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십자가
십자가 Photo : Cdoncel/ Unsplas

이민교회 학술연구를 위한 바울세계선교회를 이끌며 고 김종환 목사의 신학적 유산들을 정리하는 작업도 이어가고 있는 한영숙 목사가 고난주간을 맞아 김종환 목사의 생전 설교를 전해왔다. 문학적, 신학적 영역에서도 많은 재능을 가졌던 고인은 평생 목회의 보조자로 헌신하는 자리에 있으면서,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귀한 설교문들을 남겼다. 그의 글과 설교는 오늘의 이민교회에도 여전히 깊은 울림을 주는 소중한 자산이어서, 본지는 이를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고 해봉 김종환 목사는 1980년 도미 후 KPCA 뉴욕노회에서 안수받고 1982년 고려교회(현 메트로폴리탄연합감리교회)를 공동 창립했으며, 바울세계선교회를 설립하고 『신앙과 교회』를 발행하며 이민교회 신학의 지평을 넓힌 목회자다. 해당 설교는 1992년 <신학과 신앙>에 실렸다. 다음은 설교문 전문.

나사렛 예수의 죽음
(시작과 끝을 맺는 힘을 가진 죽음)
김 종 환 목사

고대 희랍의 신들은 이 세상을 초월할 자신이 없어서 세상의 인간들처럼 서로 질투와 경쟁 속에서 살았으며, 한계를 가진 빈약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세상에 대한 정의감과 공평성에 관한 문제에 직면하여서는, 늘 자책을 느끼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신들 사이에서도 기분 나쁜 존재로,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던 죽음의 신은 인간들에게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부여함으로써 자신만은 모든 다른 신들보다 정의롭고 공평을 행사할 힘을 지녔다고 자부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였다.

참으로 모든 사람 앞에 죽음은 언젠가, 어디선가, 한번은 반드시 강력한 절대에 가까운 힘으로 나타난다. 이 힘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것이며 모든 세상의 생명을 무색하게 하는 엄청난 것이다. 이러한 절대의 힘을 가진 죽음 때문에 인간의 마음이 언제부터인가 흔들리게 된다.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막연하나마 죽음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기 시작한다. 성장해감에 따라 인간은 죽음이 자신에게 어떻게 부딪쳐 올 것인가를 초조하게 생각하게 된다. 죽음의 그늘은 인간의 마음에 고통과 번민을 앞세우고 피할 수 없는 힘으로 그 마음에 서서히 자리를 잡는다. 파멸에서 벗어나려는 끈질긴 경쟁도, 허무에 도전하는 착실한 삶도, 국가의 흥망을 가름할만한 영웅적인 무용도 죽음 앞에서는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없으리만큼, 그런대로 자유로운 인간의 언어조차 빛을 잃는다. 이러한 죽음에 부딪힘으로 말미암아서 인간의 모든 삶이 의미를 잃게 되면, 성숙한 사람들은 삶이 지니는 피할 수 없는 한계 된 상황을 깨닫고 절대의 세계, 곧 초월의 세계를 향하여 자신도 모르게 몸이 굳어지며 순간적이나마 먼 하늘과 자신의 존재를 살피는 종교적인 경건한 자세를 지니게 된다.

