도의 우상숭배적인 요소를 강조해 제사에 대한 금지 입장을 채택했다고 했다.
이어 1890년 제2차 선교사 대회에서는 '제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우상숭배이고 여호와 이외에 어떤 인물이나 사물을 공경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는 중국 원로 선교사인 테일러의 주장이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 제사가 금지됐다. 그러나 당시 제사에 대한 적극적인 변호의 입장을 취한 마틴(William Alaxender Parsons Martin) 등 소수자의 입장도 있었다. 마틴은 글을 통해 "제사에 약간의 우상숭배적인 요소가 있지만 중국의 자녀들은 제사를 통해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을 배우고 가족제도의 질서가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제사는 죽은 자를 위한 제도가 아니라 산 자를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선교 100주년을 맞은 1907년 열린 제 3차 선교사대회에서는 마틴을 비롯한 제사에 관용적인 사람들의 입장이 반영되어 조상숭배에는 조상공경의 뜻뿐만이 아니라 종교적 예배의 의미도 들어 있으므로 제사 대신 중국인의 관점에 접근하는 초도회를 허용하기로 하였다. 당시는 1900년 의화단 사건을 계기로 중국에서 민족주의 의식이 고조되고 기독교가 불효의 종교로 비판받고 있어 이같은 결정이 내려질 수 있었다.
이은선 교수는 조선의 이야기로 돌아가 "우리나라에서 1886년에 최초로 세례받은 노춘경은 세례를 받으면서 제사를 포기하였다"며 "1891년에 아펜젤러는 제사를 포기해야 한다면 세례받지 않겠다고 말하는 양반의 경우를 기록하면서 자신은 1890년 상해 선교사 대회의 결정을 따르고 있다고 말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한국에서 선교사들과 조선의 조사들이 제사문제를 논의한 것은 1893년이었으며 이러한 논의의 결과로 1895년 마펫이 네비우스의 저술을 한국의 실정에 맞게 번역한 '위원입교인규됴'가 세례문답서 및 생활안해서로 제작됐다"며 "이 문서는 제1조에서 귀신숭배, 우상숭배, 제사를 금지했다. 제사를 금지한 반면에 제3조에서는 부모님을 살아 생전에 봉양하여 효도할 것을 강조했다"고 했다.
덧붙여 "감리교도 같은 해 스크랜튼이 매클레이의 저술을 번역한 '세례문답' 제1조에서 마귀와 마귀의 일인 '우상을 섬기는 일'과 '불효'를 거절해야 한다고 규정했다"며 "이 무렵에 세례문답의 규정이 제장된 것은 청일전쟁 이후에 교인들의 숫자가 즐어나면서 이들의 생활을 올바르게 지도해야할 필요성이 대두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그는 "당시에 기독교 신앙을 수용하는 사람들에게 제사는 제일 큰 어려움으로, 제사를 포기하면서 가족공동체에서 추방되고 많은 박해를 당해야 했다"며 또 "제사금지에 따라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자 선교사들은 기독교가 살아계신 부모에게 효를 하는 종교라는 것을 인식시키는 효문화운동을 일으키고 효도신학을 발전시키고 추도예배를 점차로 정착시켜 나갔다"고 했다.
이 교수는 "기록에 남아 있는 최초의 추도식은 1896년 7월로, 원산지방의 오씨는 제삿날이 되자 감리교 스왈론 선교사를 초청해 간단한 추도식을 드리고 나서 마당에 불을 피우고 신주를 비롯해 각종 제기와 부적을 불태웠다"며 또 "1897년 8월 11일 회즁신문에는 리무영씨의 추도식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며 소개했다.
