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시편 묵상 나눔의 아침입니다. 오늘도 새 힘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느끼며 이렇게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을 함께 나눌수 있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도움이 되지 아니하셨더면 내 혼이 벌써 적막중에 처하였으리로다 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 내 속에 생각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 (시 94:17-19)

시인은 자신의 혼이 어두움에 처하지 않고, 어둠 밖으로 구출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움이었음을 먼저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시인이 처했던 상황이 결코 작은 위험이 아니었고, 시인의 혼이 멸망 당할 수 밖에 없었던 큰 위험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시인이 표현하고 있는 "적막중"이라는 말은 상징적으로 죽음을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이한 구원의 체험을 통해 시인은 하나님의 자비와 능력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시인은 구원의 체험을 구체적으로 두 가지로 표현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우선 시인은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 말할 때에"라고 다소 감각적으로 자신이 처했던 위험을 고백하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그리고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라고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를 시인은 다른 시편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시 116:8). 시인은 이 구원의 손길이 바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에서 비롯된 은혜임을 스스로 느끼며 주님의 자비하심과 그 능력을 찬양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이제 시인은 "내 속에 생각이 많을 때에" 라고 다른 표현으로 구원의 체험을 고백합니다. 미끄러짐은 밖으로 드러난 위험에 대해 느껴지는 시인의 표현이었다면, 이 고백은 시인의 마음 속에서 느껴졌던 위험의 문제를 이야기 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시인은 닦친 위험 앞에서 자신을 불안하게 하는 생각들로 인해 절망하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이 시인의 표현을 존 칼빈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생각'이라는 말로써 그는 위로부터 그에게 위안이 내리지 않았다면 그를 압도하고 말았을 불안하고 당황케하는 근심을 뜻하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상황에서 시인은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 라고 분명하게 자신이 받은 구원을 즐거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영혼의 즐거움이야 말로 주님께서 시인에게 주신 특별한 구원의 표징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가지 말 못할 고난으로 힘겨움에 처해있는 성도님들에게 예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영혼의 즐거움"이 임하기를 바라며 기도드립니다.

(존 칼빈 주석/ 시 94:17-19) "우리가 비록 육신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근심 걱정에 억눌려 초조하고 괴로움을 받는다 할지라도 시편 기자가 여기서 그처럼 고상한 말로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의 위안에 만족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 신자들은 판이한 두 가지 마음의 상태를 의식한다. 한편으로 그들은 여러 가지 두려움과 근심으로 번민하고 괴로와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위로부터 오는 은밀한 기쁨으로 즐거워한다. 이 위안은 그들이 필요로 할 즈음에 위로부터 임하여 그들이 당하는 고난과 역경에 삼키운 바 되지 않도록 그들을 보전해 준다."