이러한 죽음의 그림자가 불러오는 종교적 질문은 종교인들을 압도하기 시작하고 생각과 양심마저 굳어지게 하는 부담을 주어서 끝내는 일반 언어로 해답을 얻으려고 하는 오해를 일으킨다. 즉 자신이 속해있는 종교의 가르침이 최고의 신의 섭리와 능력을 지닌 것이므로 인간은 이것으로써 죽음을 이해할 수 있거나 죽음을 피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제아무리 우월한 종교집단의 성문화된 교리나 가르침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의 양심은 이것들이 죽음을 해결하고 있다고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죽음에 대한 끊임없는 불안과 부담은 차라리 분주한 사회생활이 이를 잊어버리게 해준다. 잠시나마 우리는 죽음이 우리로부터 아직은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하는 다행스런 느낌 속에서 죽음의 문제를 잊어버리고 살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종교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식자층이나 지도층의 종교인들은 끊임없이 그들의 교리의 내용을 보완할 언어를 모색하거나 언젠가는 모든 인간에게 부딪혀올 죽음에 대한 질문에 답하려고 <죽음의 저편>을 이야기하고 <죽은 후의 신천지>를 곧잘 표현하고는 한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이러한 언어에 귀를 기울이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절망으로부터 벗어나서 우선 긴장을 식히고 안도의 숨을 돌리는 여유를 가지므로 죽음을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 그러나 이것은 마치 임산부가 태아로부터 오는 고충과 부담에서 벗어나려고 진정제를 복용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한계를 나타내며 동시에 인간의 한계 된 시간과 공간 상황에 직면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언어인 <죽음>에다가 <저편>이라는 일반공간적인 언어를 복합시키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더욱이 일반시간적인 연속성의 의미를 부여하려고 <죽음>에다가 <후>라는 일반시간적인 언어를 구사하기는 더욱 어렵다. 물론 인간이 구사하고 있는 언어 모두가 절대성 앞에 불완전한 것이지만, 더욱이 <생명의 근원> 또는 <죽음>의 문제에 대하여서는 인간의 일반언어(일반의 시간과 공간 개념)로서 이를 구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죽음> 자체는 인간의 사유나 경험으로써는 절대한계의 상황에 속하며 그것은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죽음>이야말로 절대의 세계, 즉 신(종교적 표현을 사용한다면)의 것이며 인간이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절대의 세계와의 부딪힘(Encounter)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이라는 것을 종교적인 신앙고백으로 보나 학문적인 존재 인식에서 보아도 <저편> 또는 <후>라는 말 앞에 옮겨 놓는 자세는 있을 수 없다. 죽음을 대하는 종교적인 자세는 죽음이 몰고 오는 모든 문제를 자신의 선택으로 불러일으키는 용기와 힘을 가지지 않는 한, 죽음과 마주 서는, 죽음을 죽음으로 맞는 신앙을 체험할 수 없다. 그렇지 못하면 종교는 어떠한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 특히 죽음이 죽음으로 끝남을 받아들여야만 종교성에서 보는 절대성을 체험하고 삶 속에서 절대적인 초월의 세계를 추구하고 체험할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일반 세속에서 오랜 시간을 통하여 숱한 노력으로 이루어놓은 풍요와 권세의 희락을 죽음 앞에서 포기하기보다는 <죽음 저편>에서 좀 더 새로운 희락을 누릴 미련을 가지게 하는 것은 종교적인 자세일 수가 없다. 그뿐만 아니라, <죽은 후의 신천지>를 이야기하므로 세상에서의 시련과 빈곤의 고통 때문에 이루지 못했던 모든 한을 죽음 이후에는 새로운 땅에서, 어떠한 갈등도 경쟁도 필요 없는 평등과 풍요의 낙원에서 풀 수 있으리라는 미련을 가지는 것은 미숙한 신화적인 표현밖에는 되지 않는다. 본래 죽음에 맞서는 상황에서 추구되기 시작하는 종교의 세계에는 인간의 삶을 즐거움으로 장식해주는 부나, 고통을 더해주는 가난과 같은 삶의 이차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관심을 가질만한 여유조차 없는 것이다.

