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관상”이란 영화가 상영된 후 상당히 많은 사람이 관상, 사주, 타로 등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필자는 1년에 한국을 한두 번 방문하는데, 대학가, 쇼핑센터, 그리고 길가에 타로 카페 및 점치는 곳이 점점 많아지고, 또 그런 곳에 손님이 붐비는 것을 볼 때마다 안타까웠다. 물론, 이것을 한국인의 관습, 문화, 그리고 정서라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과 성경을 믿는 기독교인은 관상, 팔자, 그리고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관상, 팔자, 운명, 어떤 단어를 쓰던지 결국 영문으로는 fate와 가까운 표현들인데, 그 뜻은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결정되는, 사람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사건 및 삶”이란 뜻을 갖고 있다. 즉, 사람이 살아가며 겪는 사건, 만남, 성공, 실패, 업적 등 모든 것이 다 사전에 정해졌기에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운명론 내지 숙명론(fatalism)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운명론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바로 “누가” 또는 “무엇”이 사람의 운명을 정해놓았냐는 것이다. 운명론을 믿는 종교인, 특히 애니미즘 (animism: 원시종교, 정령신배)주의자는 자신이 믿는 신(神)이라 주장하지만, 비종교인은 자연이 정해놓은 것이라 주장한다. 즉, 운명론을 믿는 자는 운명을 주관하는 자 내지는 어떤 힘 또는 법칙이 있다고 가정한다. 그렇다면 그 자는 누구이며, 그 힘, 법칙은 누가 만든 것인가? 운명론은 이 질문에 명쾌하고 신빙성 있는 답을 제공하지 못한다.
더 나아가, 운명론을 믿고 안 믿는 것 자체에 선택의 여지가 포함되어 있기에 삶의 모든 결정, 모든 사건이 다 운명에 따른 것이 아님을 쉽게 증명할수 있다. 영화 관상에서도 한 기생이 남자가 안 따른다고 했을 때 관상가가 그 기생의 코에 점을 붙여준 후 인생이 바뀌었다고 했다. 만약 그 기생이 그를 만나지 못했다면 “타고난 남자 복”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운명론을 믿는 자는 그 관상가와 기생의 만남도 다 정해진 것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건 닭이 먼저인지 계란이 먼저인지 따지는 논쟁이요, 답이 없는 말 장난에 불과하다.
영화 관상에서 봤듯이 많은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바꿔 보려고 애쓴다. 그래서 관상가를 찾아가고, 점쟁이를 통해 사주팔자를 알아보고, 타로 카드의 그림을 분석해 달라고 한다. 점쟁이나 관상가는 운명을 알려주는 것과 더불어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며 복채를 받는다. 점쟁이나 점쟁이를 찾는 자나 둘 다 운명을 믿지만 그 운명을 바꿔보려고 한다는 것은 잘못된 결론, 역설, 그리고 당착어법이라 하겠다. 그렇기에 이런 비논리적이고 비지성적이며 비성서적인 운명론, 관상, 사주팔자, 타로는 100% 거부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이는 기독교에도 구원에 관해 예정설(predestination: 인간 개개인의 구원은 행위나 노력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미리 정해 놓으신 것임)과 자유의지 (free-will: 인간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의 초청에 응하고 선택했음)에 대한 논쟁이 있다고 지적할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이론은 하나님의 존재, 구원, 중생, 회심, 칭의, 성화 등 원칙적인 것에 대한 반론이 아니다. 그리고 이 두 경쟁 이론의 공통적 결론은 하나님의 섭리를 인간의 머리로선 완벽히 이해하고 설명할 수 없으며, 예정설이던 자유의지이던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영혼구원을 위해 전도와 선교에 전력을 다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선하신 하나님, 평안과 장래의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 그러나 때론 고난을 통해서도 가르치시고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영혼구원에 힘쓰며 살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