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어린 시절을 나사렛에서 보내실 때 갈릴리의 수도는 찌포리였다. 신약 성경에 찌포리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찌포리의 지리적인 위치상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찌포리는 주전 4년 헤롯 안티파스가 갈릴리의 분봉왕이 되면서 왕국의 수도로 삼은 곳이다. 이후 찌포리는 주후 18년 디베랴로 수도가 옮겨지기까지 갈릴리의 행정적인 중심지였다. 이방의 갈릴리로 불렸던 지역에서 로마의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도시 찌포리에 대해 간단히 정리한다.
지리적인 배경
찌포리는 나사렛의 북서쪽 6km (3.7mile) 지점에 있다. 걸어서 1시간 30분 정도 거리이다. 찌포리는 해발 약 290m의 언덕에 위치하므로 북쪽으로 벧네토파 평야의 가나 유적지와 남쪽으로 나사렛 산지가 잘 보인다. 찌포리의 서쪽은 지중해와 동쪽으로는 갈릴리 호수가 있다. 많은 샘과 기름진 평야를 접하고 있는 찌포리의 영광은 헤롯 안티파스로부터 시작되었다.
역사적인 배경
찌포리의 정착 시기는 주전 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찌포리가 유대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하스모니안 시대 이후이다. 주전 104년 하스모니안의 알렉산더 얀네우스는 이곳을 점령하고 그 이름을 찌포리라 하였다. 찌포리는 ‘새(bird)’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찌포르에서 파생된 단어인데, 아마 이곳 언덕이 새 형상처럼 보였기 때문에 찌포리라 불렀을 것이다.
주전 4년 헤롯 1세가 사망하자 갈릴리의 찌포리 주민들은 로마 정부에 반란을 시도하였다. 이에 로마 정부는 시리아에 주둔했던 군사를 이주시켜 찌포리를 함락하고 많은 찌포리 주민들을 노예로 팔았고, 약 2천 명의 유대인들을 십자가에 처형하였다. 이런 반 로마 정서에 있었던 찌포리를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의 분봉왕이 되면서 가장 먼저 이곳을 로마의 도시로 재건하였다. 헤롯 안티파스는 찌포리를 갈릴리의 수도로 정하고 로마 황제를 위하여 도시 이름을 Autocratoris로 바꾸었다. 이후
찌포리는 갈릴리에서 가장 로마다운 도시로 발전되었다. 후에 요세푸스는 로마식 도시로 단장된 찌포리를 갈릴리의 장식 (ornament of Galilee)이라 불렀다.
예수님께서 어린 시절을 보내신 나사렛은 찌포리에서 가까운 작은 유대인 마을이었다. 모든 성장 시기를 나사렛에서 보내신 예수님께서 찌포리를 알고 계셨음은 물론이고 일부 역사학자들은 부친 요셉과 함께 예수님께서 목수(건축가)로서 찌포리의 건축에 참여하셨을 것으로 생각한다. 고고학자들의 발굴 결과 주후 1세기 찌포리는 매우 번성한 도시였다.
주후 66년 로마에 저항하는 유대인의 반란이 갈릴리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로마의 영향을 많이 받은 찌포리 주민들은 1차 유대인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다. 찌포리 주민들은 성문을 활짝 열고 반란 진압 사령관인 로마의 베스파시안 장군을 환영하였다. 주전 4년 찌포리가 로마에 저항하므로 철저히 유린되었던 것과는 달리 66년에 찌포리는 그대로 보존되었다. 그리고 주민들은 베스파시안을 위하여 동전을 주조하였고 도시 이름을 에이레노폴리스 (Eirenopolis) 곧 평화의 도성 (city of Peace)이라 불렀다. 후에 도시 이름은 제우스와 로마 황제를 위하여 디오캐사리아 (Diocaesarea)로 바뀐다.
주후 70년 예루살렘은 로마에 함락되었고 헤롯 성전은 파괴되었다. 73년 마사다가 함락되므로 유대 땅은 다시 로마의 강력한 지배에 들어갔다. 이에 예루살렘을 떠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텔아비브의 남동쪽 야브네 얌을 거쳐 갈릴리로 이주하였는데, 주후 2세기에 찌포리는 유대 종교의 중심이 되었고 이스라엘의 영적 중심 도시가 되었다. 3세기 초에는 랍비 예후다 하나시 (Rabbi Yehuda Hanasi)가 이끄는 산헤드린 공동체가 세포리스에 정착하였다. 당시 찌포리의 주류는 유대인들이었다. 산헤드린이 디베랴로 옮긴 이후에도 찌포리는 성경 연구의 중심이 되었고 많은 유대 학자들이 이곳의 많은 학당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찌포리는 363년 지진에 의해 파괴되었지만 곧 재건되었다. 비잔틴 시대에 찌포리에서 기독교 공동체는 두드러지게 성장하였다. 이 시대에 많은 교회와 기독교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기독교의 성장은 7세기 중반 아랍의 침공 때까지 계속되었다.
12세기 십자군 시대에 세포리스에 작은 망대와 교회가 건설되었다. 이 교회는 예수님의 모친인 마리아의 부모님인 안나와 요아킴을 기념한 교회이다. 십자군 시대에 일부 기독교인들은 찌포리를 마리아의 출생지로 생각했기 때문에 이곳에 기념 교회를 지은 것이다. 13세기 십자군이 팔레스틴에서 퇴각하고 아랍 사회가 되면서 찌포리 역시 아랍 마을이 되었다. 아랍 이름으로 찌포리는 사푸리야 (Saffuriya)이다. 1948년 5월 14일 현대 이스라엘 국가가 탄생된 이후, 1949년 찌포리 유적지 인근에 유대인들이 작은 마을 모샤브를 이루며 정착하였다. 2006년 찌포리 모샤브에 거주한 인구는 616명이다.
이스라엘을 방문할 기회가 갖게 되면 한 때 갈릴리의 수도였던 찌포리를 방문하기를 권한다. 그곳에서 드러난 다양한 시대의 유적과 함께 근처 가나, 나사렛 마을의 위치를 파악하게 되면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갈릴리 전도 사역을 좀 더 사실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발굴 역사
찌포리는 1931년 미쉬간 대학의 워터맨 (L. Waterman)에 의해 처음 발굴되었다. 1983년에는 University of South Florida의 스트레인지 (J. F. Strange)가 많은 유적들과 저수조, 무덤들을 발굴하였다. 1985년에는 Duke University, North Carolina, 그리고 Hebrew University이 발굴에 참여하였다. 발굴에 의해 드러난 대표적인 유적들은 로마식 저택, 나일 모자이크, 원형 극장, 회당, 로마의 주요 도로인 카르도와 데쿠마누스, 아래 도시 (Lower City), 아크로폴리스가 있다.
이주섭 목사는 성경의 사실적 배경 연구를 위해 히브리어를 학습하였고, 예루살렘 대학과 히브리 대학에서 10여년에 걸쳐 이스라엘의 역사, 지리, 고고학, 히브리인의 문화, 고대 성읍과 도로를 연구한 학자이다. 그는 4X4 지프를 이용하여 성경의 생생한 현장을 연구하기도 했다. 문의 jooseoble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