기원 수백 년 전에 철인 피타고라스의 문하생들과 의사인 알크마이온은 죽음을 망각하거나 죽은 후에는 <저편>으로 간다는 식으로 해서 죽음에서 도피하려는 노력과는 달리 인간이 절대시간이란 한계 앞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원인이 무엇인지를 연구했다. 그들이 이 작업을 하면서 얻은 답은,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원인은 시간의 시작과 끝을 연결 할 수 있는 힘이 인간에게는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벌써 이천육백 년이 넘는 옛날에 인간의 죽음을 생명과 원환(Boundary of Cosmos)적인 시간성의 한계에서 보는 놀라운 연구를 전개하였다. 그들은 시간의 원환 속에서나마, 인간이 가진 시간의 시작과 끝이 서로 만날 수 있어서 시간이 순환(회로에 의해 나사형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편차가 전혀 없이 돌아가는 것)하게만 된다면 생명의 존재는 영원할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당시 그들은 영원한 생명의 존재를 자연적인 데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마지막이자 처음인, 또 한 번 있는 순간, 즉 절대의 죽음 앞에 설 수 있는 삶에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순간에 직면 할 수 있는 힘만이 죽음에 마주 서서 죽음을 이길 수 있으며 영원한 세계를 만날 수 있는 자리라는 것을 체험하지 못하였다.

세상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영웅적인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고 소크라테스처럼 이성에 호소하는 용기로서 죽음을 맞이한 수많은 인물이 있다. 소크라테스가 선택한 것은 죽음이라기보다는 우주질서에 참여하는 큰 뜻에서 죽음을 선택하였다고 본다. 많은 사람은 그가 죽음을 대했던 자세를 이성에 따른 여유와 행복한 것이었다고 말하지만, 그의 죽음 앞에서의 자세는 고충스럽고 초조한 면을 보여주었다. 지식을 치고의 미덕으로 알고 있었던 그가 죽음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었기 때문에 내면적으로는 매우 초조했다. 그는 죽음 그 자체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죽음이 어떻게 오는 것인가를 알기만이라도 원해서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었다. 소크라테스는 이 독배를 마시면 다리에서부터 힘이 점점 빠진다는 말을 듣고 독배를 마시고 서서히 걸어보면서 죽음이 오는 과정을 맞이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시작과 끝이 서로 만남으로 순환하는 시간, 즉 영원의 시간성 속을 살았던 자의 죽음의 순간이 아니었다. 다만 자연의 한 과정으로서 우주의 질서에 참여하고 자연적인 시간의 선상에서 한 가닥으로 영원히 생을 달리했을 뿐이다. 다시 말하면 그의 죽음은 세상의 자연적인 시간(직선 또는 나사형의 시간) 속에서 세계문화사에 참여하면서 조용히 사라져간 것이다.

죽음이란 본래 생명의 차원에 속한다고 보아서 무리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생명에 속해있는 인간의 존재 인식은 직선적인 시간성이나, 주기적인 또는 반복되는 나사형의 시간성, 또는 무시간성(잠자는 시간 표함)에서 이해된다. 그러나 생명체로서의 인간 존재의 시작은 시간성을 넘어서는 순간의 것으로 어떠한 빠르고 강력한 시간의 힘과도 관계가 없는 것이며, 오히려 시간이 무색하게 되는 상태임을 알아야 한다.

고 김종환 목사가 고려교회 협동목사로 사역하던 당시 사진
(Photo : 한영숙 목사 제공) 고 김종환 목사가 고려교회 협동목사로 사역하던 당시 사진

