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교회 다니는 목적, 그것의 가장 핵심은 죽어서 천국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천국이 있느냐, 누가 가봤느냐”하는 이런 이야기들을 들을 때 자신이 아직도 천국에 대해서 믿어지지 아니하는 어떤 의심 같은 회의가 있다면 그 인생은 아직도 성령에 이끌리는 신앙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신 이후 사도들을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은 듣는 심령들에게 권세와 능력으로 깨닫게 하시고, 체험도 주시고 감동하시어서 그 말씀이 믿어지는 믿음으로 회개하게 하시고, 그래서 거듭나게 되고, 이젠 영적인 내세 소망으로 하늘나라를 바라보는 믿어지는 믿음이 하나님이 성령으로 가꾸어 주신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육신에 어떤 핍박이 오고 환란이 오고 재산을 빼앗기고 옥에 갇히고 매를 맞아 고문을 당하고 죽인다고 총칼로 위협을 해도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붙들고 가꾸어 주신 믿음이기 때문에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어지도록 우리를 사로잡고 감동감화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다니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하지 아니하고, 들을 때는 그 말씀에 기대감이 있는 것 같아서 아멘은 부담 없이 했으나 돌아가서 세상살이, 자기 생활에 접어들면 금방 그 말씀은 간곳이 없고, 육신이 현실적인 정욕을 채우기 위하여 세상을 바라보고, 불의와 죄악에 휩쓸리고 타협하고 그리고 마귀에게 이용당하는 온갖 죄악을 일삼기도 합니다.
1. 세상에는 많은 교회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약 4만 8천개의 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5만 2천개쯤 있었는데 그동안에 약 4천개의 교회들이 문을 닫았다고 합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죠, 하나님이 시작하신 교회,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끌어 가시는 교회라면 절대로 문을 닫을 일이 없을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의 목적을 위하여 사람의 방법으로 잘못 시작 했었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몸된 교회라 할 수가 없습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할때 루스드라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앞에 앉아있고, 걸어 본적이 없는 나면서 앉은뱅이된 자도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 신세를 비관하면서 불구된 앉은뱅이로 인하여 자기 인생은 비참하게 됐다고 항상 불만 속에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사도바울의 설교 말씀을 듣다가 하나님이 성령으로 그 복음의 비밀인 구원의 도리를 깨닫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몸은 불구가 돼서 앉은뱅이지만 영혼이 하나님 앞에 소망을 얻겠다는 기대감이 자꾸만 부풀어 오를 때 설교를 하던 사도바울이 영감적인 눈으로 보니까 그 사람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어 보였습니다.
설교를 하다가 중단하고 그 사람을 향하여 손짓하면서 “네 발로 일어서서 걸으라”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갑자기 다리가 펴지면서 벌떡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합니다. 거기에 설교 듣던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믿겠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교회가 부흥되니까 그곳에 사는 유대인들이 사도바울의 설교를 비방하고 대적하고 또 여러 모양으로 죽이겠다고 계획을 세우고 깡패들을 사서 동원시켜 해치려 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그곳에서 도망을 가야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우리 같은 입장에서도 외국 교회가서 부흥회 해주고 그 교회가 성령으로 회개하고 거듭나서 바로 서게 되면 은혜가 충만하고 사랑이 뜨겁고 목자와 양떼가, 양떼와 양떼가 새 힘을 얻고 일어서서 결속된 모습으로 다시 새 출발 하는 부흥의 추세,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어 쓰시는 역사인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때로는 핍박을 받기도 합니다. 하늘나라를 가기 위해 예수님을 믿는 것은 평안하고 행복하고, 부자되고, 이런 것이 아닙니다. 환난과 핍박, 행패와 고통을 당하고 죽인다는 위협을 받으면서도 믿음을 버릴 수 없는 것은 천국 못가면 지옥에 떨어져야하니까, 지옥에 가면 꺼지지 않는 유황불에 영원히 시달리는 고통을 알기 때문에 하늘나라 가야하겠기 때문입니다.
믿음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인간의 의지적인 타락한 이성의 결단으로 예수나 믿어보자는 것과, 또 다른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 택하셨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성령으로 집중적인 역사를 하셔서 그 인간의 의지를 성령이 꺾어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을 불가항력적 은혜라고 합니다. 성령이 집중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안믿어 안믿어 하다가 성령께 점령당하고 사로잡히고 나니까 성령의 감동에 의한 깨우침이 ‘아! 이것이 진리구나’하고 믿어진다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 물위로 걸어 오셨다는 것, 사람의 이성으로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성령의 감동을 받으면 믿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령이 충만하고 내세의 소망을 목적으로 살겠다는 사람들에게 핍박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세상은 마귀가 다스리는 생지옥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적진 속에 들어간 입장과 똑같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8~19절에 보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나를 먼저 미워 한 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 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이것은 예수님이 직접하신 말씀으로 너희가 성령을 받고나면 세상의 마귀앞잡이들이 너희를 영적으로 훼방하고 미워하고 대적하면서 원수로 취급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희가 마귀에게 속하였다면 마귀가 자기에게 속한 것을 사랑 할 것이겠지만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도리어 세상에서 예수님께 택하심을 입은 사람이된고로 세상의 마귀와 그 앞잡이들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소속이 달라졌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5장 20절을 보면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 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에 기대를 가졌습니다. 뭐냐 하면 내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지켜 살면서 그 예수님의 말씀을 여러분들에게 가르치고 전하는 것은 내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실천하여 살려고 애쓰는 것처럼 여러분들도 이 목자가 성령의 감동으로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처럼 믿음으로 살 것이라고 기대되기 때문입니다.
3. 본문으로 돌아가서 디모데후서 3장 10절~11절을 보면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핍박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핍박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게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하셨습니다. 이 세상 사는 날 동안 예수님 안에서 더 온전한 믿음, 성령이 충만하고, 순수한 영적 체질 신앙으로 믿음 지켜 살기를 힘쓰는 사람일수록 세상으로부터 더 큰 환난과 대적, 훼방과 고통을 당하게 되어있습니다. 악한 사람들 곧 마귀에게 속한 사람들은 자기가 남을 속이기도하면서 자기도 속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은 14절 말씀처럼 너는 진리를 배우고 확신한 일게 거하라고 하십니다. 확신한 일이란 헬라어로 ‘에피스토테스’로 믿어지는 믿음의 생활을 말합니다. 이것은 다른 어떤 이단이 어떤 교리를 가지고 우리의 신앙을 흔들어도 끄덕도 하지 아니하고 믿음이 아주 확고부동해서 절대로 동요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믿음을 교리적인 말로 사람들에게 가르칠 수 있고 증거해보일수도 있지만, 그보다도 여기서 ‘에피스토테스’라는 말의 뜻은 네가 믿어지는 대로 네 믿음의 진실을 행동으로 나타내 보이라는 것입니다.
15~16절에서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뜻은 베드로후서 1장 21절에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령의 바람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깨달아야 하는 것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이 성령으로 지시해서 기록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왜 하나님이 성령으로 기록하게 하셨느냐 하면, 죄인들이 영적인 교훈을 받아 진리를 깨달음으로 하나님 앞에 책망을 듣고 회개해서 바른 사람, 신자, 성도가 되고 또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하고도 남음이 있도록 온전케 만들어 줄 수 있도록 가르치기 위하여 하나님은 성령으로 자기 말씀을 기록하게 하셨고, 지금도 교회에서 그 성령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은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 성령에 이끌리는 사람,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선한 일에 온전히 쓰임받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