"현금에 궁내부 물품사장으로 있는 리무영씨는 우리 교회 중 사랑하는 형제라. 음력 륙월 이십 구일에 그 대부인의 대긔일 날인데 그 형제가 망극한 마음과 감구지회를 억제할 수 없는지라.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구세주를 믿은즉 다른 사람과 같이 음식을 버려노코 제사 지낼리는 업거니와 부모의 대소긔를 당하여 효자의 마음이 엇지 그져 지내 가리오. 이에 교중 여러 형제를 청좌하고 대텽마루에 등촉을 밝키 달고 그 대부인의 영혼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미하며 그 대분인이 생존하여 계실 때에 하나님을 믿음과 경계하는 말씀과 현숙하신 모양을 생각하며 일장을 통곡하고 교우들과 리무영씨를 위로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며 경경히 밤을 지낼새 그 모친에게 참 마음으로 제사를 드린지라. 엇지 아름답지 아니리오. 이 후에 다른 교우들도 부모의 대소긔를 당하면 또한 리무영씨와 가치 하기가 쉬울 듯 하더라"
이은선 교수는 "이 추도예배는 전통 제사의 요소를 간직한 것과 기독교적인 특색을 가진 것을 함께 가지고 있다"며 "전통 제사의 요소는 모인 날이 어머니 기일 날이고, 등촉을 밝히고 죽은 자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통곡한 점이다. 기독교적인 예배의 요소는 기일에 선교사와 교중 형제들을 초청해 기도하고 찬미했고 대부인 생존시에 믿음과 현숙한 모습을 기억했고 다시 기도한 점이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러한 추도예배의 모습은 우상숭배의 요소는 배제한 제사들의 요소들을 보존하면서 기독교 예배의 요소를 가미한 특색을 보여주는데, 추도예배의 전형적인 모습이다"며 "시간이 지나가면서 고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배제됐다"고 했다.
이 교수는 선교 20주년을 맞이한 1904년에 이르면 일반적인 제사 금지에 대한 신중론도 소수에게서 나온다며 "20주년 기념 선교대회에서 호주 선교사 엥겔은 선교사들이 제사 금지를 비롯해 한국의 여러 관습을 일방적으로 폐지하고 바꾸는 것보다는 한국교인들의 성령의 인도 하에 스스로 결정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신중론을 제시했다"고 말했다.
또 "그 후 토론에서 무스는 한국 기독교인들은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며 그러한 이해의 조건에서 제사를 포기했다고 했고 게일은 한국인들을 부드럽게 대하며 그들이 신앙 안에서 성장할 것으로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며 "반면에 마펫은 모든 기독교인들이 조상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아니며 교인들은 그러한 기도를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며 이것이 당시 다수 선교사들의 입장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교수는 1911년 10월 15일 '그리스도인회보'에 실린 이천 남감리회 첫 목사였던 김흥순이 쓴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엄격하는 금지하는 내용의 글을 소개하며 "이 기사를 보면 1911년경에 신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제삿날에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김흥순 목사는 조상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조상 제사와 다름 없고, 죽은 후에는 회개할 기회가 없으며, 성경에 없는 법이고, 장례식에 사람이 모이는 것은 산 자를 위해 기도하러 모이는 것이라 지적하고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지 말도록 당부했다"고 했다.
그는 이어 "1920년대에 조상제사를 둘러싸고 또 한 번의 논쟁이 일어났다. 동아일보는 1920년 9월 1일자에 영주 권성화의 아내 박씨가 '남편이 예수를 믿고 제사를 폐지하자 자살한 사건'을 보도했다"며 "이 사건이 보도되자 월남 이상재는 '조상부모의 신주를 가지고 한말로 우상이라 부르며 부모의 혼령 압헤 절하는 것을 경솔히 우상숭배라는 일함아뢰에 타메를 하는 것이 엇지 반다시 올켓다 할 수 있으리요 --- 나의 생각에는 오직 돌아간 부모를 사모하여 그리워한다하는 그 마음으로 하는 일이라면 엇더한 례식을 행하든지 다 반대할 수 업겠다 하겟스며 원래 조선사람의 도라간 부모의 령혼을 위하여 평생을 두고 제사를 지내는 것은 오직 그 부모를 그리며 사모하는 효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예수교와 아무 상관이 없을 뿐아니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신 하나님의 가르침에 크게 적합되는 일일 것이라' 하였다"고 소개했다.
이 교수는 "이 때 동아일보는 제사가 허례허식으로 흐른 것을 비판하면서도 유교의 제사제도는 기독교의 사상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니 제사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며 "그렇지만 이 논쟁에서 교회는 양주삼 목사를 비롯한 제사금지 입장을 채택하여 시행하게 됐다"고 했다.