인간 존재의 시작과 끝의 한계점(Boundary)은 절대의 세계 즉 미지의 세계에 있는 힘과 부딪치는 순간에 근거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인간이 가진 시간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세계의 것이다. 바로 이 순간의 것 곧 존재의 시작과 끝이 마주치는 점(Ground of Being)만이 세속의 차원을 넘는 인간의 삶의 근거가 되며 종교의 세계가 설 수 있는 바탕이다. 이점만이 죽음을 가져오는 시간의 원환 속에서의 갈등을 벗어날 수 있는 초월의 세계를 향하는 길이 열리는 곳이기 때문이다. 시간이라는 엄청난 힘이 절대에 가까운 파장으로 인간의 모든 것을 단절시키고 휩쓰는 속에서 생명의 존재(Being)는 죽음을 생명의 과정으로 보고, 생명과 죽음은 양자가 모두 엄청난 힘을 지니고 마주 서는, 같은 차원의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죽음과 생명을 같은 의미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죽음은 생명의 이해와 생명의 생성의 이해없이 이해되어서는 안 되며, 시간성의 이해와 인간의 존재의식 없이 별개로서 그 자체만으로는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고대 피타고라스 문하생들의 이야기와 같이 인간은 <시작>이라는 삶의 태초의 순간과 <끝>이라는 마지막(종말) 순간을 이을 힘을 가지지 못하였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는 예수의 죽음에서 <시작>과 <끝>을 연결하는 힘을 발견하고 체험하는 위대한 역사 속에서 존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나사렛 예수의 죽음은 소크라테스의 그것처럼 이성에 의한 착실한 삶 속에서 끝을 질서에 장식하여서 직선적인 자연의 시간 속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는 생애의 삶과 죽음을 분리함으로 우주의 원환의 시간 밖으로의 귀로를 걷지도 않았다. 그의 삶은 매 순간순간이 엄청난 죽음들이었다. 그의 귓전에는 부딪치는 죽음의 음향이 자신 속에서 요란하고 다급하게 들려오는 소리가 항상 울려왔다. 그에게는 삶의 시작과 죽음의 종말을 분리해서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삶의 시작이 곧 죽음이고 죽음이 곧 삶의 시작인 그의 삶의 존재는 인류의 궁극적인 질문 앞에 해답으로 제시될 참으로 엄청난 힘이었다. 그 놀라운 힘은 우주의 직선적인 시간의 차원을 넘어가는 것이며, 그 힘은 원환 속에서의 순환의 시간을 넘어가는 것이다. 동시에 그의 힘은 존재 이전의 생명의 무시간성을 포용하는 모든 세속의 일반시간을 집어삼키는 새로운 역사를 창조할 힘이었다. 오늘 이 시대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에서 새롭게 기원이 시작된 것이며, 그의 십자가의 죽음은 끝없는 죽음의 힘을 이긴, 이미 다시 살게 된 구원된 역사인 것이다.

우리는 삶의 시작이 십자가의 죽음이고 십자가의 죽음이 삶의 시작이라고 하는 것을 강하고 위대한 용기로서 받아들인 무한한 순간의 종말적인 체험을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본다. 그가 오심은 죽음의 임박성에서의 시작이며, 그의 삶은 삶속에서 죽음과의 투쟁으로 전개되었다. 바꿔서 말하면 죽음 속에서 삶의 투쟁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그의 생애의 시작과 종말적인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볼 수 있다. 그의 삶의 과정은 용서와 참회의 눈물과 피어린 고독으로, 죽음 앞에서 긴박하게 순간순간을 살고 죽는 것을 매듭짓는 생애였다. 이러한 긴박성은 마가 복음서에 잘 묘사되어 있다. 그러기에 그의 선포는 세상을 이긴 자만이 가지는 힘이었고, 철저히 자신을 내어주는 참사랑이었으며, 그의 삶은 영원한 진리를 만나는 기쁨과 놀라운 감동으로 넘쳐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에게는 자신의 조상을 나열하는 족보 이야기나 어떤 착실하고 모범적인 유대인의 가문이나 자신이 이룬 어떤 정치적 또는 사회적인 업적이나 지식이나 종교적인 경건성을 설명하고 자랑할만한 시간적인 여유도, 또한 그러한 언어조차도 없었다. 그에게는 삶의 구체적인 계획이나 죽음 이후의 이야기들을 표현할 의미도 관심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의 생애는 죽음에 쫓기고, 죽음을 쫓고, 죽음을 삼키는 것의 연속적인 삶의 순간들이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막1:15) 는 긴박한 종말의 표현으로 시작하여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막15:34) 라고 하는, 생명의 근원을 바라보며 부르짖는, 긴박한 고독의 표현으로 끝을 맺음이 그의 삶의 전부가 아니었던가...

