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성경에 예수님 대신 풀려난 한 사람이 있다. 그는 ‘바라바’라는 사형수였다. 바라바는 단순한 좀도둑이 아니었다. 성경은 그를 ‘강도’(요 18:40)이자 ‘살인자’(눅 23:19), 그리고 로마에 대항한 ‘폭동 주동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오늘날로 치면 '1급 테러리스트'이자 이미 사형이 확정된 흉악범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2] 당시 군중들이 성자요 존경받는 랍비였던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고, 그분 대신 흉악범 바라바를 풀어달라고 외친 것이다. 대제사장들의 선동 때문이었다고는 하지만,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를 고치셨던 예수님을 버리고 살인자를 선택했다는 사실은 도무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어린 시절 나는 이해가 가질 않았다.
[3] 당시 그 군중들을 생각하면서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저럴 수 있을까?”라며 분노하기도 했다. 하지만 성경을 깊이 알아갈수록 한 가지 충격적인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때 예수님 대신 풀려난 바라바가 다름 아닌 나였다는 사실이었다.
만약 흉악범 바라바가 석방된 것을 ‘말도 안 되는 불공정’이라며 거부한다면, 죄인인 내가 예수님의 희생으로 자유를 얻었다는 복음의 원리 또한 거부해야 한다.
[4] 바라바의 사면을 부정하는 것은 나의 구원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그가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그 ‘비논리적인 은혜’가, 바로 오늘 내가 누리고 있는 구원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바라바와 나는 ‘대속’이라는 같은 배를 탄 죄인임이 깨달아졌다.
우리는 종종 “나는 바라바처럼 흉악한 죄인은 아니야!”라고 위안을 삼곤 한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선 죄의 크기가 중요하지 않다.
[5] 누군가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내 이기심으로 남에게 상처 주었던 모든 순간이 하나님께는 결코 가볍지 않은 죄이다. 결국 우리 모두도 바라바처럼 영원한 죽음이라는 형벌이 확정된 사형수였다.
복음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내가 달려야 할 거친 나무 십자가에 예수님이 대신 누우셨고, 그분이 못 박히실 때 비로소 내가 자유를 얻게 되었다는 사실 말이다.
[6] 신학자들은 이것을 ‘위대한 교환’(The Great Exchange)이라고 부른다.
이 놀라운 대속의 신비를 잘 보여주는 실화가 하나 있다.
1941년, 악명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한 죄수가 탈출하자 간수들은 수용소 규칙에 따라 본보기로 죄수 한 명을 굶겨 죽이기로 했다. 지목된 한 사내, 가요브니체크는 고향의 처자식을 생각하며 절망 속에 울부짖었다.
[7] 그때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가 조용히 앞으로 걸어 나와 말했다.
“나는 가톨릭 신부요. 저 사람에겐 가족이 있으니, 그 대신 내가 죽겠소.”
콜베 신부는 대신 지하 감옥에 갇혀 죽음을 맞이했고, 살아남은 가요브니체크는 평생 그 신부의 희생을 전하며 살았다.
그는 매년 신부가 대신 희생된 날이면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고백했다.
[8] “그분이 죽었기에, 제가 오늘 숨을 쉬고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남은 생을 콜베 신부를 대신해서 모범적인 삶을 잘 살았다고 한다.
육신의 죽음을 대신해 준 신부에 대한 고마움이 커서도 그렇게 변화된 삶을 잘 살았다면, 영원한 죽음에서 해방시켜 주신 예수님을 위해서는 어떤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할까?
자유의 몸이 된 바라바는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갔을까?
[9] 성경에 더는 그에 관한 기록이 없다. 이후에 변화된 삶을 살았는지, 이전과 다름 없는 살다 갔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오늘의 바라바인 나와 우리의 자세다.
이제 나는 바라바와 군중들을 손가락질하던 손을 거두고, 조용히 가슴에 손을 얹는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한다.
[10] “주님, 제가 바로 그때 그 바라바였습니다. 그동안 저의 무거운 죄는 보지 못한 채 타인의 큰 허물에 주목하며 판단하고 정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아무 자격 없는 저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그 사랑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저를 살리신 그 은혜에 빚진 자로서, 이제는 저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며 살겠습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