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기독교 컨설팅 업체인 '프로젝트 케어'는 1900년부터 2010년까지 기독교인과 이슬람의 수를 비교해 발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기독교인들의 수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비슷했으나 이슬람 수는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기독교는 이러한 이슬람 종교인의 급속한 증가를 큰 위협으로 느끼고, 이슬람 선교에 큰 관심을 갖기에 이르렀다. 때로는 기독교 선교사들이 “선교”라는 이름 하에 공격적인 포교 활동을 벌이다 이슬람과 큰 갈등을 빚기도 하고, 감금되거나 납치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한국에서도 이슬람 종교가 적극적인 포교활동을 벌이면서 이에 대한 기독교 교회의 대응이 큰 문제로 떠올랐다. 이러한 이슬람 종교의 출현과 성장에 대한 기독교 교회의 대안은 무엇일까?
종교개혁가 루터가 살던 시기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유럽 대륙에서 이슬람의 출현은 교회에도 큰 문제였다. 이 당시 루터도 이슬람 종교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면서, 기독교 교회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조언했다. 이러한 루터의 견해와 조언이 오늘날 새롭게 출현한 이슬람의 성장 앞에 기독교 교회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알려주는 좋은 참고가 되리라 본다.
루터는 이슬람에 대한 두려움이 지배적인 시기에 살았다. 터키는 유럽에서 그들의 군사력을 지속적으로 확장하여 1529년에는 비엔나의 문턱까지 위협했다. 말론 대학(Malone University)의 그레고리 밀러(Gregory Miller) 교수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어느 면에서 터키의 위협은 매우 무서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많은 독일인들은 합스부르크(Habsburgs)와 오트만 제국(Ottoman Empires) 간의 충돌을 정치적 힘겨루기가 아닌 기독교 국가와 최대의 적인 이슬람간의 투쟁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1518년 초, 루터는 이슬람 신앙을 “하나님의 재앙”(scourge of God)과 동일시 했다. 그는 교황의 가증스러운 것들을 용인하는 죄된 기독교 국가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 이슬람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터키의 위협은 독일 국민들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도록 하기 위한 반면 교사로서 역할이라고 보았다.
이 시기 루터의 저술들은 터키의 위협 앞에서 기독교인들이 회개하고 내적으로 준비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이는 ‘95개 논제 해설’(Explanations of the Ninety-Five theses (1518)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여기서 루터는 “터키와 싸우는 것은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해 우리에게 오신 하나님에게 저항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1529년 “터키에 대한 전쟁에 관하여”(On War against the Turk)에서도 루터는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여 터키를 이 세계를 벌하시는 ‘하나님의 분노의 약탈자’로 묘사한다. 이러한 확신 때문에 루터는 지도자들이 사람들에게 “회개와 기도”를 권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530년 “터키의 종교와 관습들에 관한 글의 서문”(Preface to the Tract on the Religion and Customs of the Turks)에서, 루터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우리는 터키와 모하메드(Mohammed)의 종교는 의식에 있어 훨씬 훌륭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나는 기독교인들과 성직자들을 포함한 우리의 관습보다 그들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있다. 금식, 기도, 사람들의 모임뿐만 아니라, 음식, 옷, 거주지 등 모든 면에서 그들이 갖는 고상함과 순전함을 우리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다. 도리어 그들에게 설득 당하지 않는 다는 것이 불가능 할 정도다.” 루터는 터키인들의 삶의 방식을 칭찬하면서, 도리어 가톨릭과 로마 교황을 조롱했다. 동일한 글에서 루터는 또한 “우리의 종교인들은 무슬림과 비교할 때 너무 어둡고, 너무 세속적이다.”라고 말한다.
루터는 마호메드주의(Muhammadism)의 종교와 관습들이 출간되어 널리 알려져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1542년 루터는 라틴어로 번역된 코란(Qur’an)을 갖는 것에 대해 기뻐했다. 처음에 루터는 이슬람을 적절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코란을 읽었다. 또한 인쇄업자 오포리우스(Oporinus)에 의해 시작된 코란의 라틴어 번역본 출판은 금지되어 있었는데, 루터는 1542년 바젤(Basel) 교회 회의에 이것을 철회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루터가 다분히 이슬람을 용납하고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도리어 루터의 의도는 이슬람의 교리가 갖는 오류와 잘못을 지적하고 이에 대해 대항하기 위함이었다. 이 때문에 루터는 이슬람 종교는 유대교와 기독교 그리고 이교도들의 신앙을 짜집기한 종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슬람의 오류를 특별히 기독교 구원론과 칭의론과 연관하여 다음 두 가지로 지적한다.
첫째는 이슬람의 신앙은 행위로 구원받으려는 신앙이다. 루터는 이슬람의 신앙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경건하고 의로운 자라면, 선한 행위를 행하는 자라면, 누구든 구원 받을 수 있다.” 루터에 의하면, 이슬람인들의 기도는 “하나님 내가 죄를 속죄하도록 저에게 시간을 좀 내주세요.”이다. 따라서 이슬람은 그리스도의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자신이 선택한 행위를 통해 거룩하게 되려는 ‘잘못된 의’(false righteousness)를 갖고 있다.
둘째로, “이슬람은 이전 그들의 조상 네스토리우스(Nestorius)처럼, 예수는 단지 마리아의 아들이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라고 믿는다. 이슬람은 그리스도를 “최고의 선지자이고 위대한 사람”으로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모하메드와 같은 위대한 예언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슬람은 오직 모하메드에게만 경배하고 예배한다. 따라서 이슬람은 참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반대하고, 성령을 통한 참 하나님이자 동시에 참 인간이신 예수의 증언을 거부한다. 이는 기독교의 가장 핵심이 되는 교리인 그리스도에 대한 두 본성 교리가 서로 다르다는 데 이슬람의 오류가 존재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16세기 동안 유럽에서 이슬람 위협과 연관한 루터의 견해와 대응은 다음의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이슬람의 출현은 기독교인과 교회에 ‘회개와 기도’를 하게 한다. 루터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악의에 찬 기독교인들과 교회가 회개하고,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만 한다고 루터는 충고한다. 그리고 이슬람의 순전한 삶의 방식과 태도는 당대 기독교인들의 그릇된 종교적 관습과 태도를 돌아보고 개혁하게 하는 촉매제임을 분명히 한다.
둘째, 이슬람 신앙에 대한 연구와 성찰을 통해 그들이 갖는 모순과 그릇된 점을 지적하는 일이다. 루터의 말처럼,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행위로 구원받으려 하고, 참된 하나님이자 참 인간이신 그리스도의 두 본성 교리를 거부한다. 이는 이슬람이 종교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깨달음을 강조하는 철학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 우리 기독교회도 루터 당시와 비슷하게 이슬람의 출현과 위협에 직면해 있다. 이를 우려해 이슬람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판과 무모한 선교와 개종의 노력보다, 도리어 너무나 세속화 되어버린 우리 신앙의 모습을 회개하고, 이슬람 신앙이 갖는 문제점을 바로 알고 전하는 것이 오늘날 이슬람에 대한 기독교의 올바른 대응 방법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