그는 "1920년대의 제사 논쟁 이후에 제사문제에 대한 더 심도 있는 논의가 1960년대의 토착화 논쟁에서 다루어졌다. WCC의 신앙과직제위원회 활동에 영향을 받으면서 우리나라에서 신학의 토착화 논쟁이 발생했고 그 주장의 핵심은 복음과 문화는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며 "토착화논의가 처음에 신학의 토착화에서 출발했는데 진행되는 과정에서 제사문제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전개됐다. 초기 선교사들이 한국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제사를 우상숭배로 단죄했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고 설명을 이었다.
그러면서 "윤성범과 변선환을 비롯한 감리교 신학자들이 신학의 토착화를 주장하면서 제사 문제를 검토하게 됐다"며 "윤성범은 우상제물을 먹는 자와 먹지 못하는 자가 있는 바와 같이 제사도 믿음이 강해 불신자와 같이 행하는 자와 행하지 못하는 자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제사를 하지 않으면 부모를 생각지 않는다는 태도, 부모의 기일을 잊어버리고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태도가 기독교인들에 대한 반감을 사기 쉬운 것이라고 지적한다"고 말했다.
이어 "윤성범이 제사에서 종교성을 부정하고 조상에 대한 효도의 실천으로 이해할 것을 제시한 후에 제사문제에 대한 논의가 좀 더 활발하게 이루어졌다"며 "현재 기독교 안에서 조상제사에 대한 세 가지 흐름이 존재하고 있다. 첫째는 조상제사를 효행의 실천으로 삶의 현장에서 일상화된 문화적인 요인으로 보고 복음의 토착화라는 차원에서 개선하거나 수용하려는 조류로, 주로 감리교와 기독교장로회에서 발견된다"고 했다.
또 "금지적 견해는 고신과 합동측의 입장으로 제사는 조상을 숭배하는 예배이므로 엄격하게 금지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며 "중도의 입장은 통합측의 입장으로 일부는 수용하고 일부는 개혁해야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박봉배는 효성의 표현으로서의 제사는 문제될 것이 없으나 조상신이 후손에 복을 내려준다는 사상은 배척되어야 한다고 했다"며 "따라서 제의적 요소와 미신적 행위는 생활양식 혹은 효성의 의례적 행위에서 제거해야 한다는 절충적 대안을 제시했다. 현요한은 개신교가 수용할 수 없는 제의적인 요소로 조상을 신으로 여겨 절하는 것, 귀신을 부르기 위해 지방을 쓰는 것, 제상을 차리고 향을 피우는 것 등이 있다"고 했다.
또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대신해 조상의 신령이 화복을 내린다는 것과 그리스도를 대신해 조상이 천신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가 된다는 것, 그리고 죽은 조상의 혼령과 교통하는 것 등도 받아들일 수 없는 요소라고 했다"며 "그러나 개신교가 수용할 수 있는 문화적인 요소들로는 부모에 대한 공경으로서의 효의 윤리, 자신을 존재하게 한 과정자로서의 조상 양육에 대한 감사, 조상이 남긴 신앙의 모본과 교훈, 생전의 삶에 대한 추모 등이 있다. 그리고 성묘를 통한 부활 소망의 인식과 그리스도 안에서 조상들과의 연합 등에 대해서는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조상이 영이 아닌 그리스도의 성령 안에서 일치를 경험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은선 교수는 "제사를 금지할 때 제사의 우상숭배적인 요소를 제거한다 해도, 제사가 가지고 있던 효도, 조상기림, 가족공동체 유지의 미풍양속을 어떻게 지속할 것인지는 중요한 과제이다"며 "핵가족제도와 개인주의화, 세속화, 도시화의 결과로 가족이 붕괴되는 때에 추모예배를 통한 가족공동체 형성과 효성의 보존은 중요한 과제이다"고 강조했다.
또 그는 '부모를 부양하는 것'에 대한 통계청의 최근 여론 조사 결과를 소개하며 "2006년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답변이 7.8%에서 2012년 13.9%로 배 가까이 늘어났고, '가족이 공동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답변은 2006년 63.4%로 과반을 넘었지만 2012년 33.2%로 줄었다고 한다"며 "이러한 인식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조상에 대한 효보다 더 절박한 것은 살아있는 부모에 대한 기독교적인 효사상을 교육하는 것이라고 판단된다"고도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