예수의 삶은, 종말로 부딪치는 죽음을 참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종교성과 자연시간의 한계를 벗어나는 상태로서 죽음과 만나는 생명의 순간의 영원성을 보이고있다. 성서는 이러한 시간을 초월하는 순간의 차원에서 그의 그리스도 됨의 역사적인 위치를 표현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막8:27)는 질문에서 대답 된 바와 같이, 죽지 않고 영원한 하늘나라로 올라갈 수 있는 전설적인 존재, 즉 유대교의 엘리야도 아니며 이스라엘 민족의 독립과 정의를 실현시키려는 어떤 선지자도 아니었다고 말한다. 당시의 정황은 이스라엘의 독립운동가가 아니면 그 사회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던 시대이며, 로마 총독부와 어떤 관계를 가진 인사가 아니면, 대중 앞에 설 수 없는 시대였다. 그러나 예수의 삶의 길은 그 양자의 어느 길도 아닌, 누구도 거들떠보지도 않고, 이해도 동조도 받기 어려운 길이다. 그 길은 몇 해를 따라다니던 제자들까지도 전혀 이해되지 않는 길이다. 그는 절대의 세계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질문하는 철저하게 죽음 앞에 서는, 전혀 다른 삶의 역사를 창조하는 그리스도의 길, 인류 구원사에서의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의 삶을 선택하여서 이를 보여주고 있다.

고대 유대교가 발전시킨 메시아사상의 천여 년의 전통 이전에, 그 사상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오천 년의 역사를 거스르는 그리스와 이집트의 문화권 속에서 성숙한 종교적인 자세를 지닌 사람은 죽음에서의 해방이 인간의 궁극적인 관심임을 알았다. 이러한 종교적인 전통에서 나타난 그리스도의 길은, 그 당시에 이스라엘 민족의 독립운동가들이나 로마 정권에 연관을 맺어서 어떤 사업(Project)을 경영하는 자들의 길과는 달랐다. 저들은 시간의 한계 속에서만 존재할 뿐인 일들에 몰두했다. 그러나 예수에게서는 인간의 시간의 한계를 넘어선, 즉 죽음과의 투쟁만이 그의 삶의 전부였기에 그의 십자가의 죽음은 영원한 삶의 자리로, 부활의 생명이 나타남으로 선포되어진 것이 아닐까 한다. 물론 로마제국의 정권하에서 정치적 경제적 언어를 구사하지 못하거나, 유대교의 전통과 그 문화사회 속에서 어울려 말하고 살지 못하는 인간들은 당시에는 노예나 천민의 대우밖에 받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자들이었다. 그러기에 <자칭 그리스도>라고 불린 한 사람의 십자가 처형은 수천의 잡범들의 십자가 처형과 같으며, 무모하고 참람했던 자들의 처형 속에서 보잘것없는 나약한 죽음이 된다. 그러기에 길 가던 사람들이 예수의 십자가를 희롱꺼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겼고, 또한 오늘을 사는 우리도 이를 엿볼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이 죽음 속에서 살고 삶 속에서 순간순간 죽음을 체험하는 종교적인 자세를 지니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의 길을 이해할 수 없으며 그에게 속한 자가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서 매 순간을 살지 못하는 한 우리는 그리스도가 구원한 새로운 영원한 역사에 참여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러한 새로운 역사와 구원에 이르는 삶의 시작은 인간의 이성과 감정으로써 도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붉은 색깔을 본 경험이 없는 어린아이들에게 어떤 이론이나 어떤 형태의 감정으로도 붉은색을 인식시킬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는 다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우리의 삶을 향한 죽음의 선언으로 고백할 수 있는 용기와 체험적인 절대의 만남에서만 그의 십자가의 죽음은 영원한 삶으로 부활의 힘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체험하지 못하고 평생을 죽음의 그늘 속에서 살다가 죽음앞에 부딪쳐 죽음을 경험하지 못하고 생을 끝내는 세계가 있다면 거기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는 오해된 상태로, 옛날 사건으로 무의미하게 묻혀버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