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라는 단어를 한마디로 정의해 본다면,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상복 씨가 쓴 '배려'라는 책에서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 중 아스퍼거와 사스퍼거, 두 종류의 사람을 설명하여 준다. 아스퍼거 종류의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입장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세계 속에서만 갇혀 있어 괴팍스럽기는 하지만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많지 않은 사람이다.
반면에 사스퍼거 종류의 사람은 이기적인 사람으로 남의 입장을 알면서도 자기 욕심 때문에 이기적인 행동을 하며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입장은 전혀 안중에도 없고 다른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도 없는 사람이라 한다. 사실 모든 사람에게는 배울 점이 있다. 왜냐하면 심지어 무례한 사람의 언행을 통해서도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행실과 배려를 바로 잡게 해주는 스승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태도 또한 깊은 배려라 할 수 있다. 이 책의 주인공인 위차장은 상대방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 줌으로써 얻어지는 중요한 2가지를 이렇게 설명한다. 하나는 상대방의 말을 들어 줌으로서 다른 사람들의 얼굴 표정이 밝아지는 것과 다른 하나는 자기가 생각지 못한 다양한 많은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배려란 어떻게 보면 일방적으로 한쪽에서 관심 가져 주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배려란 베풂과 동시에 자기도 모르게 베풂을 받는 것이며 관심을 가져주는 동시에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서로가 더불어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만약 자기 관점에서만 생각한다면 어리석고 이해되지 않는 일 투성일 것이다. 이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앞을 못 보는 사람이 밤에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한 손에는 등불을 들고 길을 걸었다. 그와 마주친 사람이 물었다. '당신은 정말 어리석군요, 당신은 앞을 보지도 못하면서 등불은 왜 들고 다닙니까' 그가 말했다. '당신이 나와 부딪치지 않게 하려고요. 이 등불은 나를 위한 것이라기 보다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시각장애인이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소리를 외쳐 예수님 뵙기를 간청할 때, 많은 무리와 제자들까지도 조금도 시각장애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지 않고 시각장애인을 책망합니다. 그 시각장애인을 책망한 이유가 뭘까 생각해 보니, 시끄럽기도 하고 귀찮게도 하고 대중들 앞에서 예의 범절이 없어 보였을지 모릅니다.
장애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목적을 잘 감당하려면 상대방의 입장에서 그리고 장애인 가족의 입장에서 조금이나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우리가 많은 이유로 무리들처럼 장애인이 예수님께로 가려는 길을 가로 막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비록 갖출 예의를 다 갖추며 점잖게 예수님께 나아가지는 못할지라도 예수님은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반겨 주시고 칭찬하며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