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황금률”(the golden rule)이라 이름 붙여진 성구가 있습니다.
다음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눅 6:31).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이 황금률이 “율법과 선지자”라고 말씀하심으로 구약성경이 가르치는 핵심적인 내용이라고 하십니다. 남이 바라는 대로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 성경의 중심계명이고, 다른 계명은 이 계명에 대한 설명이라고 생각해도 무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같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황금률이라는 별명으로 불려지게 된 데는 약간의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기원은 3세기 초반 로마의 제 24대 황제 알렉산더 세베루스가 이 말씀을 귀중히 여겨 궁궐과 집무실에 황금으로 써서 벽에 붙인 데에서 기원하였다고 합니다. 정말 황금으로 기록하여도 아깝지 아니한 예수님의 명언이며, 기독교 윤리관의 기초를 이루는 귀중한 말씀입니다.
기독교가 아닌 세상의 여러 경전에도 이와 비슷한 문구들이 많이 발견됩니다. 예를 들어, 공자 선생님은 논어 위령공편에서 “내가 원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행하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 기소불욕 물시어인)고 말씀하였습니다. 예수님의 표현이 긍정적인 명령이라면 공자의 명령은 금지의 명령입니다. 이 말씀은 성경의 말씀보다 조금 못하다고 하여 “은률”(the silver rule)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그러나 내용은 다르지 않습니다. 이는 높낮이의 차이가 아니라 동전의 양면과 같은 상호보완적인 관계라 하겠습니다.
기독교윤리의 대명제는 매우 간단한 것에서 시작됩니다. 이웃 사랑은 신, 구약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대명제입니다. 그렇다면 이웃 사랑의 계명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바로 황금률과 은률의 실천에 있습니다.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에게 하고,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은 남에게도 강제하지 않으면 됩니다. 남을 욕하거나 비판하면 아니 됩니다. 남이 우리에게 그렇게 하기를 원하지 않은 때문이지요. 남에게 배려하고 섬기면 됩니다. 남들도 나에게 그렇게 하기를 원하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예수님은 황금률을 말씀하시면서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에게 대접하면 네가 똑같은 대접을 받게 되리라 약속하시지는 않습니다. 받기 위하여 행하면 그것도 실망스러운 상황이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반드시 기억하시기 때문에,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대가 없이 베푸는 사랑이기에,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영혼이 유익하기 때문에 순종할 뿐입니다.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라”(易地思之, 역지사지)는 말은 우리가 선행을 시작하는 작은 출발점입니다. 가장 가까운 이웃인 가정에서, 부부나 자녀들에게 적용을 시작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